< MISSION 04 : 츠바키 (32) >
호텔 로비에서 현장 요원에게 요청 사항을 전달하고 다시 방으로 올라온 한규호는 침대에 누워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츠네타카가 건네준 서류 봉투에 들어 있던 일정표였다.
일정표에는 내일 아침 이른 시간에 신칸센을 타고 아키타로 갔다가 다시 아키타로 돌아오는 세부 일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양조장 두 곳을 방문하는 여정이 담긴 일정표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타고 이동하는지 어떻게 돌아오는지에 대한 일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한규호는 눈으로 대충 살펴보던 종이를 휙 하고 던져 버렸다.
그를 모시고 다닐 누군가는 달달 외워야 하겠지만, 귀한 손님인 한규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규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전 로비 커피숍에서 만난 두 요원을 떠올렸다.
한규호에게 정체를 발각당한 두 사람은 문책을 당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미국으로 불려 갈 것이다.
미국으로 불려 가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대화를 나눌 때, 한규호-그들이 알기로는 브랜든 허드슨이겠지만, 브랜든 허드슨의 표정이 어땠는지, 어조가 어떠했는지를 자세하게 진술하게 될 것이다.
운이 좋다면 승진할 수도 있겠지. 트레이시처럼.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도 평소처럼 브랜든 허드슨으로 아내인 애블린 길먼에게 로비에서 키스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한규호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꼭 한 문장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자면 그녀는 삐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규호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한규호는 성남의 태청무역 사무실에서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미국은 당신, 미스터 한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진실.
-그러나 관심이 있다고 해도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거예요.
거짓.
-당신이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진실과 거짓.
-그러나 나는 당신의 가치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진실.
-우리와 일을 해서 계속 공적을 쌓아야만 해요. 당신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과 평가는 더욱 높아질 것이에요.
거짓.
트레이시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말, 한국에서 미국까지 가는 동안의 여정, 미국에서 서류 작업을 위해 대기했던 잠깐의 시간, 그리고, 일본으로 향하는 일등석 비행기, 일본에서의 여정 등을 생각할 때, 한규호는 이번 작전이 일종의 접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이번 작전에서 맡은 역할은…… 제 남편이에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어쩌면 랭리에서는 트레이시에게도 한규호를 접대할 어떤 역할을 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앤 챔버를 만나고, 고작 스물몇 살에 불과한 그녀가 기프티드라는 이유로 미국 정부에게서 어떠한 보호를 받는지를 보았다.
-저희 헤드로부터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조카딸을 보살펴 줘서 고맙다’는 전언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마지막에 엘 오로의 멱을 따러 갔을 때, CIA에서 한 말이다.
한규호는 헤드와 조카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CIA의 국장이 자상한 마음과 넓은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라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메스티소 소녀를 조카로 삼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앤 챔버가 기프티드이기 때문에 특별 관리한다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앤 챔버가 미국에 가서 어디까지 보고를 했을는지는 모른다.
그녀가 보여 준 마지막 얼굴을 생각하면, 앤 챔버는 한규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CIA의 그 무서운 놈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파악해 냈을 것이다.
한규호가 그들이 정의하는 기프티드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이야기가 방향성을 가진다.
이번 작전은 그저 한규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접대 여행이다. 미국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모든 방향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한규호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그것뿐일까?
그 음험한 CIA가 단지 이적 협상 테이블을 열겠다는 단 하나의 의도로 이번 작전을 계획한 것일까?
단지 그 이유 하나뿐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조금 쉬었다 할까요?”
코시자와중공업 측 인사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상대방 인사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길어지는데, 진전되는 내용이 없으니 걱정이 되네요.”
트레이시가 옅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트레이시는 서류 가방을 챙겨, 코시자와 중공업이 제공해 준 임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피곤했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제 막 논의를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정신적 피로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녀가 느끼는 피로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아침에 로비에서 한규호가 해 주던 키스를 떠올렸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살짝 닿는 가벼운 입맞춤일 뿐이었다.
일본에 도착하고 다음 날, 그러니까 처음으로 코시자와 중공업으로 향하던 날 아침에, 한규호가 로비에서 그녀에게 처음으로 입을 맞췄을 때, 트레이시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깜짝 놀랐다.
전날 밤, 그렇게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돌아서던 남자가, 아침에 마치 진짜 남편처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키스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부터 둘 사이에 대화가 늘어나고,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트레이시는 자연스럽게 아침에 그가 해 주는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규호의 키스는 분명히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 키스는 달랐다.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입술에 마음을 담지 못했다. 전날 밤 그와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프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프로는커녕 지금 그녀의 모습은 트레이시 자신의 모습도 아니었다.
