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28) >
한규호는 자신에게 붙여 줄 여자와 잘 것인지 묻는 트레이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담겨 있는 감정을 느꼈다.
꼭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불만’이라고 정의될 감정이 억지로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 뒤에 숨어 있었다.
한규호는 그 얼굴에서 완을 떠올렸다.
오토바이를 훔쳐 깔로로 가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삐쳐 있는 사춘기 여중생 같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달빛 하나 없는 그 시골길에서, 그녀는 한규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감정을 얼굴 가득 드러냈었다.
한규호는 그날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습군.
한규호는 완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독립 요원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여자를 만났고, 잠을 잤다.
대부분이 필요에 의한 만남이었고, 목적을 가진 정사였다.
백금산의 그날 이후로, 사랑이라는 그런 감정을 가진 채로 누군가와 자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왔다. 한규호는 필요에 의해 몸을 섞었고, 사랑을 위장했다.
그 수많은 여자 중에서 어떠한 여자도 그의 기억 속에 잔상으로 남지 않았다.
완과 보냈던 그 밤도 다르지 않았다.
완은 의도를 가지고 그를 유혹했고,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그날 몸을 섞었다.
사랑이나 육욕 같은 감정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한규호는 그 잔상을, 잔상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선명한 그 얼굴을 떠올리면서,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한규호가 답했다.
“필요할까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필요한지를 누가 결정하지?”
한규호가 되물었다.
트레이시는 이제 완전히 웃음을 지운 얼굴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요한지 당신이 결정하나?”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트레이시가 답했다.
“그런데?”
한규호가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선생님, 아무쪼록 현명한 판단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 걱정이 많으십니다.”
활동우익(活動右翼) 단체 타이코우카이(大行会) 마에하라 키이지(前原希一)는 정중한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지, 지금 그 말은?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중요한 시기이니까요.”
마에하라는 여전히 정중한 말투로 답했다.
-말한 그대로다?
“그렇습니다.”
-그냥 조용히 움츠리고 있어라. 괜히 말썽부리지 말고. 나는 그렇게 들렸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묻어 있는 분노가 더욱 강해졌다.
“오해이십니다, 시마다 선생님.”
마에하라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시마다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다.
내일모레 에블린 길먼의 남편은 1박 2일 일정으로 아키타로 떠날 것이다. 즉 애블린 길먼은 도쿄에 혼자 남게 된다는 이야기다.
코시자와 회장은 시마다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것이 코시자와 회장의 생각이었고, 마에하라도 그런 회장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나 변수가 있었다. 시마다가 독자적인 세력을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그 미친개가 혹시라도 미쳐 날뛰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사와베 국장이 지적했다.
거대한 선박이 침몰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구멍 하나였다.
그리고 시마다는 배가 침몰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에 구멍을 뚫고도 남을 멍청이였다.
그래서 마에하라에게 당조짐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어려울 것이 없었다.
시마다는 애블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줄 것을 원했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처럼 앞으로 며칠간 진행될 예정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물론 시마다에게 전부 다 이야기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편이 양조장 견학을 갈 것이고, 그사이에 애블린이 혼자 남게 된다는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에하라는 시마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줌으로써, 나라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는 동지에게 정보를 공유했다는 명분을 주고, 한편으로는 코시자와 회장의 이름을 이야기함으로써 그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오해라…… 마에하라 군.
“네, 선생님.”
-자네는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군.
“오해이십니다, 선생님.”
마에하라는 시마다가 어쩌면 생각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한 놈.
시마다의 나직한 욕설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마에하라는 잠시 동안 끊어진 전화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시마다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천한 놈이라.
***
“천한 놈.”
시마다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차 바닥에 있는 힘껏 던져 버렸다.
푹신한 차 바닥은 시마다가 던진 전화기를 품지 못하고 튕겨 내 버렸다. 그렇게 튕겨진 전화기가 몇 번 회전한 다음 시마다의 발치에 떨어져내렸다.
시마다는 구둣발로 그 전화기를 박살 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고작 야쿠자 주제에 자신에게 명령하듯 말을 한 마에하라의 얼굴을 대신해 전화기라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중의원이다.
시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의원인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가한 마에하라는 일본 국민에게 모욕을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 시마다의 생각이었다.
시마다는 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인내심을 발휘해 전화기를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그 천한 놈에게 합당한 형벌을 줘야 한다. 그리고 형벌을 주기 위해서는 전화기가 필요했다.
중의원 시마다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힘을 쓴다면 고작 야쿠자에 불과한 마에하라의 목을 잘라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찰을 동원해 마에하라를 말려 죽이는 것이다.
폭력단대처법 발효 이후, 경찰은 폭력단과의 투쟁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위에 올라섰다.
