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31) >
홍콩에서 차출된 CIA 요원은 등줄기가 땀에 축축하게 젖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체불명의 감시 대상이 불쑥 나타나 합석을 요청한 이후, 그는 어떻게 해도 진정할 수 없었다.
그가 랭리에 연락할 것을 요청해 주었고, 그 내용은 바로 임시 상황실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상황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브랜든 허드슨은 맞은편의 여자 요원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 요원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한규호의 말을 받아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등에도 땀줄기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남자 요원은 생각했다.
“생각 외로 일본 음식은 간이 강해서 놀랐습니다. 일본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하면 음식 맛도 얌전할 것 같은데 말이죠.”
한규호가 여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좀 그런 감이 있죠. 선생님은 일본이 처음이신가요?”
여자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브랜든이라고 불러 주세요.”
“레일라에요.”
여자는 사용하는 가짜 이름 중 재빨리 하나를 골랐다.
물론 한규호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서 그 이름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챘다.
“전 이번이 처음입니다. 레일라는 어떤가요? 일본에 여러 번 와 봤나요?”
한규호도 거짓말을 했다. 물론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네. 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진실.
“여행을 좋아해서요.”
거짓.
한규호는 웃음을 머금은 입에 커피를 머금었다.
“생각해 보니 일본은 처음이 아니네요. 전 여기서 태어났으니.”
한규호가 말했다.
“태어나셨다구요?”
여자가 눈에 놀라움이 담겼다.
진실.
“코인 로커 베이비라고 들어 보셨나요?”
“아…….”
여자의 눈에 동정의 감정이 비쳤다.
진실.
“히메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종이 한 장 없는 상태로. 그래서 이름도, 생일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유감이네요.”
진실.
한규호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현장 요원들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한규호는커녕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지시에 따라서 정해진 스케쥴에 따라 한규호를 감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눈동자와 호흡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
롯폰기에 설치된 임시 상황실을 지키고 있던 CIA 요원 윌 로랜드는 두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상황실 총괄 담당은 세 명이었는데, 유독 그가 있을 때만 뭔가 일이 벌어졌다.
이른 아침을 먹고 상황실에 나와서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매일 수영하고, 책 보고, 맥주 마시고, 피트니스 가서 운동이나 하던 브랜든 허드슨이 현장 요원에게 접근할 줄이야.
젠장. 뭐 그럴 수도 있다. 전 세계에서 차출당한 CIA 요원들이 보호하고 감시하는 사람이니까, 뭐 요원일 수도 있다. 그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문제는 현장 요원이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브랜든 허드슨이 어떻게 알았는지 현장 요원을 알아냈고, 직접 접촉해 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책임을 추궁당하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양의 서류 작업이 따라올 것이다.
그게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CIA 현장 요원이 발각되었다는 사실, 그게 중요했다.
-전문 들어옵니다.
이어셋을 타고 상황 요원의 보고가 들어왔다.
벌써?
윌 로랜드는 본능적으로 노트북을 향해 움직이는 시선을 잡아끌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랭리에서 지시 사항이 들어있는 파일이 노트북에 들어왔다.
윌 로랜드는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신 후 손가락을 자판으로 가져가 요원 인식 코드와 이번 작전에 사용되는 암호화 코드를 입력했다.
파일이 열리고 내용이 화면에 떴다.
[요청한 사항을 모두 들어 줄 것. 지원이 필요하면 오키나와에 연락할 것.]
윌 로랜드는 그 짧은 문장을 세 번 읽어 보았다.
정체불명의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모른다. 그저 랭리에 그가 요청 사항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고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랭리에서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전부 다 들어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파격적인 전문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현장에서 요청 사항이 있으면 웬만한 긴급 사항이 아닌 다음에야 몇 단계의 보고와 승인 절차를 거쳐야 답변이 왔다.
처리하는 데 빨라도 12시간, 긴급하지 않은 요청이면 일주일 이상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을 접수하고, 내용을 랭리로 보낸 지 고작 6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전문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이런 파격적인 내용으로.
윌 로랜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지금 요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작전을 맡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문이 열리고 곽용신이 들어오자 서류를 바라보던 김형원 사장은 고개를 들었다.
곽용신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다음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통화 음량을 최대한 올린 다음 테이블 위에 살포시 놓은 다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어, 말해.”
-뭔데. 왜 기다리라고 한 건데?
스피커 모드가 아니었지만 최대로 키운 통화 음량 덕분에 김형원 사장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담배 피우러 나왔다, 이 새끼야.”
곽용신이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리고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리도록 일부러 두어 번 헛바퀴를 돌린 다음에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 이상한 짓 하는…….
“끊어, 이 새끼야. 의심 많은 새끼.”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김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금방 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금방 전화가 울렸다.
곽용신은 김형원이 소파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 이 새끼, 진짜…….
“시끄러워. 용건만 한 문장으로.”
-…….
김형원은 곽용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곽용신이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봐 줘.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임마, 아무리 한 문장이라고 해도 주어 목적어가 있어야지. 다짜고자 서술어만 말하면 뭔 내용인지…….”
-경고한다. 더 이상 장난치지 마라.
전화기 너머로 협박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곽용신은 그 목소리가 그저 삥 뜯는 중학생처럼 우습게 들렸다.
“데이빗 박?”
-그래.
“얼마?”
-얼마를 원하는데.
“얼마 줄 수 있는데.”
