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22) >
도쿄 외곽의 한 별장.
코시자와 재단이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 별장의 한 공간에는 늦은 밤임에도 양복을 입은 세 남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코시자와중공업의 코시자와 카네모토 회장은 전 방위성 사무차관 출신의 시게노 이오 상무로부터 오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츠네타카 군이 준비한 바에서 마지막으로 세 사람은 해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호텔로 들어가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시게노 상무의 보고가 끝나자 코시자와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시자와 회장 앞에는 두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MD시스템즈에서 온 에이전트와 진행했던 회의의 녹취록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츠네타카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세 사람이 이야기한 대화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츠네타카의 커프스단추에는 도청기가 심어져 있었고, 그 도청기를 통해 입수된 대화는 주변에 있던 전담 팀이 실시간으로 속기했다.
그 결과물이 코시자와 회장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코시자와 재단 산하의 연구실에서는 각각 녹음된 음성 파일을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 어투, 습관, 거기에 담긴 감정 등이 분석되고 있었다.
코시자와 회장과 시게노 상무 그리고 일본 방위성 사와베 노리히데 국장은 오늘 그들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를 전부 파악하고 있었고, 내일 아침이면 대화와 행동의 기저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받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보지. 우선 자네부터.”
코시자와 회장의 지목을 받은 시게노 상무는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회의에서 그녀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각각의 조문과 관련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당초 예상과는 달리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는 조문에 대해서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습니다. 더불어 저희가 준비한 질문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답변에 본사의 인가가 필요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코시자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녀가 가진 권한이 생각보다 적다는 가설입니다. MD시스템즈에서 제임스 붐의 죽음에 당황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 별 권한 없는 직원을 보내 지연작전을 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입니다.”
“젋은 여자이기에 더욱 말이 되는군요.”
옆에 앉은 사와베 국장이 말을 거들었다.
시게노 상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그녀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가설입니다. 어제 행보를 봤을 때, 그녀는 무언가 문제점을 파악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본사와 연락을 했을 테고, 어떤 지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지침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오늘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
코시자와 회장이 말했다.
“오늘 올라온 1차 보고서와 부합하는 모습입니다. 하루 종일 호텔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셨습니다. 츠네타카 군이 마련한 자리에서도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사와베 국장에게로 향했다.
“아직 정보를 취합 중입니다만, 지금까지는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사와베 국장도 그렇게 말을 마쳤다.
“지켜보도록 하지.”
코시자와 회장의 말을 끝으로,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끝이 났다.
만약 지난번 모임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면 여기에서 회의가 마무리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세 사람만 모인 자리에서는 논의할 주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고 있나?”
코시자와 회장이 물었다.
“현재 접촉 중입니다만 진행은 더딘 상황입니다.”
사와베 국장이 말했다.
“요구 조건은 변함이 없고?”
“네. 10억 엔, 지유가오카(自由が丘)에 주거지, 그리고 안전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코시자와 회장은 손을 가져가 턱 밑을 쓸었다.
까실까실한 감촉이 그의 손에서 느껴졌다.
“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
시게노 상무가 물었다.
“1급 출신입니다. 수장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자리 중 하나입니다. 최고 기밀 등급까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정보는 다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지. 그 정보가 과연 우리에게 가치가 있느냐 하는 부분이지. 더군다나 평생을 몸 바친 조국을 그렇게 쉽게 등지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부분도 그렇고.”
시게노 상무가 우려스러운 말투로 지적했다.
“배신할 수 있다면 조국이 아니지.”
그 말을 코시자와 회장이 받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코시자와 회장을 향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돈이 조국이고, 권력과 명예가 충성을 바칠 조국이겠지. 돈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조국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지금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이고, 인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쇼. 그 미친놈들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곽용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청무역의 김형원 사장은 살짝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었다.
곽용신도 자신의 소주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한 후 계속 이어서 말했다.
