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91화 (192/386)

< SSION 04 : 츠바키 (19) >

다음 날, 트레이시는 아침에 그녀를 마중 나온 츠네타카의 차를 타고 코시자와중공업 본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실무진들과 만난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조언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상황을 관망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저 서류를 검토하고, 서류상의 각 항목을 확인하고, 그 의도를 묻고, 그들이 물어오는 질문에는 본사에서 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답으로 응대했다.

지루하게 시간을 끌면서 한규호의 말처럼 누군가가 움직임을 보여 주기만을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트레이시는 오후 5시가 되자 회의를 마무리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츠네타카와 함께 차를 탔다.

어제와는 달리 트레이시는 호텔로 돌아가는 마음이 편했다.

어제는 서류를 점검하다 알게 된 사실에 놀라, 빨리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어서 빨리 국장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뿐이었는데, 어제 한규호의 조언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한규호는 마음이 급한 자들이 어떠한 식으로든 먼저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 그 대상은 일본 쪽이 될 것이다.

그런 움직임을 기다리기로 결정한 트레이시는 오늘은 그저 회의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류를 살펴보고, 별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하루를 보냈다.

트레이시는 이렇게 작전이 마무리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처럼, 그저 서류를 미국에 들고 가서 이런 상황입니다 하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녀는 MD시스템즈의 에이전트도 아니었고, 스텔스 기술이 일본에 넘어간다고 해도, 그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이 자국산 스텔스 전투기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녀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무엇보다 결정권은 자신에게 없었다. 인준은 상원 의원들의 몫이었다.

어제 한규호의 말처럼, 어쩌면 CIA가 상원 의원들의 목줄을 잡아채기 위해 일부러 이런 판을 만들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국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였을 때에도 그런 감정 없는 얼굴을 가졌을 것 같은 밀러 국장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주 임무는 한규호라는 남자였다.

그 남자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 대상이었다. 국장은 자신을 이곳에 협상을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한규호를 포섭하라고 보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어젯밤은 나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함께 고민해 주고, 조언해 주고, 스테이크를 잘라 주고, 와인을 따라 주었다.

전날 밤, 아니 그전의 냉랭했던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확실히 둘 사이는 가까워졌다.

요원으로서 접근하고, 여자로 인식된다. 그를 공략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전술이다.

보통은 반대로 접근한다. 여자로 접근하고, 상대방의 호감을 얻어 내고, 나중에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번 패턴은 그 반대이다. 요원으로 접근하고, 상대방의 호감을 얻어 내고, 여자로서 인식된다. 그리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온다.

목적은 오직 그 하나뿐이니까.

***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시즈 길먼.”

트레이시의 옆자리에 앉은 츠네타카는 창밖을 바라보는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츠네타카도 고생 많으셨어요.”

트레이시는 츠네타카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츠네타카는 그 미소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이 여자를 공략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회의석상에 참석하지 않은 그에게 차량에 탑승하기 전 쪽지가 전달되었다.

같이 회의를 진행했던 이사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 소재를 넓혀 간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고, 내 정보를 내어 주며 서로의 공감대를 확장한다.

사람으로 만나서, 남자로 확장된다.

가장 기본적인 공략 패턴이었다. 츠네타카가 능숙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잘생겼고, 똑똑했고, 돈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여성에게 자신을 남자로 인식시키는 데 그렇게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업무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남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이 여자는 남편이 없을 때는 전적으로 업무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업무적인 얼굴로, 업무적인 대화를 했다. 지금 그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사를 주고받은 그녀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호텔까지는 대략 20여 분, 오고가고 도합 40 분 정도가 츠네타카에게 주어진 공략 시간이었다.

“미스터 허드슨은 언제가 시간이 괜찮으신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츠네타카는 우선 남편이라는 선택지를 골랐다. 사실 유일한 선택지였다.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배제하기로 했고,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 묻기에는 호감도가 아직 낮다.

“그이는 아무 때나 상관없다고 해요. 다만 적어도 하루 전에는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창밖을 보던 트레이시가 고개를 돌려 츠네타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 있었다.

츠네타카는 알 수 있었다. 저 미소는 표면적인 미소일 뿐이다. 그저 상대방에게 보여 주는 일종의 가면이다. 그도 자주 쓰는 가면이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양조장 몇 곳을 섭외했습니다만, 어디로 모셔야 미스터 허드슨에게 실례가 안 될지를 고민 중이라서, 조만간 확정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남편은 어디든 상관없을 거예요, 술만 있다면.”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호호 웃었다.

츠네타카는 트레이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가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 대한 애정에서 발현되었다고 느꼈다.

츠네타카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전환하는 것과, 이대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선택지 중에서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남편분과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어머, 그래 보이나요? 흐음, 맨날 투닥거리기만 하는데.”

“설마요. 두 분이 바라보시는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데요.”

“그이에게 말해 주고 싶네요. 그렇게 좀 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가 끊기는 타이밍이었다.

츠네타카와 트레이시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었다.

***

대화를 마무리한 트레이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규호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다.

