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96화 (197/386)

< MISSION 04 : 츠바키 (24) >

첫 번째 회의 이후로 며칠 동안 트레이시와 한규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며칠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에게 보여지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트레이시는 츠네타카가 준비한 차를 타고 코시자와중공업에 가서 의미 없는 회의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협상은 전선을 형성한 채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어느 쪽도 먼저 발포하지 않고, 그저 참호 속에 숨어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트레이시가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시간 동안 한규호는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거나, 풀 사이드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아니면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거나 낮잠을 잤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한규호는 풀 사이드에서 맥주 한 병을 시켜 놓고, 위르겐 하버마스가 쓴 담론윤리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3분의 1쯤 읽었을 때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재미있나요, 그 책?”

한규호는 시선을 돌렸다.

비키니를 입은 한 백인 여자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한규호에게 느낌이 찾아왔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렌즈가 그를 향하고 있다고, 그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

-여자가 접근했습니다.

롯폰기의 한 건물에 설치된 CIA 임시 상황실에서 당직 근무를 하고 있던 윌 로렌드의 이어셋에 상황요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진 들어옵니다.

비키니 차림의 여자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윌 로랜드의 요원전용 노트북에 전송되었다.

금발의 백인 여자.

모델 같은 완벽한 몸매는 아니지만, 일반인 치고는 훌륭한 몸매를 두 개의 천 쪼가리가 가리고 있었다.

특히 가슴의 크기가 천 쪼가리로 가리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는데, 윌 로랜드는 가슴 성형을 받았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몇 장의 사진이 계속 전송되었다. 여자의 얼굴을 최대한 여러 각도로 담은 사진이었다.

윌 로랜드는 재빨리 내부 프로그램을 가동해 그녀의 사진을 CIA로 보냈다. CIA가 보유한 안면 인식 프로그램이 사진을 식별하고, 그녀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찾아봐.”

윌 로랜드는 상황실 한쪽에 앉아 있는 해킹 전담 요원에게 지시했다.

그의 지시를 받자마자, 해킹 전담 요원은 즉시 하얏트 내부망에 대한 해킹을 개시작했다. 그녀가 하얏트에 묶고 있다면, 그가 찾아낼 것이다.

지시를 마친 윌 로랜드는 다시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남부 출신 금발 미녀의 모습이었다.

나이는 조금 먹은 것 같지만,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면 그 기저에는 트레이시와 비슷한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윌 로랜드는 재빨리 손가락을 키보드로 가져갔다. 지정된 시간에 보내는 정규 보고서가 아니라, 상황이 발생하면 보내는 긴급 보고서였다.

[신원 불명의 여자가 목표 M에게 접근.]

짧은 문장 하나가 실시간으로 랭리로 전송되었다.

***

한규호가 누워 있는 선베드의 맞은편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여자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옆에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메신저를 실행시키고 짧은 단문 메시지를 보냈다.

-우왓, 어떤 여자가 말 걸고 있어.

만약 주변에서 누군가 보았다면, 그저 친구에게 라인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제 그 남자? 수영장에 본?

-응. 저 여자도 어제 본 여자긴 한데.

-이뻐?

-이쁘네. 짜증 나. 어제는 그냥 보기만 하더니 오늘은 말까지 거네.

-사진 보내 봐 봐. 궁금하다.

-위험한데. 잠깐만.

거기까지 메시지를 보낸 여자는 이런저런 어플을 실행하는 척하면서 무음 카메라 어플을 활용해 풀 건너편에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보디라인 장난 아닌데? 어제도 있었다고?

-응. 어제도 봤으니까, 아마 이 호텔에 묵고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재미있다. 둘이 뭐 하는 거 아냐?

-재미있기는. 나는 속 터져 죽겠구먼.

-계속 상황 중계 부탁합니다!

-싫어!

여자는 거기까지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보고는 끝났다.

일본내각정보조사실 소속 미츠오카(三岡) 요원은 라인 메신저와 거의 동일한 레이아웃으로 위장한 내부 보고 프로그램을 활용해 신원 미상의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했음을 보고했다.

그녀는 남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이 그 남자를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명령에 따라 이 호텔에 투숙한 그녀는 남자가 수영장에 오는 시간에 맞춰 선베드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척을 하면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2일째인 오늘, 그녀의 감시망에 정체불명의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포착했고, 보고한 것이다.

그녀의 첫 번째 임무는 끝이 났다.

이제 풀 너머의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본부로 돌아가 보고하면 그녀의 최종 임무가 끝이 난다.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선글라스 아래 감쳐져 있는 눈동자에 힘을 주어, 풀 건너편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한규호는 자신에게 말을 건 여자를 바라보았다.

약간 깊게 파인 감이 있는 비키니, 잘록한 몸매, 그리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한규호가 책 표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책 표지를 보고는 가볍게 인상을 쓰면서 한규호 옆 선베드의 그녀의 육감적인 엉덩이를 내려 놓았다.

“어제도 무슨 책을 보고 있었는데, 오늘은 더 재미없는 책을 보는 것 같네요.”

여자가 어제부터 그를 보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어제 우리가 인사를 했나요?”

한규호가 물었다.

물론 한규호는 어제 그녀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고, 그녀가 풀 사이드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가끔 그에게 곁눈질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요. 하지만 어제 당신이 여기에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반가워요, 스테파니에요.”

“브랜든 허드슨입니다.”

한규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지루하지 않나요, 브랜든?”

스테파니라는 여자가 허락도 없이 한규호를 이름으로 불렀다.

“흥미진진한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미스…….”

“크로프트에요. 하지만 스테파니라고 불러줘요.”

“알겠습니다, 미스 크로프트.”

한규호의 말에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는 선 베드에 몸을 눕혔다. 두 개의 커다란 가슴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거렸다.