“도착해서 짐 풀고 사무실 갔더니 웬 놈이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누군가 해서 물어보니 IBI 놈이래요.”
“IBI(Intelligence Bureau of Inda, 인도국내정보부)?”
“네.”
“그놈들이 왜?”
“왜겠습니까? 뻔할 뻔이죠. 새로웠으니 신고하라 이거죠. 돈 달라, 없으면 선물이라도 달라 이거죠. IBI 그놈들뿐만 아니고, 무슨 순번이라도 정해 놓은 것처럼 CBI(중앙수사국), NIA(국가수사청), CEIB(중앙경제정보부) 할 것 없이 매일 오는데, 진짜.”
김형원 사장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갔다.
인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 10년 안에 중국을 추월할지도 모르는 인구력을 가진 나라, 핵을 포함한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나라이며, 1인당 GDP가 2천 달러도 안 되는 이상한 나라.
아무것도 안 되는 나라, 한편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가 바로 어메이징 인디아였다.
“코트라에 위장 파견된 회색(위장 요원이지만 상대국에 정보가 공유된 요원)에게도 그 지랄인데, 만약 그냥 지사 직원으로 갔다고 하면……. 아으, 끔찍해. 그런 말씀 하지도 마십쇼.”
곽용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김형원 사장은 웃으며 곽용신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퇴근하는 곽용신에게 소주나 한잔하자며 김형원 사장이 즐겨 찾는 모란역 번화가 인근 포장마차로 데려왔다.
그리고 얼마전 들었던 인도 이야기의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고, 그가 일을 잘 처리한 것 같아서 인도에 사무실을 하나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곽용신이 차라리 사표를 쓰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네.”
김형원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었다.
“아,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인력 충원, 그거 어떻게 해 주시는 겁니까?”
곽용신도 잔을 들며 말했다.
“꼭 필요한가?”
김형원 사장이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려는 중소기업 사장의 표정으로 말했다.
“아, 진짜. 제가 몇 번 말씀드렸는데. 아니, 꼭 본사 직원 아니더라도, 그냥 물류 전공한 어린애라도 하나 좀 뽑아 주세요. 진짜 이러다 과로사 하겠습니다.”
김형원 사장은 곽용신의 투정에 살짝 웃었다.
그에게 남아시아 팀장의 자리를 맡긴 것은 태청무역에게 있어서 신의 한 수였다.
그가 오고 나서 그동안 태청무역은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있던 인도 쪽 물량이 조금씩 증가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직위만 부장이고, 직함만 팀장이지, 뭐 팀원도 없고, 부려 먹을 쫄따구도 없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무대 올라 춤도 추고, 내려가서 박수까지 혼자 치고 있는 모양새 아닙니까. 아니, 그렇다고 뭐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출장 한번 나가려고 해도 자리를 비울 수가 있어야 출장을 나가죠. 이러다 본사에서 임무 떨어지면.”
“본사에서 임무 안 줄 거야. 여기 있는 동안은.”
“아니,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로.”
곽용신은 작정한 듯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솔직히 아무리 승진 기대 안 한다고 해도 저도 사람인데, 이렇게 산동네 하꼬방에서 엄한 일만 하고 있는데 솔직히 겁납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 클 때까지는 회사 다녀야 하는데, 대학 보내려면 돈이 얼만데, 그전에 끈 떨어지고, 평생 4급이고. 뭐 좋은데, 요즘은 조금씩 불안해진다 이 말입니다. 이러다가 진짜 그냥 날아가는 거 아닌지.”
국정원도 다른 공무원 쳬계와 같이 계급 정년이라는 것이 있었다. 급수별 할당된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언제까지나 4급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옷 벗게 될지 몰랐다.
“진짜 이러다가 어디 한직이라도 좌천이라도 되면……. 아니, 잠깐, 저 지금 이미 좌천된 것 아닌가요? 저 옷 벗으라고 여기로 보내진 것 아닙니까?”