마에하라의 타이코우카이가 정치단체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근본이 야쿠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경찰청 장관을 압박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경찰청 장관쯤 되면 아무리 중의원인 시마다라고 해도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다.
국가공안위원회를 통해 압박을 넣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시마다에게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간다.
경시총감이나 경시감을 불러서 조인트를 까는 정도가 적당하다.
경시총감이란 직위는 웬만한 야쿠자 조직 한두 개는 날려 버릴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 정도면 시마다에게도 부담이 없다.
시마다는 발치에 떨어진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열어 경시총감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만한 인물의 이름을 찾았다.
시마다는 손가락을 통화 버튼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누르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개에게 경찰로 상대하는 것은 너무 점잖은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그의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개에게는 개를 때리는 몽둥이가 제격이다. 사람 때리는 몽둥이는 격에 맞지 않다.
만약 경찰이 마에하라의 조직을 때려잡는다면?
시원하지가 않다.
시마다는 자신의 구둣발을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광택이 살아 있는 구두 굽으로 그의 입을 짓이기고 싶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그 입에 구두 굽을 박아 넣고 싶었다.
경찰은 적합하지 않다.
시마다는 다시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찾아냈다.
그가 준비한 세력, 니시야마구치구미(西山口組).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가 내부 투쟁을 통해 고베야마구치구미로 분열되고, 다시 거기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분파가 니시야마구치구미였다.
고베야마구치구미를 지배하는 기존 세력에 불만을 품은 젊은 야쿠자들이 독립해 만들어진 신생 조직은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뒷배가 될 권력이 필요했고, 시마다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코시자와가 타이코우카이를 가지고 있듯, 시마다도 독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무력을 원하고 있었다.
마에하라의 타이코우카이(大行会)는 성장하고 싶어 하는 니시야마구치구미에게 좋은 먹이가 될 것이다.
개에게는 개로 상대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시마다는 마음을 정했다.
경찰 카드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우선 개들 끼리 싸움을 붙인다. 니시야마구치구미가 손을 잡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테스트도 할 겸.
좋은 기회이다.
시마다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시마다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마에하라의 주인, 코시자와 회장이 마음에 걸렸다.
개를 때리기 전에 개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코시자와 카네모토(越沢兼友).
코시자와 중공업의 회장이라는 그의 직함은 위험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정계가 재계보다 우위에 있는 일본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재벌그룹 회장보다 중의원의 사회적 위치가 더 높다.
문제는 그가 단순한 재벌 그룹의 회장이라는 것이 아니다.//회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시자와 중공업의 모체인 코시자와 그룹은 메이지 시대에 스미토모, 미쓰이 등과 더불어 지금의 일본의 근간을 만든 초창기 기업이고, 전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GHQ에 의해 분류된 15대 재벌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으며, 버블 붕괴에도 무너지지 않고 6대 기업집단으로 살아남은 전통 있는 명가였다.
그리고 코시자와 가문을 이끄는 코시자와 카네모토는 코시자와가문의 당주일 뿐만 아니라,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인 ‘일본을지키는국민회(日本を守る国民会)’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그 위세가 적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그의 배경이 시마다의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지 못하도록 주저하게 하고 있었다.
***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트레이시였다.
“유혹하려 하겠죠,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트레이시가 겨우 입을 뗐다.
이 대화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공적인 대화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면서.
“어떤 목적이 있을까?”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일본은 당신의 가치를 모르고 있어요, 단순히 에이전트인 애블린 길먼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여자를 붙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나를 흔들겠다는 것.”
한규호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나 말없이 트레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거기서 잘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 권한 밖이에요. 물론 당신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겠죠. 단순히 육욕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만약 당신이 그 여자와 잔다면 그럴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함정일 가능성이 있어요.”
“함정?”
“단순히 당신의 외도 사실을 나에게 알려 나를 흔들려는 데서 끝난다면 그렇게 문제 될 일은 없어요. 물론 그 상황을 연기해야 되겠지만.”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며칠 동안 자신에게 손 하나 대지 않은 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단순히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몰래카메라로 촬영하거나 녹음을 해서 협박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고, 어쩌면 성폭행을 당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철수해야만 해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촬은 걱정 없다.
아무리 미세하게 숨겨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지켜보는 렌즈가 있다면 그의 감각에 걸릴 것이니까.
“그럼 잠을 자지 마라?”
한규호가 물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당신의 판단과 행동을 강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나를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고, 당신이 실수를 하게 되면 내 커리어가 끝난다는 것을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트레이시는 자신의 맥주 캔을 들어, 남은 맥주를 전부 다 마셔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규호는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네요. 충분히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을 알고 있어요.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를 해서. 피곤하네요, 먼저 실례해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일본에 온 이후 처음으로 트레이시가 먼저 그에게 등을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 MISSION 04 : 츠바키 (2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