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16) >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트레이시는 아직 다 말리지 못한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면서 거실로 나왔다.
거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들은 한쪽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고, 대신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1kg은 넘을 것 같은 티본스테이크를 메인으로 몇 종류의 빵과 치즈, 샐러드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쪽에는 족히 20피스는 넘어갈 것 같은 초밥이 담긴 그릇과 선홍빛 참치회가 놓여 있었다.
“이 많은 양을 다 먹을 수 있나요?”
음식들을 본 트레이시의 첫 감상이었다.
“열심히 일했으면 보상이 필요한 법이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붉은빛이 감도는 참치회 한 점을 집어 간장을 살짝 바른 다음에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트레이시의 침샘이 활동을 시작했다. 식욕이 갑자기 몰려왔다.
트레이시는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젓가락을 집어, 그가 먹던 참치 대뱃살을 한 점 집어 들었다.
젓가락으로 간장을 살짝 바르고, 와사비를 아주 조금 올렸다.
간장이 붉은빛의 대뱃살에 윤기를 더했고, 녹색의 와사비가 포인트를 주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뱃살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서 잠시 대뱃살의 풍부한 풍미를 즐겼다.
아직 씹지도 않았는데, 지방질이 함유량이 높은 대뱃살은 마치 버터처럼 녹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먹을 줄 아는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규호가 말했다.
“일본에 오기 전에 배웠어요.”
“배웠다고?”
“네. 극동아시아 지부로 이동하는 요원들은 교육을 받는데, 음식에 관한 항목이 있어요. 특히 생선회에 대해 자세하게 배워요. 많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아직 날음식은 미국인들의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무섭구나, CIA.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 방에 들어가서 점심에 먹다 남긴 와인병을 들고 나왔다.
“회에 와인을 곁들여 먹자는 건가요?”
트레이시가 그가 들고 나오는 와인병을 보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니, 이건 스테이크용. 아무리 나라도 생선회에 와인은 자신 없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에 와인병과 와인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점심에 시킨 건가요? 좋은 와인인가요?”
트레이시가 3분의 2쯤 남아 있는 와인병과 라벨을 보면서 물었다.
“모르겠는데? 대충 가격 보고 시켜서.”
한규호가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얼만데요?”
“3만 엔.”
“좋은 와인이어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트레이시에게 한규호는 피식 웃어 주었다.
“뭐, 잘 모르겠더군. 3백 달러 값어치가 있는지는.”
“근데 왜 와인을 시켰어요?”
“당신이 그랬잖아.”
“뭐라고요?”
“취미라고는 술 마시는 것하고, 책 읽는 것밖에 없다고. 그러니 점심 먹을 때 한 병 정도 시켜 줘야 할 것 같아서.”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는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브랜든은 술 마시는 것하고 책 보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어요.
아침에 츠네타가와 차를 마시면서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그렇게 의미를 담은 말도 아니었다. 그저 남편을 가볍게 험담하는 의도로 즉석에서 만든 애드립이었다.
“그래서 와인을 주문했다고요?”
그런데 그는 그 말을 기억해 두고, 혼자 있는 상황에서도 브랜든 허드슨을 연기한 것이다.
“아니, 뭐. 겸사겸사.”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미디엄으로 구워 달라고 했는데, 잘 구웠는지 모르겟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칼끝을 우선 채끝등심 부위로 가져가 갈랐다.
구워진 갈변층과 육즙을 담은 분홍층의 속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등심은 제대로 구웠고.”
그렇게 말한 한규호는 칼을 안심 쪽으로 가져갔다.
트레이시는 그런 한규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잘 구웠군, 이 집 고기 잘 굽네.”
잘라 낸 안심 부위를 확인한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안심 부위도 등심 부위와 비슷한 굽기로 구워져 있었다.
티본스테이크를 구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T 자 모양의 뼈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붙어 있는 등심과 안심을 같은 굽기로 구워 내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온도의 열을 가하면 등심이 안심보다 훨씬 빨리 익는다.