곽용신의 등줄기에 전류가 파팟 흘렀다.
한국에 남는다는 사실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왕복 4시간 거리에 발령을 냈다는 것은 알아서 나가라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이제야 불현듯 들었다.
“혹시, 저기……. 그, 이미, 그 뭐랄까. 이미, 나가라고…… 그런 의미로 절 여기로…….”
곽용신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김형원 사장에게 물었다.
그런 곽용신을 김형원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3급이야.”
“네?”
“곽 부장 3급 달았다고, 이미.”
“네? 제가요?”
“그래.”
“언제요?”
“여기 오면서.”
“전 이야기 들은 거 없는데요.”
“내가 말 안 했으니까.”
“왜요?”
“뭐 그게 중요한가?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중요하…….”
“중요하죠!”
곽용신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의식하고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곽용신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그 3급 된 겁니까? 정식 발령 난 겁니까?”
“거참, 사람이 말야.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고.”
“아니, 뭐. 그 뭐냐, 아무래도 그 종이 쪼가리를 봐야 안심이 되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제가 승진한 건데 왜 제가 모르고 있는 거 좀 이상하잖아요.”
김형원은 곽용신의 말에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종이 쪼가리 사장실에 있으니까, 내일 보여 주도록 하지. 그리고 사람도 하나 뽑아 줄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조금만 참아라. 금방 뽑아 주겠다.
곽용신은 김형원 사장의 말이 중소기업 사장의 전형적인 멘트가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승진했다는 말에,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거 한 과장 관련된 겁니까?”
곽용신이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도 숨길 겸, 주제도 바꿀 겸, 궁금한 것도 물을 겸 입을 열었다.
“그거라니?”
“왜 일본어 할 줄 아냐고 물으셨잖습니까.”
“아, 그거.”
“한 과장, 일본 가 있습니까?”
곽용신이 김형원 사장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표면적으로 대화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장과 부장이 만나 술을 마시면서 과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김형원은 대답 없이 곽용신을 보았다.
그는 아직 정보위원회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정보위원회.
노출되어 버린 국가정보원의 해외 조직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그리고 한규호는 단순히 정보위원회와 관련이 있는 독립요원이 아니었다.
즉 한규호의 거취는 곽용신이 알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알 수도 없었고, 알아서도 안 되었다. 곽용신은 아직 정보위원회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김형원은 사실을 말했다.
곽용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지금 정보위원회 입회 심사를 받고 있었다. 창립 멤버 다섯 명뿐인 정보위원회에 두 번째 기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말은 그가 나중에 정보위원회의 수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국정원의 원장도.
그리고 또 다른 판단도 있었다. 그를 데리고 있으면서 믿어도 된다고 김형원은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는 사실을 말했다.
“바쁘네, 그 냥반. 나도 하청이나 할까. 회사도 안 나오는데 월급은 따박따박 들어오지, 해외 나가면 돈도 많이 벌지. 오히려 하청이 원청보다 더 좋은 것 같아.”
곽용신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할 텐가?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데.”
“에이, 그건 안 되죠. 애들이 있는데.”
잘린다는 이야기는 퇴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업계에서 잘린다는 것은 목숨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형원은 잔에 살짝 남아 있는 소주를 마저 들이켠 후 말했다.
“일본에 가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다음 주. 한 과장 건은 아니고, 다른 건으로.”
“다른 건이라시면?”
“경인.”
곽용신의 얼굴에 분노가 살짝 맺혔다.
“아무튼, 당분간 새 업무 하지 말고, 혹시 모르니 준비하고 있어.”
김형원이 다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곽용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잔을 들고 가볍게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곽용신은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국경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반도를 침입한 왜군들에게 도움을 준 순왜(順倭)의 대표적인 인물.
그리고 그의 이름인 경인은 일본과 관련된 내부 배신자를 지칭하는 국정원 코드였다.
< MISSION 04 : 츠바키 (2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