“꼭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미시즈로 불러 줘요.”

“알겠습니다. 미시즈 크로프트.”

한규호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당신은 여기 왜 왔나요? 휴가? 아니면 일?”

“꼭 따지면 휴가입니다. 아내가 출장 오는 길에 따라왔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확 번졌다.

“저도요! 저도 남편 출장에 따라왔는데, 이렇게 지루할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것을 그랬어요.”

한규호는 그녀가 동질감을 느꼈고 그 동질감이 반가움으로 표출되었음을 알았다. 그녀의 감정에서 어떠한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은 그저 일밖에 모르고, 신용카드나 쥐여 주면 자신이 할 일은 다 하는 줄 알고 있다니까요. 여자는 그런 단순한 생물이 아닌데 말이죠.”

한규호는 자신에게 접근한 여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었다.

그러나 그녀가 건넨 말 몇 마디에서, 그저 지루해 대화 상대를 찾는 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에 한규호의 정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수영장 맞은편에 누워서 그들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한 동양인 여자가 오히려 더 수상쩍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 한규호를 힐긋힐긋 바라보던 건너편 여자는 백인 여자가 접근하자 휴대전화를 들고 어떤 행동을 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한규호는 그녀가 어딘가로 보고를 하려 했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타이밍에 휴대전화를 잡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그에게 고정하는 모습이나, 손가락 두 개로 줌을 땡기는 제스처를 하는 의심스러운 징후가 그의 의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규호의 감각은 피할 수 없었다.

다른 렌즈도 있었다,

멍청하게 풀 건너편에서 아닌 척 사진을 찍어 대는 여자의 휴대전화와는 별개로, 멀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또 다른 렌즈도 그의 감각에 걸렸다.

이 렌즈는 의미가 있었다.

첫날과 둘째 날, 한규호를 향한 헨즈는 단순히 한규호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트레이시와 같이 있을 때 포착되었고, 논리적으로 한규호 보다는 트레이시를 목표로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에게 포착된 렌즈는 100% 그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 말은 누군가가 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아무런 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브랜든 허드슨을 연기했는데, 그럼에도 렌즈가 따라다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남편 욕을 시작으로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규호는 덮은 책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당장 그녀를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도록.

***

-확인되었습니다. 정보 들어갑니다.

윌 로랜드의 이어셋에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바로 이어 그의 노트북에 여자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테파니 크로포트. 결혼 전 성은 무어.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치어리더 팀 주장을 했고, 마을의 아이돌로 컸다.

배우의 꿈을 안고 미국 서부로 이동했고, 할리우드를 찾는 수많은 남부 출신 금발 미녀들처럼 그녀는 단역을 전전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금발의 단역 미녀들처럼 웨이트리스로 생계를 연명하다 고급 창부로 변모했고, 운 좋게 뚜쟁이의 눈에 들어 어설픈 신분 세탁을 거쳐 실리콘밸리의 흔하디흔한 벤처기업 대표와 결혼을 하면서 크로프트라는 성을 얻게 되었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 경제적 능력이 뛰어난 중년 남자와 결혼한 젊은 여성)로군.

윌 로랜드는 그렇게 평가했다.

몇 건의 자잘한 경범죄 전과가 있었고 그중 한 건은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머그 샷(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이름과 수감 번호 등 개인 정보가 적혀 있는 판을 들고 찍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물론 만들어진 위장 신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신분이 위장 신분이라면 랭리에서 밝혀낼 것이다.

윌 로랜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목표 M에게 접근한 여자는 주요 관심 대상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감에 의하면 그녀는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라고 분류되었다.

랭리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할까? 랭리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여자를 대하는 목표 M의 태도가 아닐까?

윌 로랜드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목표의 모든 표정과 행동을 전부 기록해 두도록.”

윌 로랜드는 그렇게 지시했다.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랭리가 더 관심 있어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

한규호는 그녀와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일부러 곁눈질로 슬쩍슬쩍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면서, 특히 비키니 사이로 삐져나올 것 같은 그녀의 가슴을 주로 보면서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자는 이야기하고 싶어 했고, 한규호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면서 그저 웃어 주면 될 뿐이었다.

그 30분 동안 한규호는 평소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꼈다.

만약 이 여자가 누군가에 의해서 목적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했다면, 그 누군가는 여자를 잘못 골랐다.

이렇게 멍청한 여자를 보냈을 리가 없다.

만약 그녀가 실제로는 멍청하지 않은데 멍청한 척을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연기가 한규호의 날카로운 감각을 피해 낼 정도라면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또 다른 기프티드라고 생각될 정도이니까.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프티드가 그렇게 널리고 널렸을 리가 없다. 설사 그녀가 기프티드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규호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해야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30분 정도 보여 주었으면 그를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 있어 한다는 것을. 아내 이외에 여자에게도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아쉽지만 오늘은 시간이 좀 그렇군요. 괜찮다면 내일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스테파니.”

한규호는 그녀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작게 속삭였다.

여자의 얼굴에서 복잡한 감정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감시자들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내일 또?”

“내일, 여유 있게. 그리고 조금 덜 개방된 장소에서.”

그렇게 말한 한규호는 그녀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기대되네요.”

그녀가 같이 미소 지어 주며 말했다.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의 뜨거운 하룻밤, 아니 낮 시간 동안의 은밀한 시간이 되겠지만, 지루함에 젖어 있는 그녀의 몸을 충분히 덥힐 자극적인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럼, 내일.”

한규호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맞잡은 그녀의 손바닥을 검지로 살짝 자극해 여지를 남겼다.

여자는 반응을 보였고, 감시자들은 그 반응을 기록할 것이다.

한규호는 책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면서.

< MISSION 04 : 츠바키 (2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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