그래서 등심은 미디엄, 안심은 미디엄레어로 나오거나, 안심이 미디엄이면 등심은 미디엄 웰던으로 나오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다른 두 부위를 같은 굽기로 구워 내기 위해서는 숙련된 조리사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랜트 하얏트의 조리사는 안심과 등심을 같은 굽기로, 동일한 갈변층과 분홍층으로 구워 낸 것이다.
“그냥, 한꺼번에 다 썰어 놓고 먹자고. 괜찮지?”
양 부위의 굽기를 모두 확인한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본격적으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내는 그를 바라보았다.
미국인들에게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양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트럭 운전사들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급하게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먹는 패스트푸드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쉐프들에게 미슐랭 스타와 부와 명성을 안겨 주기도 하는 미식(美食)의 대표 메뉴이기도 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품위 없는 방식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이 남자에게 익숙한 스테이크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대충 구워 낸 스테이크가 아니었다.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를 받을 수 없는 일류 레스토랑의 방식이다.
저런 식으로 한꺼번에 다 썰어 놓는 방법은 미슐랭 레스토랑에 적합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굽기를 판단하는 지식이나 태도는 그가 고급 미식 문화에 익숙하다는 증거였다.
“자, 한번 먹어 봅시다.”
스테이크를 다 잘라 낸 그가 한 입 크기의 스테이크 한 조각을 그녀의 접시에 올렸다.
트레이시는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를 집어 입에 넣었다.
육즙이 살아 있는 적당한 굽기의 와규 스테이크가 그녀의 입에서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오늘의 추천 와인입니다.”
한규호가 농담을 하면서 그녀의 앞에 놓인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트레이시는 와인을 따라 주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의 가치를 단순히 기프티드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
트레이시와 한규호의 이번 일본 방문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된 예순 명의 CIA 요원 중 한 사람인 윌 로랜드(Will Rowland)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롯폰기의 한 건물 설치된 CIA 임시 상황실은 열여덟 명의 요원이 24시간 근무하고 있었고, 윌 로랜드는 그 열여덟 명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세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를 포함한 세 명이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입수된 정보를 취합하고, 랭리에 보내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그들은 4시간마다 한 번씩 보고서를 작성해 랭리로 보냈다.
일본 시간으로 01시, 05시, 09시, 13시, 17시, 21시에 보고서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보고서는 21시 보고서였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키보드 위에 놓인 그의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휴렛팩커드가 CIA의 의뢰로 특수 제작한 이 노트북에는 열네 종류의 보안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고, CIA가 직접 제작한 OS가 설치되어 있었다.
노트북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보고자가 보고할 내용을 타이핑만 하면, 그 내용은 자동으로 CIA 전용 해시 함수로 암호화되어 랭리로 전송된다.
이 노트북을 사용하면 파일을 저장하고, 내용을 첨부해 전송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윌 로랜드는 그 간단한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주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보고할 내용이 없었다.
17시 보고서에 여자가 호텔로 들어갔다는 한 문장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텔로 들어간 이후 여자는 두문불출이었다. 남자는 애초에 객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기껏 넣을 수 있는 문장이라 봤자, 그들이 룸서비스를 주문했고, 어떤 음식을 주문했는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고작 그 정도의 정보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를 보고하라고 괌에 있던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윌 로랜드는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어떠한 목적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랭리에서 그에게 알려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말은 그가 지켜보는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그들은 중요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세계 각지에서 육십여 명의 요원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이 그 가설을 뒷받침했다.
중요 인물들께서 저녁으로 무엇을 드셨습니다.
그런 보고서는 너무 가치 없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전화 들어옵니다.”
상황실 요원의 보고가 주저하는 윌 로랜드의 이어셋을 통해 들어왔다.
바로 그의 노트북에 팝업 창이 떴다.
그 팝업 창에는 전화번호와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트레이시와 한규호의 단란한 저녁 식사를 방해한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미시즈 길먼. 내일 일정 협의를 위해 전화드렸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츠네타카의 목소리가 한규호의 귀에도 들려왔다.
트레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전화기를 스피커 모드로 바꿔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규호는 그런 그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통화 내용을 숨기지 않는다는 의도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서류를 검토하고 본사와 연락을 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지체된 줄 몰랐어요.”
