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85화 (186/386)

< MISSION 04 : 츠바키 (13) >

“좋아요, 김규택 씨. 데이빗 박에 대해 말해 보시오.”

오사카 동양극장 흡연실에서 김규택에게 불을 빌린 중년 남자의 말에 김규택의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흐음.”

김규택의 표정을 보면서 중년 남자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좋아요. 뭐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자리를 옮겨 볼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규택은 혼자 말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움직이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래서 일어서는 타이밍을 놓쳤다.

“왜? 더 보시게?”

중년 남자가 김규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김규택은 웅얼거렸다.

“뭐 이해 안 가는 거는 아니지. 김규택 씨는 동양극장은 처음이지요? 사실 처음 와 본 사람들이 다 그렇지. 스트립쇼 하는 곳이라니까 알몸이나 볼까 하고 왔다가, 실제로 보면 깜짝 놀란단 말이지. 이게 뭐야, 이렇게 대단한 공연이었나?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사실 내가 오랜 기간 이곳을 찾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공연장을 그냥 스트립쇼장으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란 말이오. 오사카시청의 그 개념 없는 공무원 새끼들이 여기 와서 제대로 한번 보기라도 했다면 당장에 문화재로 지정을 하고도 남지. 아니지, 그 새끼들도 분명히 와서 봤을 거요. 봤는데도 지들이 여길 들락날락한다는 게 부끄럽겠지. 그러니까 누구 하나 이야길 안 하는 거지. 가치를 알면서도 속내가 시커먼 간토 놈들처럼 말이지. 오사카인도 아니야 그런 놈들은! 나니와 남자의 패기는 다 어쩌고.”

남자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김규택은 그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빨라서가 아니라, 중간에 그의 말이 오사카벤(사투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공연할 두 명이 진짜 에이스라고 할 수 있으니. 그럼 어째? 남은 두 명 다 보고 이야기할까요?”

김규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공연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완전히 중년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주 병신은 아니군.

김규택을 보고 중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치가 있는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었다.

“남은 공연을 볼 기회가 또 있겠지. 우선 나갑시다.”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김규택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갔다.

***

텐마(天滿)역 바로 옆에 위치한 맥도날드에 앉은 김규택은 자신에 앞에 앉아서 빅맥을 크게 베어 물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동양극장에서 김규택에게 다가온 남자는 그를 이곳, 역 앞 맥도날드로 데려 온 것이다.

“왜 안 드시오?”

한입 가득 햄버거를 우물거리던 남자가 김규택에게 물었다.

김규택은 자신의 앞에 놓인 치즈버거 세트를 바라보았다.

빅맥 세트를 주문하던 중년 남자가 무엇을 먹을 것이냐고 묻기에,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겠다고 했는데, 그가 마음대로 치즈버거 세트를 주문한 것이다.

그나마 세트 메뉴의 콜라를 아이스커피로 바꿔 줬기에, 김규택은 커피는 마실 수 있었다.

“별로 생각이 없군요.”

김규택이 말했다.

막상 그가 먹는 모습을 보니, 약간의 식욕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중년 남자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수상해 보이니까.”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김규택은 그의 말을 듣고서 다시 앞에 놓인 치즈버거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맞다. 먹는 게 자연스럽다.

김규택은 고민했다. 햄버거를 먹자니 그의 말을 따르는 것 같고, 안 먹자니 자연스러워 보이질 않고.

그런 생각을 하던 김규택은 치즈버거를 잡아 들고 한입 배어먹었다.

날이 갈수록 얇아져 가는 빵과 패티, 그리고 치즈와 오이피클 맛이 느껴지자, 그의 침샘이 더욱 강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는 괜찮소. 내 생각에 여기 텐마점이 오사카에 있는 마꾸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거요.”

그렇게 말하며 다섯 손가락을 쫙 펴는 그를 보면서 김규택은 이 남자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하며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지 않고 싶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랑 같이 일할 생각이 있소?”

그가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가락으로 쓱 닦아 내면서 말했다.

갑자기? 여기서?

김규택은 당황했다. 역 앞 맥도날드에서, 주변에 적어도 마흔 명이 앉아 있는 이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중년 남자도 김규택의 당황을 눈치챘다. 그리고 빠르게 김규택을 분석해 냈다.

이놈은 진짜 현장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놈이군.

이쪽 세계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항상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진행한다.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패스트푸드점, 선술집, 시장 통, 대형 마트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안전했다. 현장 요원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중년 남자는 김규택의 주요 이력이 대사관 근무뿐임을 알고 있었다. 양복을 입고 은밀한 장소에서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데 익숙하다는 이야기였다.

“조건에 대해서 아직 듣지…….”

김규택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007이 애들을 다 망쳐 놓았다니까.

중년 남자는 고개와 목소리를 낮추는 김규택을 보면서 생각했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미녀와 노닥거리는 007은 이 업계에서는 발각되고, 살해당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다.

“목소리를 낮추지 마시오. 더 의심스러워 보이니까.”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 말에 김규택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좋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알겠군요. 김규택 씨, 원하는 조건을 말해 보시오.”

중년 남자는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시장 통에서 흥정하는 장사꾼 같았다.

“그쪽에서 조건을 먼저 말하면…….”

김규택이 주저하며 말했다. 먼저 카드를 깔 생각은 없었다.

“김규택 씨,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돌아가시길.”

김규택이 그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중년 남자는 들고 있던 감자튀김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당황한 김규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인 것이다.

“잠시만!”

