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87화 (188/386)

< MISSION 04 : 츠바키 (15) >

-Hello?

긴 통화음이 끝나고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무원이 전화를 안 받아? 근무 이탈이야!”

곽용신이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

곽용신의 외침을 들은 상대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공공의 적?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전화 너머의 남자, 인도 뉴델리 주재 코트라 무역관 직원으로 위장하고 있는 국가정보원 4급 요원 김승섭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빙고!”

곽용신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명작이지, 그거. 갑자기 또 보고 싶네. 명대사가 진짜 많은데. 그건 그렇고 점심 드셨수? 뭐 드셨수?

“점심?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저녁 먹을 시간이다, 임마. 그건 그렇고 점심은 왜? 한국 음식 고프냐? 한국 음식 먹고 싶냐?”

-그게 아니고 얼마나 비싼 음식을 자시고 헛소리를 하시는가 싶어서 그렇지.

“헛소리라니.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진짜 졸라게 안 받데.”

-형님, 내가 지금 형님처럼 한국에서 꿀 빨고 있는 줄 아슈? 여기 뉴델리에요. 인도에요. 어매이징 인디아라고요.

“까고 있네. 누군 뭐 인도 없었나? 씨바 뉴델리면 뉴욕이지. 다시 치타공 보내 줄까? 사이캇 호텔 기억나냐?”

-허! 끔찍한 소리 하네, 이 양반이. 뭘 잘못 잡순 거야? 왜 전화했어요? 헛소리하려고 전화했어요? 할 말 없으면 끊어요. 진짜 이 양반이 갑자기 시비야.

김승섭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 그 뭐냐. 컨테이너 하나 잡아라.”

-컨테이너?

“어. 아루나찰프라데시로 가는 물건인데 치타공 통해서 들어갈 거야. 그거 좀 잡아 봐.”

-어디요? 아루나찰 뭐?

“아루나찰프라데시. 이 자식 봐라. 현지에 있으면서 지명을 모르네? 이 자식 이거 진짜 직무 유긴데. 뉴델리에 있으니까 아주 미쳐서 아주. 임마, 거기 중국 국경이랑 접한 거기 동쪽 구석탱이에 몰라?”

-아, 맥마흔라인 있는 데 거기? 그렇게 말해야지, 아루나 어쩌구 그럼 그걸 누가 알아.

“이놈 이거 안되겠네. 이거 소환해서 재교육 받아야겠네.”

-아, 그래요? 불러 주쇼. 나 좀 불러서 재교육좀 시켜 주소. 씨바 이놈의 인도 벗어난다면 내가 씨발 감옥에도 가지. 아니. 감옥은 안 되겠다. 아무튼 좀 한국으로 불러 주소.

“시끄럽고. 아무튼 컨테이너나 잡아 봐. B/L 번호 알려 줄게.”

-잡는 건 잡는거고……. 뭐 난 정식 라인으로 따로 지시받은 거 없는데.

“기, 긴급 작전이야, 긴급.”

-긴급? 냄새가 나는데?

“냄새? 뭔 냄새?”

-뭔가 졸라 귀찮을 것 같은 냄새.

눈치 빠른 새끼.

곽용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야, 형이 임마,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너 임마, 본사 명령 안 들을 거야?”

-본사는 개뿔. 다 들었어요. 성남 달동네 하꼬방에 처박혀 있다더만.

“하꼬방이라니!”

-달동네는 맞구먼.

씨바. 달동네는 맞지.

“시끄럽고. 컨테이너 좀 잡아 봐. 한 2주? 길면 더 좋고.”

-예산은?

“예산은…….”

곽용신은 말이 막혔다.

씨바, 그 생각을 못 했네.

-뭐야? 배정된 예산 없어요? 이 양반이 장난치나. 컨테이너 잡을라면 뇌물을 얼마나 뿌려야 되는데. 어딜 날로 먹으려고 들어?

“아냐, 임마. 예산 있어, 있으니까. 야, 우선 그, 니 돈으로 좀 처리하고. 영수증 처리해 놔.”

-이 양반이 진짜 메탄올을 낮술로 잡수셨나. 뇌물 받았다고 영수증 써 주세요, 그러면 넵, 알겠습니다. 나중에 세금 처리하려면 영수증은 필수죠. 투명한 세무 행정! 자 여기 영수증 있습니다. 이럴까?