트레이시가 그렇게 말했다.
본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한규호는 살짝 웃었다.
-그러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룸서비스로 해결했습니다. 미스터 츠네타카도 저녁 드셨나요?”
-하하하, 네. 저도 뭐,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끼 부리는군.
한규호는 의문형으로 끝나는 츠네타카의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자식은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 이어 가는 방법에 능숙하다. 배운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대화 기술이다.
더군다나 이 자식은 깨끗한 발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치고는 약간 높은 그의 목소리 톤이 깨끗한 발성과 합해져서 청량감을 준다.
한규호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렇군요. 내일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트레이시는 츠네타카의 기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런, 아직 식사를 못 하신 거 아니에요? 혹시 저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말 대신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한규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일은 회의를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트레이시의 시선도 한규호를 향했다.
한규호는 그녀의 시선에서 자신에게 의견을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 시선에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았다.
그녀가 결정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트레이시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아침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9시 괜찮으신가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미스터 허드슨에게 약속드렸던 양조장 방문 관련해 언제 시간이 괜찮으신지 여쭈어 봐야 하는데, 제가 따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트레이시가 다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한규호는 이번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했다.
“아니요. 제가 물어볼게요. 번거롭게 따로 전화하실 필요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미스터 허드슨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미스터 츠네타카도 편한 밤 되세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안부 전해 달래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늦은 밤에 남의 아내에게 전화하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군.”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가 살짝 웃었다.
포만감과 적당한 취기, 그리고 그의 농담에 그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와 버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너무 잘 만들어져서 이질감이 드는 사람. 그런 느낌?”
한규호는 목적어가 생략된 트레이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잘 만들어졌다?”
“샐러리맨이 아니라, 샐러리맨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배역 같달까.”
“그 목적은 나겠군요.”
“에블린 길먼이라는 여자가 에이전트로 방문한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그 여자를 모시고 다닐 누군가가 필요했겠지. 모르지, 그 남자가 얼굴과는 다르게 진짜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애블린 길먼을 모셔야 하는데, 잘생기고, 호감인 놈이 한 놈 있네?”
한규호의 말투에 트레이시는 쿡 하고 웃었다.
“애블린 길먼은 누구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좀 있는 여자 아닐까? 엠디시스템즈에서 에이전트라고 한다면 이 동네에서 나름 잔뼈가 굵어야 할 테니까. 동승자 명단에 브랜든 길먼이 타고 있으면 혹시나 싶었겠지만, 아쉽게도 거기 타고 있던 사람은 브랜든 허드슨이었으니까. 부부라고 생각은 못 했겠지. 좋아, 중년의 여성이 홀로 일본에 온다. 마침 잘생기고 호감을 주는 츠네타카가 있군. 그럼 자네가 그 여자를 모시도록 하게.”
“괜찮네요.”
“근데 온 여자가 젊고 아름다워.”
아름답다는 단어에 트레이시의 감정이 살짝 물결쳤다.
“더군다나 남편이 따라왔어. 어쩌지? 바꿔?”
트레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죠.”
“맞아. 그럴 필요가 없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거지. 호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하는 것이니까.”
“그렇겠죠.”
“끼를 부리더군.”
“네. 저도 느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기대되네요.”
트레이시의 말에 한규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일본주 양조장 방문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우리 남편은?”
“뭐, 아무 때나 상관없다고 전해 줘.”
“괜찮겠어요, 그런 데 방문해도?”
“뭐, 어떻게 되겠지.”
“걱정이네요. 뭔가 장난을 칠까 봐.”
“준비를 하겠지.”
“어떤 준비를 할까요?”
트레이시의 말에 한규호는 몸을 앞으로 빼면서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견학을 안내해 줄 사람은 미인일 거야. 적어도 혼혈, 어쩌면 백인.”
“설마, 그렇게 뻔한 수법을 쓸까요?”
“내기해도 좋아. 미인계(Honey Trap)는 고전이니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소파로 몸을 기댔다.
기대되는 표정으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1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