두 사람은 마치 흥정하는 도소매상처럼 말했다.
-……3백.
“언제?”
-알아오면.
“고객님, 착수금이라는 단어 들어 보셨나요?”
-웃기지 마.
“내가 유머 센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좀 듣지. 그거랑은 별개로 내가 뭘 믿고 움직이냐. 아니면 정보를 내놓든가.”
느물거리며 말하는 곽용신을 보면서, 김형원은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것이 전적으로 문정규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 불러.
“얼만데.”
-우선 50 줄게.
“안녕히 가세요, 고객님.”
-장난치지 마.
“너야말로 장난치지 마. 내가 무슨 병신으로 보이냐? 야, 나 인도에 있다가 온 사람이야, 임마.”
-……얼마면 되는데.
“착수금 2백, 정보 넘길 때 2백.”
-X 까는 소리하고 있네.
그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곽용신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거의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믹스커피가 조금 남아있는 종이컵에 비벼 껐다.
김형원은 설명하라는 시선으로 곽용신을 보았다.
“처음에 3백을 불렀습니다.”
곽용신이 다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진짜 줄 생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절대로 손해는 안 보는 놈이니 3백을 불렀다는 이야기는 그 새끼가 정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돈이 최소한 배 이상이라는 이야기죠. 뭐. 십진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 아마 1천만 원 정도 될 것 같네요.”
김형원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냈다.
“머리가 복잡하겠죠. 과연 내가 정보를 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돈을 날릴 수도 있는데, 착수금은 날린다고 치고, 50만 원 정도면 뭐 그냥 똥 밟았다 치고 넘어가도 2백만 원이면 뭐 아깝지는 않아도 속 쓰리니까. 그것도 나한테 뜯겼다면 말이죠. 하지만 분명히 내가 알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짱구를 굴리고 있을 겁니다. 돈이야 뭐 본사의 높은 분들에게 크게 중요한가요. 작전비 조금만 삥땅 쳐도 돈 천 만드는 거야 우습지. 아 씨, 생각하니까 열 받네.”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문정규 저 새끼는 돈 떼일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휘둘릴까 봐 그게 싫은 거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나에게. 착수금만 뜯기고 얻어 내는 거 없으면 더 열 받을 테고. 그게 싫은 거죠. 다시 전화 옵니다, 분명히. 아마 시간도 촉박할 텐데, 금방 전화 올 겁니다.”
곽용신의 말에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문제는 돈을 받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돈 받고 나서는?”
“알려 줘야죠.”
“뭐를?”
“자세한 건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럴싸한 파일을 하나 만들어 주면 좋다고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함정을 파겠다.”
“함정이라는 단어는 좀 그렇고, 아무튼 미끼를 던지면 누군가가 물려고 들겠죠. 우리는 기다렸다가 어떤 놈이 데이빗 박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고.”
“돈도 뜯어내고.”
“뭐, 수고비 정도는 받아도 괜찮겠죠.”
“괜찮지, 그 정도는.”
김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있던 전화기가 다시 진동했다.
“우리 고객님 졸라 마음 급하시네.”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국정원 요원 문정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분노을 억지로 찍어 누르며 생각했다.
건방진 새끼.
동기라고는 해도 태생부터 다르다.
언젠가 국정원 전체를 진두지휘할 자신이, 말석에서 떠돌다 계급 정년에 컷 당할 것이 분명한 곽용신에게 휘둘린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건방진 새끼.
문정규는 곽용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전부터 그 느물거리는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번에 그 자식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정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대학 후배이자, 국정원 후배였던 김규택이 전화를 걸어왔고, 마치 작전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데이빗 박이라는 놈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왜냐는 질문에, 김규택은 지금은 말할 수 없고 1천5백만 원짜리 정보라고 했다.
문정규는 알겠다고 답했다.
당연히 그는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김규택이 회사를 그만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국정원 요원이 외부인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고작 1천5백만 원에?
경력을 망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최소 퇴사, 재수 없으면 구속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김규택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데이빗 박이 뭐하는 놈인지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 업계에서 정보의 가치는 금보다 귀하다. 정보는 곧 권력이었다.
데이빗 박이라는 놈이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정체불명의 남자의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문정규는 자신이 가진 권한을 사용해 데이빗 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없었다. 직원인지, 하청인지조차 파악이 안 되었다.
그래서 조사 범위를 넓히던 와중에 곽용신에게까지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를 이토록 짜증 나게 할 줄은 몰랐다.
문정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
곽용신이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쳤다.
“……백, 2백.”
문정규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착수금 백만 원, 그리고 정보를 넘길 때 2백만 원.
-너 머리가 많이 나빠졌구나. 아까 내가 분명 2백…….
“마지막 기회다.”
문정규가 낮게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2백, 150. 나도 마지막이야.
전화기 너머에서 곽용신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정규는 자신의 낮은 목소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건방진 놈.
착수금 2백만 원. 허공에 날려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큰돈은 아니다.
문정규는 곽용신에게 엿을 먹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확실히 할 수 있겠지?”
문정규가 물었다.
-속고만 살았나. 우리 고객님, 아주 걱정이 많으시네.
전화기 너머에서 곽용신이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좌 번호 보내.”
문정규는 곽용신이 불러 주는 계좌 번호를 받아 적고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조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은행 어플을 실행시켜 받아 적은 계좌로 돈을 이체했다.
문정규는 이체 내역을 보면서, 언젠가 곽용신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심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3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