“그, 그렇지?”

-아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형이나 나나 다 월급 뻔한데. 이 양반이 뻔히 알면서 그러네.

“야, 알았어. 돈 보내 줄게. 돈 보낼 테니까 우선 약 좀 쳐 봐. 아 씨, 그리고 너 임마 사용 가능한 예산 있잖아!”

-내,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까고 있네! 임마. 나도 임마, 인도에 있었다고, 임마! 뇌물용으로 예비비 만들어 놓는 거 다 아는데.”

-그게 내 돈이요? 딴 작전 걸리면 다시 메꿔야 되는데!

“메꿔 준다고! 메꿔 준다니까! 형 못 믿냐? 어? 야, 김승섭이! 나 곽용신이야! 나 못 믿어?”

-……메꿔 줘야 해요, 진짜로. 나 혼자 옷 안 벗어요.

“니 알몸 따윈 관심없어. 메꿔, 메꿔 줄 거야. 걱정 말고, 컨테이너나 잡아.”

-꼭요. 안 메꿔 주면 나 진짜 X 됩니다.

“승섭아, 형이 임마. 너랑 회사에서 만났지만, 내가 너를 진짜 친동생처럼, 친구처럼 어? 임마.”

-아, 되었고. 진짜 이거 녹음 떴어야 하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요. 녹음 뜹시다. 자, 다시 말해 봐요.

“야, 그건 그거고. 너 혹시 일본어 좀 하지?”

-아니요. 못하는데요?

김승섭이 즉답했다.

곽용신은 김승섭의 즉답에 씨익 웃었다.

“그래. 맞다. 기억나네. 너 일본 여자 꼬셔서 결혼한다고 대학 때 일본에 워킹홀리데인가 나발인가도 갔다 왔다고 했었지. 맞네. 우리 승섭이 일본어도 잘했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니야. 언어는 자전거랑 비슷한거야. 한번 배우면 절대 안 까먹는다니까. 아무튼 알았어, 알았고. 컨테이너 꼭 잡아줘. B/L은 메일로 보낸다.”

-아니, 저기, 형님. 용신이 형. 야! 곽용시…….

곽용신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

한규호가 서류를 받아 들면서 시작된 회의는 생각 외로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다.

두 사람은 콜라 1리터와 500ml 생수 두 병, 룸서비스로 주문한 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각자 두 번 다녀올 때까지 서류를 검토하고, 내용을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화장실에 나온 한규호가 바지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기술 이전 조항이 너무 많다. 근데 의도가 궁금하다?”

“맞아요. 표면적으로 이번 계약도 그 전 계약과 모양새는 비슷해요. 일본은 미국의 전투기를 비싸게 도입하고, 거기에 약간 개조를 해서 F-3라는 이름을 붙여 차세대 전투기로 도입하겠다는 내용이지만,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어요. 무엇보다 이상한 조항이 있어요.”

트레이시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전 사업이었던 F-2와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 거요?”

“F-16을 기반으로 하는 F-2 사업의 개발 분담률은 초기 일본 60%, 미국이 40%였어요. 그리고 미국이 개발하는 40%에는 핵심 기술이 전부 포함되어 있어요. 기체 소스 코드, 비행 제어 기술, 미션 컴퓨터 소스 코드.”

“흠, 말 그대로 껍데기 만드는 틀만 제공하겠다는 이야기군요.”

트레이시의 말에 한규호가 신랄하게 말했다. 미국 놈들이라면 그럴 만하지.

“우리 정부의 정책 방향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혼나는 건 나중에 할게요.”

트레이시의 말에 한규호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결과적으로 F-16의 소스 코드는 일본에 제공되었어요. 미국은 기체 소스 코드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엔진 기술까지 포함해서요,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죠, 일본 입장에서 필요한 건 기체가 아니라 기술이었으니까요. 결국 협상은 지지부진해졌고, 그때 러시아가 일본에 접근해 왔죠. 기체, 엔진, 레이더, 무기에 관한 모든 기술을 아주 비싼 값에 팔겠다고 제안해 왔어요.”

“몇 년도?”

“89년도에요.”

“아버지 부시는 마음이 급했겠군.”

