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30) >
홍콩에서 차출되어 온 CIA 요원은 갑작스러운 브랜든 허드슨의 출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최대한 당황함을 감추며 인사했다.
분명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언제 방향을 바꿔서 이쪽으로 왔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걸 이해해야 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여기요,”
브랜든 허드슨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 아이리시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그사이에, 홍콩에서 온 남자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에 하얏트호텔 로비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들어차 있었다.
빈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합석을 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제가 실례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브랜든 허드슨이 부드러운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실례였다.
감시 대상이 감시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반칙이다. 공정하지 못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과연 이 남자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처럼 심심해서, 대화 상대를 찾기 위해서 우연히 접근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괜찮소.”
남자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숙녀분께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랜든 허드슨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요원, 부잣집 영애처럼 꾸민 요원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여자가 말했다. 남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들렸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 참 좋네요.”
브랜든 허드슨이 말했다.
“그러네요.”
여자가 답했다.
“의상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브랜든이 여자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여자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금 마음을 진정시켰다.
브랜든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
“3일 전에는 대학생 같았는데, 그런 모습도 잘 어울리시는군요.”
여자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은 더욱 젊어지셨고.”
남자는 자신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는 브랜든 허드슨의 말에, 조금씩 진정되어 가던 그의 심장박동이 다시 힘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말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연기하고 있지만 감정의 동요가 한규호에게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3일 전에는 노인분이셨는데 말이죠.”
한규호가 말했다.
“……사람을 착각한 것 같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거짓말.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하려고 해도, 거짓말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킨다.
사람의 뇌는 의지에 통제를 받지 않았고, 의지에 통제를 받지 않는 뇌는 거짓말을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식해 반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태연한 척을 가장한다 해도, 뇌가 보내는 신호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눈동자와 호흡이다.
거짓말은 스트레스 요인이고, 뇌는 동공을 축소하는 명령을 내린다.
거짓말을 할 때, 동공은 미세하게 축소된다.
크기뿐만이 아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진동하는 동공은 거짓말을 하는 그 순간에 진동 주기가 바뀐다.
호흡도 마찬가지이다. 거짓말을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든 호흡에 변화가 찾아온다. 심박과 혈류의 변화에 맞춰 미세하게 빨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눈동자나 호흡의 변화는 일반적인 사람의 감각으로는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했다.
문제는 한규호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한규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직원이 생크림이 올라간 아이리시 커피를 들고 테이블로 찾아왔다.
CIA 요원 두 사람은 최대한 긴장된 마음을 감추면서 한규호가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일반인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미세한 변화였지만, 한규호는 마치 지진처럼 요동치는 두 사람의 동공을 보면서 천천히 베일리스가 들어간 아이리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는 두 분을 3일 전에 봤습니다. 노인과 여대생 같은 모습으로 식당에서 만났었죠. 아, 물론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규호가 눈가에 웃음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은 마치 사형선고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위장 요원이 발각되었다? 최악의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뭐 아니라고 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지만, 저라면 그렇게 계속 주장하지는 않을 것 같군요.”
한규호가 다시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여자가 물었다. 조금 전 자연스럽던 말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랭리에 연락을 해 주시죠.”
랭리라는 단어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필요한 게 있다고 말 좀 전해 주세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다시 연락을 해 올까?”
김형원 사장이 담뱃갑을 건네며 물었다.
“합니다, 그 자식은 분명.”
곽용신이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낸 다음 다시 김형원 사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김형원 사장은 먼저 곽용신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고,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소파에 등을 기대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니까, 본부에 있는 쫄따구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을까.”
“3급입니다.”
“그래. 쫄따구.”
“쫄따구…… 3급…… 쫄따구…….”
곽용신은 작게 중얼거리며 담뱃재를 빈 캔에 털었다.
“아무튼 그 얍삽한 자식이 어디선가 주워들었겠죠. 본사 놈들은 후까시는 졸라게 잡아도 실제로 아는 건 없으니까.”
“그렇지, 본사 놈들이.”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 알고 싶은데, 한 과장이 데이빗 박이란 이름 그전에도 썼습니까?”
질문을 들은 김형원 사장은 대답하는 대신 곽용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곽용신도 말없이 그 시선을 그대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사장실 안에서 담배 연기만이 천천히 아지랑이를 그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궁금한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김형원 사장이 이미 어느 정도 꽁초가 쌓여 있는 빈 캔에 담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네.”
곽용신이 담뱃불이 거의 필터 끝까지 도달한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흐음,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내가 사장이니까.”
김형원 사장은 손으로 턱을 가져가 면도 안 된 턱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죠, 뭐. 3급, 쫄따구. 네, 뭐.”
“왜 회사에 들어왔나?”
“네?”
“경찰 하고 싶지는 않았나?”
