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01화 (202/386)

< MISSION 04 : 츠바키 (29) >

곽용신은 회사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조그만 공으로 블록을 깨는 단순한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여행길 같은 초장거리 출퇴근길에, 이런 단순한 게임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곽용신은 경험으로 체득하였다.

곽용신은 휴대전화 액정에 닿은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발사 궤도를 조정했다.

그 손가락이 화면에서 떨어지면 작은 공은 곧장 그가 정한 궤도로 발사된다. 그리고 한번 발사된 공은 회수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신경을 화면에 집중하고 궤도를 계산하고 있었다.

손가락에 떨어지자 공은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곽용신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손가락을 떼던 그 순간, 미세하게 궤도가 틀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곽용신의 느낌대로 공은 블록과 블록 사이를 파고들지 못했다. 그저 입구의 블록 몇 개를 건드리고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뭐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없구먼, 마치 이놈의 인생처럼.

곽용신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냥 다시 되돌리기를 해?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석을 쓰면 지금의 실수를 무효화할 수 있다. 그러나 무과금 유저로서, 하루하루 출석 체크를 해 가면서 모은 피 같은 보석을 쓴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냥 확 써 버릴까? 이러려고 모은 보석인데. 아니지, 더 중요한 타이밍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옛 성현이 아끼다 똥 된다고 했는데. 어쩌지?

피 같은 보석 3백 개를 쓸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에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가 온 것이다.

“음?”

화면에는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문정규.

오랜만에 보는 국정원 입사 동기의 이름이었다.

동기라고는 해도 서로 살갑게 전화를 할 사이가 아니었다.

“뭐여, 이 자식이 갑자기.”

곽용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이, 곽용신이, 잘 지내지?

전화기 너머에서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곽용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놈 봐라. 어디 상사의 전화를 그렇게 버릇없이 받아?

“상사?”

-아, 몰랐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매일 귀향만 다니느라 바쁘니까. 나 3급 달았다, 3급.

곽용신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 새끼야. 나도 3급이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욕망을 참으면서 곽용신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럽고. 왜 전화했는데?”

곽용신과 같이 입사한 동기는 다섯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은 국정원에서 몇 년 안 있다 대기업에 스카우트되어 옮겨 갔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치권으로 흘러갔다. 다른 하나는 표면적으로는 실종된 상태이고.

현재로서는 그 다섯 명 중 유일하게 곽용신과 문정규 이 둘만이 국정원에 남아 있었다.

곽용신과 달리 문정규는 항상 승진이 빨랐다.

첫 발령도 서울 본부로 받았고, 이후에도 소위 말하는 출세가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어? 너 이 새끼, 이거 상급자의 전화 받는 태도가 영 아닌…….

“개소리 할 거면 끊는다.”

곽용신이 말했다.

개새끼, 승진 자랑하려고 전화했구먼.

문정규가 승진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끌어 줄 선배들이 많은 서울대를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정규 저 자식은 좋게 말하면 눈치가 빨랐고, 나쁘게 말하면 얍삽했다. 얍삽함을 넘어 야비했다. 그것이 문정규에 대한 곽용신의 평가였다.

-야, 끊지 마! 야!

전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곽용신은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용건만, 한 문장으로.”

-야,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너무하는 거 아냐? 단둘밖에 안 남은 동긴데.

“두 문장. 나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럼 잘 지내라.”

-데이빗 박, 요즘 뭐 하냐?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흘러 나왔다.

“누군데, 그게.”

곽용신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임마, 다 알고 전화한 거야. 너 동기한테까지 이럴 거야?

“까고 있네. 동기 같은 소리 처하고 있네. 우리가 언제 사이좋게 지낸 적 있었어? 난 너 임마 졸라 싫어하고, 너도 나 싫어하는데 임마. 개소리는 그만 좀 하고.”

곽용신은 혹시라도 당황하는 감정이 새어나올까 봐 일부러 격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데이빗 박. 태청무역과 같이 일하는 독립 요원 한규호 과장이 동남아 지역에서 임시로 사용했던 작전용 가짜 이름이다.

곽용신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태청무역에서 과장 직위를 가지고 있지만 출근은 하지 않는 독립 요원이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썼고, 그 이름으로 동남아에서 이상한 작전을 하나 수행했다는 것.

그가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또 사용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곽용신이 그 입장이라면, 절대로 그 이름을 다시 쓰지는 않을 것이다.

대충 파악한 것만으로도 미국, 중국의 MSS가 껴서 엉망진창이 된 작전이다. 그런 작전에서 사용한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자살행위다. 스스로의 목에 밧줄을 거는 짓이다.

“누군데, 그게? 데이빗 박?”

곽용신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가설은 두 개다.

하나는 용건이 없으면 절대로 친한 척하지 않는 저 얍삽한 놈이 어디선가 그 이름을 주워 들었고, 뭐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있는 것.

뻔뻔한 새끼.

또 다른 가설은 데이빗 박이라는 동명이인이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지.

-몰라? 하긴. 미안하다. 내가 너 귀양살이 하는 거 깜빡하고. 내가 잘못했네. 씨발 내가 잘못했어.