왜 그의 태도가 변했는지, 계기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해야 그 분위기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는지, 오늘은 분위기를 어떻게 더 잘 이끌고 나갈 것인지, 그와 잘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자야 하는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두 분이 조금 부럽습니다.”

그런 그녀를 츠네타카가 방해했다.

살짝 짜증이 난 트레이시는 다시 미소라는 가면을 쓰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희가요?”

“네.”

트레이시는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진지함과 슬픔이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 표정을 여러 여자들에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꽤나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라고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시카고에 있을 때, 잠시 만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츠네타카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트레이시의 예상대로.

“시카고에 계셨어요?”

“Crescat scientia vita excolatur.”

“시카고 대학교를 다니셨군요.”

“네. 미시즈 길먼은 시카고 대학교를 가 보셨는지요?”

“아니요. 친구 중 한 명이 그곳으로 갔어요. 만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렇군요. 아무튼 그곳에서 한 친구를 만났었습니다. 미시즈 길먼을 보니 그 친구 생각이 나네요.”

“그분이 저와 닮았나요?”

“음, 뭐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뭐랄까.”

트레이시는 처음으로 츠네타카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 그는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로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말로 그녀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유지할지가 궁금했다.

“죄송합니다. 업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시길.”

츠네타카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옆얼굴에 펀치를 꽂아 넣고 싶었다.

어디서 이런 되도 않는 수작질이야. 어디 날 꼬시려고 준비한 말을 쏟아 내 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말씀해 주세요. 궁금하네요.”

“하하…… 이야기하려니 좀 부끄럽네요.”

트레이시는 츠네타카 쪽으로 몸을 조금 더 돌렸다. 그에게 이야기를 끌어내기 쉽도록. 작은 미끼를 던졌다.

“뭐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저는 어서 빨리 공부를 끝내려고 레이겐스타인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만났고, 그렇게 눈인사를 하다가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인인가요?”

“네. 그녀는 백인이었습니다. 미시즈 길먼과 공통점이라면 그뿐이겠네요.”

“애블린이라고 부르세요.”

트레이시가 미끼를 조금 더 던졌다.

“고마워요, 애블린.”

츠네타카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뭐, 그녀는 학부생이었는데, 그녀도 저처럼 최대한 빨리 학위를 받기 위해서 시간을 아껴 가며 공부하고 있었고, 그런 공통점 덕분에 대화가 통했고, 이야기하다 가까워졌고. 그랬습니다.”

“그랬군요.”

“모르겠습니다. 외로워서, 힘들어서 그랬는지. 하지만 당시에는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뭐, 결론적으로 우리는 결국 해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다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뭐, 그런 거죠. 저는 일본인이고, 그녀는 미국인이고. 애블린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일본에서 다른 국적의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해하기 좀 어려운데요. 사랑하면 결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트레이시의 말에 츠네타카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애블린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저는 100% 일본인은 아닙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제 어머니는 이란 분이시죠. 제 아버지가 이란에서 건설근로자로 파견 근무를 나가셔서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고, 그리고 제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결혼을 하시지 못하셨죠.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였으니까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렇게 반쪽짜리 일본인으로 태어났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왔고, 평생을 혼혈이라는 배척의 시선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일본은 그 어느 나라보다 폐쇄성이 강한 나라 중 하나니까요.”

“네…….”

“겁이 났습니다. 그녀와 결혼을 하고, 그래서 또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일본에서 또 저와 같은 고통을 겪게 되지 않을까. 혹시 미국에서라면? 미국에서 그 아이는 사랑 속에 클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츠네타카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결정구를 던지기 위해.

“뭐, 사실 두려웠던 것이죠. 이기적이었던 것이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두 분을 보니…….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애블린과 아시아계인 미스터 허드슨을 공항에서 처음 본 순간 그녀가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겁내지 않았다면. 이기적이지 않았다면.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트레이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무언가 흥미로는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할리퀸 로맨스 시리즈에서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뻔한 이야기였다.

만약 그녀가 이 남자 모르게 둘 사이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일본에서 성공한 남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면, 그런 이야기라면 어쩌면 출판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츠네타카의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였다.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슬픈 이야기네요. 한편으로 여자 입장에서는 조금 비겁한 이야기처럼 들려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닌데.”

“맞는 말씀입니다.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럽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결혼을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인지. 어쩌면,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네요. 죄송합니다, 미시즈 길먼.”

츠네타카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끼를 부리더군.

어젯밤 한규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끼를 부리는 잘생긴 남자를 보면서 한규호를 생각했다.

그리 잘생기지 않은 얼굴에 무심한 말투.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남자. 심지어 자신을 죽이겠다고까지 말한 한규호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어제 그의 태도가 변한 이유가, 그녀가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남에서 그에게 작전을 의뢰할 때,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제 도와 달라고, 같이 고민해 달라고 부탁할 때,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트레이시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츠네타카의 눈을 보면서 그런 가설을 떠올렸다.

“괜찮으시다면…….”

츠네타카가 다시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오늘 저녁을 제가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미스터 허드슨과 같이.”

츠네타카가 말했다.

< SSION 04 : 츠바키 (1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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