생뚱맞은 질문에 곽용신은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네, 뭐, 경찰도,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형사도 괜찮겠다 생각을 한 적은 있었는데…….”
“있었는데?”
“그 뭐냐, 좀, 뭐, 그냥. 뭐 형사라고 깡패 놈들 패고 다닐 수도 없고.”
“민주 경찰이 사람 때리면 안 되지.”
“깡패 놈은 사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뭐 암튼 법 지켜 가면서 하면 좀 재미없을 것 같고. 근데 여기는 그 뭐랄까.”
“여기는?”
“그 뭐랄까. 법 좀 어겨도 될 것 같고,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은 좀 때려도 별 탈 없을 것 같고……. 뭐 그런 거죠. 뽀대도 나고.”
“뽀대가 나나?”
“아니, 뭐 그렇지는 않더군요. 본사 놈들은 후까시 좀 잡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뭐 맨날 귀양살이만 해서.”
곽용신에 대답에 김형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한 과장이 그전에도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썼는지 알고 싶다?”
“네.”
“꼭?”
“꼭 알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알면 좋겠다. 뭐 그런 느낌?”
“몰라도 괜찮다?”
“알면 좋죠.”
곽용신이 말했다.
“귀양살이 하고 다닌 이유를 알겠구먼.”
“네?”
김형원은 담뱃갑을 집어 곽용신에게 내밀었다.
곽용신은 살짝 역겨움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담배를 한 개비 빼 들었다.
“윗사람들이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하면 윗사람들은 불안해지거든.”
김형원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곽용신이 들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이게 알려 주겠다는 이야기야, 아니면 안 알려 준다는 이야기야.
곽용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김형원이 입을 열었다.
“데이빗 박이란 이름은 그때, 동남아에서만 사용한 이름이야.”
곽용신은 김형원의 어투가 바뀌었다고 느꼈다.
“한 과장. 정보위원회에서 특별 관리하는 독립 요원 한규호가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곽용신은 김형원의 말투와 눈빛에서, 자신이 지금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곽용신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김형원 사장이 해 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정보위원회.
노출되어 버린 국가정보원의 해외 조직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조직,
한규호, 하청 취급받는 독립 요원이 아니라 비밀 조직이 특별 관리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방글라데시의 한 깡촌 마을 탄치에서 데이빗 박으로 한규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일반적인 요원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다.
넝마가 된 옷을 입고, 정신을 잃은 한 여자를 업고 온 것은 백번 양보해 그럴 수도 있다고 해도, 딱 봐도 특수작전 팀임이 분명한 미국 놈들이 헬리콥터까지 끌고 와서 마중을 나온 사람을 그냥 요원이구나, 하청 독립 요원이구나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마중 나온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곽용신은 현장에 남아 버린 CIA 여자 요원을 떠올렸다.
예뻤지. CIA는 얼굴 보고 애들 뽑나?
아무튼 그 CIA 요원이 남아버린 것이다. 헬리콥터를 보내면서까지 그 남자의 곁을 지킨 것이다.
곽용신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다른 곳으로 향해 가는 생각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집중하자. 지금은 우선 한 과장에게. 데이빗 박에게 집중하자.
곽용신이 김형원에게 말해 준 가설은 이랬다.
데이빗 박, 동남아시아 작전에서만 사용된 그 이름이 한참이 지난 지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말은 동남아시아에서 한 과장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누군가가 그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인 친분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의도도 아닐 것이고.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손길이 한국까지 닿았다. 아니, 애초에 위장 신분의 국적이 한국이었으니까 당연한 결과일지도.
어찌 저찌 정보가 문정규에게까지 내려갔고, 문정규는 어둠 속에서 아무거나 걸리라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 돌 중 하나가 곽용신에게 닿았다.
중요한 것은 문정규가 아니다. 한 과장의 정보를 원하는 자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문정규 같은 쫄따구에게까지 정보가 내려갔다면, 그 누군가는 정보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곽용신 그가 탄치에서 한 과장을 만난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정보를 찾아다닌다는 것이 그 가설을 입증한다. 분명 정보를 찾기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했고, 실패했고,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전환한 것이다.
곽용신은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건물 밖으로 나가거나, 사장실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려가자니 귀찮고, 사장실에 들어가자니 직원들 눈치가 보인다.
안 그래도 요즘 자주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여서 직원들이 쑥덕쑥덕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작 담배 한 대 피우자고 그런 모습을 또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정보위원회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언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것 같은 찝찝함에 사장실을 들어가는데 먼가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호기심 때문이다. 그냥 대충 둘러대고 말 것을.
그렇게 후회하던 찰나, 그의 전화기가 다시 진동했다.
그리고 아침에 본 이름이 다시 떠 있었다.
곽용신은 전화기를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곽용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통화 되냐?
문정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 되지. 다시 전화할 줄 알았다, 이 자식아.
“잠깐만.”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3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