김규택이 그에게 말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 던져버리고 인천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던 김규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봐요, 김규택 씨. 우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이래 보여도 바쁜 사람이에요.”

중년 남자는 속으로 웃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두 장.”

김규택이 말했다.

연봉 20만 달러. 그가 일본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 둔 금액이었다.

두 장이라는 말을 들은 중년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거 잘못된 습관입니다. 아주 안 좋은 버릇이에요. 두 장이라니. 두 장이라면 어떻게 압니까. 아니. 내가 뭐 두 장을 20만 엔으로 알아들으면 어쩌려구요? 그리고 연봉으로 얼마를 달라. 아니면 건당 얼마를 달라. 이렇게 확실하게 이야기해야지. 아무튼 영화가 사람들을 다 망친다니까. 이게 문제야, 문제.”

“미화 20만 불. 연봉으로.”

김규택이 다시 빠르게 말했다.

그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연봉으로 20만 불이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다시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들어서 케첩에 찍었다.

“큰돈이죠, 20만 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김규택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큰돈이다. 한화로 치면 연봉 2억 4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이니까.

“좋아요, 김규택 씨. 저는 당신이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그러니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김규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 이야기부터 합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모 실장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원하는 정보가 있고, 그래서 접촉했고, 그가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에 일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우리로서야 뭐 그리 나쁘지 않은 이야기이긴 합니다. 국정원 1급 실장이라는 자리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아는 것도 많겠지요.”

김규택은 모용진을 떠올렸다. 그가 선의로 이 자리를 주선해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모 실장이 말한 조건 중에 자기 사람을 하나 데려오고 싶다고 했지요. 뻔한 이야기죠. 믿을 만한, 그리고 자신의 심부름을 해 줄 만한 하인이 필요할 것이고, 마침 일도 그만둔 당신이 그 조건에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을 터이고.”

하인이라는 단어가 김규택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선배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뭐 상관없습니다. 인재는 귀하고, 귀한 인재가 원하는 조건은 다 들어주는 편이니까. 그런데 당신을 보니 모 실장이 과연 귀한 인재인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입니다. 어때요? 재미있죠?”

중년 남자의 말에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김규택은 그 장난기가 칼처럼 날카롭다고 생각되었다.

“지금부터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데이빗 박, 들어 봤습니까?”

김규택은 머리를 저었다.

“좋군요. 솔직함이란 언제나 최고의 무기이죠. 우리는 그 데이빗 박이 당신네, 아, 그만뒀으니 당신네라고 하면 안 되겠군요. 국정원의 블랙 요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는 독립 요원일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정보를 사 모으고 있고.”

데이빗 박?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독 립요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김규택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중년 남자는 다시 감자튀김을 집어 들어 케첩을 찍으면서 말했다.

“저는 모 실장이 당신에게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라고 제공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현실적인 이야기죠. 아파도 참아 봐요. 데이빗 박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계약금이 될 것이고, 늙은 여우인 모 실장은 그 이야기를 아끼고 아껴 둘 테니까요. 그에게 돈을 안겨 줄 이야기이니까요. 아, 그 늙은 여우께서는 연봉으로 1백만 불을 요구하셨어요. 참 많은 돈이죠?”

김규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 남자는 케첩이 묻은 감자튀김을 눈앞에서 흔들어 주었다.

“저런, 배포가 작으시군. 이 동네에서 1백만 달러면 그리 큰돈이 아니죠. 가치가 있는 인재는 그 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법이고. 근데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국정원 1급 실장은 가치가 있는 직위이기는 한데, 과연 모용진 그 양반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런 생각. 얼마 전 중국에서의 일도 그렇고.”

얼마 전 중국에서의 일?

김규택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중년 남자는 김규택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저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대놓고 모른다는 표정이면. 거참, 오늘 여러모로 실망이 크군요.”

김규택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었는데,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분노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좋아요, 간단히 말하죠. 김규택 씨, 우리와 일할 생각이 있습니까?”

김규택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러나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주변에 앉아 있던 한 커플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중년 남자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중년 남자에게 가방 하나를 건네고는 ‘우리 이제 뭐 할까? 영화나 볼까?’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매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김규택은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가방을 받아 든 중년 남자는 처음부터 그가 가지고 있었던 가방인 것처럼, 손을 넣어 편지 봉투 모양의 무언가를 꺼내어 김규택에게 내밀었다.

“열어 보시죠.”

중년 남자가 말했다.

김규택은 떨리는 손으로 그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3시간 후에 출발하는 인천행 항공권이 들어있었다. 그의 이름이 항공권에 적혀 있었다.

“가서 데이빗 박에 대해서 알아 오세요. 알게 되면 우리에게 알려 주세요.”

김규택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데이빗 박에 대해서 알아오면 그때 우리는 한 식구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국정원으로 돌아가는 거죠. 돌아가서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1급 실장을 달 때까지.”

김규택의 눈이 커졌다. 국정원으로 돌아간다고? 복직한다고?

“가능합니까, 그게?”

김규택이 물었다.

“불쾌한 질문이군요. 하지만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는 다시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지금 열어 보지 마시고. 나중에, 후방 주의하면서. 아시겠죠?”

남자는 도색잡지를 공유하는 남자 중학생 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데이빗 박에 대해 알아 오시오. 우리가 당신을 다시 국정원에 복직시키고 1급을 만들어 주겠소. 그리고 모 실장에게 줄 돈을 당신에게 주겠소.”

중년 남자의 말에, 김규택은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늙은 여우께서는 1백만 불을 요구하셨죠.

< MISSION 04 : 츠바키 (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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