“맞아요. 대통령은 기체와 엔진 기술 공여가 제한되는 의회의 수정안에 거부권을 발동했어요. 기술을 넘기겠다는 이야기였죠. 상원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핵심 기술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싶어 했죠. 상원은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의원 중 3분의 2의 찬성으로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었죠. 그런데 실패했어요.”

“로비가 있었겠군.”

“맞아요. 엔화 폭격이 워싱턴에 행해졌죠. 당시 워싱턴에는 돈이 흘러넘쳤다고 들었어요. 결론적으로 상원은 의결안을 지켜 내지 못했고, 일본은 F-16 기체 소스 코드와 엔진 제조 기술을 얻어 냈어요.”

“일본이 손해를 본 것은 아니군.”

“맞아요. 일본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실험기를 만들고, 엔진도 개발했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번에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데.”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이번 계약에도 기술 공여에 대한 광대한 항목이 있어요. 지난 사업에서와 비슷한 양태를 보이고는 있어요. 기술을 원하는 것처럼.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목숨을 걸고 확보해야 할 기술이 아니에요. 이미 자국 기술로 다 대체가 가능한 부분이에요. ”

트레이시가 말했다.

“잘 아는군.”

한규호는 그녀가 일본에서 근무하던 CIA 요원이었음을 다시 떠올렸다.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이에요.”

한규호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서류에는 미국이 개발중인 5.5세대 스텔스 기술과 카운터 스텔스(Counter-Stealth) 기술에 대한 기술 검증이 F-3 사업에 선결이라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었다.

***

“슬슬 배가 고픈데.”

한규호가 말했다.

서류에 집중하던 트레이시는 그제야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 8시가 지나있었다.

두 사람은 대략 5시간 넘게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렇네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은 몰랐어요. 룸서비스를 시킬까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좋은 생각이군. 나가자니 귀찮기도 하고.”

한규호가 긍정을 표했다.

“하지만 간단하게나마 결론을 내는 게 좋겠는데.”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권자는 당신이니까, 그냥 참고만 하라고. 내 생각은 이래.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우선 일본의 저의가 무엇이냐 하는 부분과 미국의 의지가 무엇이냐 하는 부분이지.”

한규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F-2 사업에서 물을 먹은 국산 기술 개발파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겠지. 뭐 그들로서는 당연한 이야기고. 짐빔 그자가 상원의회 로비스트였다니 이야기도 딱딱 맞아떨어지고. 그리고 계약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최종 결정은 상원이 하는 것이니까 책임도 그들이 지겠지. CIA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는데? 잘하면 상원의 늙은이들의 목줄을 틀어쥘 수도 있으니까. 뭐 솔직히 당신이 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잖아. 기술을 전부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 스텔스 기술 검증만 해도 단순히 기술 시현과 데이터 일부로 그들이 기술을 빼 간다는 확증도 없고.”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의지에 대해서 말해 보면, 단순히 함정일 가능성도 분명 배재할 수 없지. 어찌되었건 계약 내용에 참여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 여지는 만들어 준 것이니까. 주범인 짐빔은 복상사로 골로 가셨고, 거기에 재수 없게 우리가 끼인 거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끼워진 것일 수도 있고.”

한규호의 말에 트레이시의 숨이 멈추었다.

-의도적으로 끼워진 것일 수도 있고.

그의 말이 칼처러 날카롭게 느껴졌다.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우선 배가 고프니까. 내 제안은 이거지, 일단은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그런 트레이시의 우려와는 달리, 한규호는 그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았다.

“지켜본다고요?”

“그래. 서류를 검토했으니 회의를 해야 할 테고, 안달 나는 쪽에서 움직이겠지. 그게 일본 애들이 될지, 아니면 워싱턴의 늙은이들이 될지, 아니면 당신네 랭리 사람들이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아니니까. 적당히 딴지나 놓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반응이 오겠지.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고.”

“만약 반응이 없으면요?”

“그럼 그냥 놀다 가는 거지.”

“놀다 간다고요?”