이제껏 그녀가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도 남자에게 휘둘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마구 휘둘리고 있다.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를 보았을 때부터 일본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와 관련되어 있는 일들은 그녀의 생각대로 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침착해, 트레이시 테일러. 침작해.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마치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녀처럼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에게 강하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다시 어젯밤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제삼자의 관점에서 무엇이 그녀를 혼란하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했다.
결국은 그 이야기다. 그 여자와 잘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야기.
한규호 그 남자가 누구와 자든 그 부분은 트레이시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었다.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질투.
트레이시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어젯밤 자신의 말과 생각을 복기했다. 그리고 그녀를 지배한 감정이 질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트레이시는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자신은 그를 질투할 이유가 없다. 그러할 자격이 없다.
그저 업무적인 관계일 뿐이다. 아니, 트레이시의 성공을 위해 그는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가 누구와 잠을 자든, 누구의 목숨을 빼앗든 상관없이, 그가 미국의 품에만 안긴다면, 트레이시는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 트레이시는 분명히 자격 없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이유 없는 질투를 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떨구어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트레이시는 다시 아침에 있던 일로 회상 장면을 전환했다.
그에게 키스를 받았다. 그러나 평소와는 마음이 달랐다. 그래서 그저 입술만을 건넸다. 그런 미숙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가 키스를 해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언제나처럼 그 부드러운 입술로 키스를 해 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연기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트레이시는 눈을 감았다.
뭔가 톱니바퀴가 어긋난 기분이었다. 톱니바퀴가 어긋난 기계가 억지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트레이시는 두 팔을 내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언제나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데려오는 남자, 츠네타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보자 트레이시는 갑자기 화가 났다.
저 남자가 여자를 골랐을 것이다. 한규호를 유혹하기 위한 여자를.
“괜찮아요? 피곤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츠네타카가 특유의 미소를 띠며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항상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트레이시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츠네타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아픈 건 아니고 그저 협상에 진전이 없으니까, 그 부분이 걱정되어서.”
트레이시가 또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다.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상대방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마치 한규호가 자신에게 보여 주는 모습처럼.
“우리 회사와 협력 관계에 있는 병원이 있으니까,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말해 주세요. 솔직히…… 뭐, 제가 좀 주제넘는 말을 하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츠네타카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얼굴에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가 지금 표정과 대사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었을지가 궁금해졌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적인 여자라면 지금 그의 표정과 말에 넘어갔을 것이다.
만약 트레이시가 이런 일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 츠네타카를 만났다면, 그의 미소에, 그의 말투에 호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츠네타카의의 부드러운 미소와 자상한 말투를 접할 때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무심한 얼굴과 투박한 말투가 떠오르는 지금의 트레이시는 절대로 츠네타카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고마워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트레이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웃어 주었다. 그가 조금 더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만족스럽게 웃음을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한규호와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던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
CIA의 밀러 국장은 서류 한 장을 읽고 있었다.
국장의 비서관 중 한 명인 남자는 국장의 맞은편에 앉아서 힐긋 자신의 손목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피곤했다. 피곤했지만 피곤하면 안 되었다.
“이것뿐인가?”
밀러 국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비서관이 말했다.
도쿄에 마련된 임시 상황실에서 보내온 전문에는 현지 시간으로 내일 정오까지 준비되어야 할 요청 사항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이 현장의 판단으로 진행되었고, 국장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은 단 하나뿐이었다.
“진행하도록. 그리고 당분간은 선 조치, 후 보고 하도록.”
국장이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비서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생각했다.
도쿄는 지금 오후 2시가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전문이 얼마나 더 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들어온 전문이 오늘의 마지막 전문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비서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밀러 국장은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생각을 하기 위한 그만의 습관이었다.
스튜가 직접 현장 요원에게 접촉했다. 그리고 요구 사항을 말했다.
요구 사항을 통해서 스튜가 어떻게 행동하려 하는지를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움직이려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접대를 받기 위해 일본에 초청된 것일 뿐이다. 양조장 견학도 일본 측에서 마련한 일종의 접대였다.
그는 지금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단순히 자신을 접대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을.
그는 움직일 필요가 없다. 소말리아나 베네수엘라와 달리, 구해야 할 사람도, 처치해야 할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밀러 국장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는 움직이려 하는 것일까?
설마 그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은 아닐까?
짐빔의 죽음에 얽혀 있는 숨겨진 진실을, 그리고 이번 일본에서의 작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도를?
< MISSION 04 : 츠바키 (3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