곽용신은 문정규를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특히 이런 부분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말을 X같이 하는 것.

하지만 지금 전화를 끊을 타이밍은 아니라고 곽용신은 생각했다.

뭐라도 캐내야 했다.

“씨발 졸라 미안하네. 귀양살이하는 도움 안 되는 동기라서. 하지만 머슴들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지.”

곽용신은 스스로 머슴을 자청했다.

문정규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전화를 끊지 못하도록.

-뭘 머슴까지. 임마, 아무리 좀 안 풀린다고 해도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진 말고. 그나저나 진짜 안 들어 봤어? 데이빗 박?

“안 들어 봤어. 우리 쪽 사람이야?”

-흠, 하청인데.

“하청?”

독립 요원을 지칭하는 단어다. 동명이인이 아니다.

-그래. 혹시 알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있을 수도. 난 독립 애들이랑 일 많이 하니까.”

곽용신이 미끼를 조금 더 던졌다.

-어디까지 이야기 해 줘야 되는 건지 모르겠네.

입질이 들어왔다. 낚시찌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야, 씨발 안 하려면 마. 바빠 죽겠는데.”

이럴 때 낚싯대를 확 들어 올리면 물고기는 빠르게 도망간다. 그러니 ‘이 미끼는 안전해요’ 모드로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욕을 하고 지랄이야. 알았어, 알았어. 혹시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본사 일이야?”

-본사 일이지.

“본사면 정식으로 공문 넣어.”

곽용신이 말했다.

-그게, 좀 애매해서.

거짓말이군. 곽용신은 확신했다.

“본사 일 아니면 돈 드는 거 알지?”

-야, 우리 사이에 돈은 무슨.

“얼마까지?”

-……됐다, 그만둬. 씨발 놈.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곽용신은 여전히 전화기를 귀에 대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누군가 그를 찾고 있다. 정보를 원하고 있다.

본사일까?

본사라면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본사에 사람이 껴 있기는 하겠지만 본사의 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주 높다.

곽용신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다시 손으로 움직여 블록 깨기 게임을 실행시켰다.

그의 손은 액정에서 공이 튀어오를 방향을 조정했지만, 그의 뇌는 다른 연산을 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문정규 그놈이 데이빗 박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면, 다시 연락이 올 것이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문정규다.

곽용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

츠네타카는 호텔 로비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애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에 도착했다고 연락하고 몇 분 되지 않아 애블린과 그녀의 남편이자 츠네타카가 새로 사귄 친구인 브랜든 허드슨의 모습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항상 고생이 많으시네요.”

애블린이 츠네타카에게 미소를 건네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푹 쉬셨는지요.”

츠네타카가 애블린에게 인사한 후,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서 브랜든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일 양조장 견학 일정. 확인해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 줘.”

“아, 고마워.”

브랜든은 서류 봉투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브랜든이 말했다.

“다녀올게요.”

애블린이 브랜든을 보며 말했다. 그런 애블린에게 브랜든은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배웅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두 남녀는 호텔 밖을 나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탑승했고, 호텔에 남은 브랜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그렇게 세 사람이 사라진 후,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중년 남자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던 신문을 차곡차곡 두 번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커피 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별일 없군.”

한규호와 트레이시를 지원하기 위해 홍콩에서 차출되어 온 중국계 CIA 요원은 역시 어딘가에서 차출되어 온 여자에게 말했다.

3일 전에 노인의 모습으로 분장했던 남자는 오늘은 장년 남자의 모습으로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남자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들어 올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별일 없나요?”

천천히 커피를 음미한 여자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가 있나?”

남자가 물었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이 여자는 3일 전에는 갓 대학에 들어간 풋풋한 대학 신입생 같은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부잣집 영애(令愛) 같은 차림이었다.

“여자 쪽이 기분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알지?”

“키스할 때 여자의 마음이 드러나죠. 마음이 따라가는 키스인지, 단지 입술만 내어 준 것인지.”

“어색했나?”

남자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음…… 어색하다기보다는, 어젯밤 싸웠으려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고해야 할까?”

남자가 물었다.

“보고하기는 좀 애매한데.”

여자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를 할 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아마도 싸운 것 같다. 여자만 느낄 수 있는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 그렇단다.

그런 내용을 어떻게 보고 한단 말인가.

“그럼 그냥 평소와 같은 것으로?”

“그쪽이 알아서 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같이 고민하자고. 나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쪽 부하도 아닌…….”

남자는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여자가 눈에 떠오른 놀라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말을 흐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어 있는 옆자리 의자가 천천히 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의자를 잡고 있는 손을 향했다. 그리고 팔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선이 상대방의 얼굴에 도달하기 이전에, 의자를 뺀 사람이 먼저 앉아 버렸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좋은 아침입니다. 합석 좀 해도 될까요? 호텔에 혼자 있으니 심심해서 말이죠.”

남자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며 씩 웃는 사람을 보았다.

조금 전 아내를 배웅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던 브랜든 허드슨이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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