“그래. 사 주는 밥 먹고, 사 주는 술 마시고. 아, 그러고 보니 일본주인지 뭔지 그거 자리 마련해 준다고 했지? 그래 봤자 정종 아냐? 귀찮게 괜히 간다고 그랬어. 아무튼 그렇게 놀다가 돌아가서 말하는 거지. 확인해 보니 짐빔이 사고를 쳤는데, 이런저런 상황이다. 나는 모르겠고 높은 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한규호의 약간은 가벼운 말투에 트레이시는 하마터면 웃음을 보일 뻔했다.

“그냥 그렇게?”

“그래, 그냥 그렇게. 우리는 열심히 비싼 밥 먹고 퍼스트 클래스 타고 돌아가면 되는 거고. 간단하잖아?”

트레이시는 소파에 등을 기댄 여유로운 자세라 말하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다르다. 자신은 특별하다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쪽 업계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

수억 달러의 돈이 오가는 사업을, 그것도 미-일 양국의 국방 외교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산 건을 별것 아닌 것처럼 단순화해 버린다.

그렇게 단순화하면서도 절대 핵심은 놓치지 않는다. 내용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결론까지 명쾌하게 도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무엇보다 설득력이 있다.

“간단하네요,”

“간단하지.”

“무언가 움직일 이유가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는 한규호의 얼굴에 장난기가 조금 묻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요?”

트레이시가 농담을 던졌다.

조금 전 한규호가 보였던 말투에, 무언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농담을 한 것이다.

트레이시의 기억으로는, 그에게 던진 첫 번째 농담이었다.

“예리하군. 역시 CIA.”

한규호가 살짝 웃으며 말한다. 그가 처음 농담을 받아 주었다.

“자, 밥이나 먹자고.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는 것은 어때? 샤워도 좀 하고.”

한규호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트레이시는 그제야 자신이 아침에 입고 나갔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문은 내가 하도록 하지. 점심으로 먹어 봤는데, 나쁘지 않더군. 하긴 돈이 얼만데.”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트레이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시죠.”

한규호가 여유있는 자세로 말했다.

***

재킷을 벗은 트레이시는 스커트의 지퍼를 내려, 스커트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두면서 생각했다.

만약 조금 전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이 한규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죄송해요. 기밀 사항이라 알려 드릴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밀러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면?

밀러 국장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국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숨겨진 의도를 빠르게 알아채고, 자신에게 보고한 그녀에게 칭찬을 해 주었을까?

스커트와 재킷을 벗은 트레이시는 스타킹을 벗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넣어 끌어내렸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스타킹을 벗었다.

아니면 국장은 화를 낼까?

똘똘 말린 스타킹이 그녀의 발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트레이시는 국장이 칭찬을 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 건조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트레이시의 손이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냈다.

하지만 국장이 말할 내용은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히 알아서 하라고 말할 것이다.

트레이시는 권한을 가졌다. 그녀는 더 이상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하급 요원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예전의 자신처럼 국장에게 전화를 하고 보고를 하고 지시를 요청했다면?

트레이시는 갑자기 찾아온 오한에 몸을 살짝 떨었다.

마지막 단추 하나가 남아 있는 실크 블라우스가 그녀의 몸에 진동을 따라 같이 떨었다.

생각하기 위해 바닥을 바라보던 트레이시의 눈이 문으로 향했다.

저 문 너머에는 그 남자가 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남자가 앉아 있다.

접대.

그녀는 한규호를 접대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자신이 일을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기밀을 공유함으로써 그를 미국 쪽으로 한 발자국 끌어왔다.

아니, 미국은 몰라도, 적어도 그녀와의 사이는 좁혀졌다.

어제의 냉랭한 한규호와는 분명히 달랐다.

왜일까? 계기가 무엇 때문일까?

기밀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그를 믿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까?

-도와줘요. 같이 생각해 줘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그 말 때문에?

트레이시는 주름 하나 안 잡힌 실크 블라우스를 벗으며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머리를 고정하기 위한 핀을 뽑으며 머리를 저었다. 묶여 있던 금발이 흩어지며 백금빛을 반사했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하자.

어젯밤, 무심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던 한규호의 모습과 비교하면, 오늘 그가 보여 준 모습은 분명히 좋은 징조이다.

속옷을 제외하고 모든 옷을 벗어 낸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거울 너머 자신의 몸이 보였다.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그와 잘 기회가 생기면 잘 텐가?

국장의 말이 떠올랐다.

< MISSION 04 : 츠바키 (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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