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83화 (184/386)

< MISSION 04 : 츠바키 (11) >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국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트라이앵글 프라이멀 카지노서는 데이빗 박이었고, 베네수엘라에서는 스즈키였고, 지금은 브랜든 허드슨인 한규호는 침대 위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 공항 서점 앞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든 몇 권의 책 중 한 권이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인터 퍼시픽 프레스에서 발간한 Society of Japan 시리즈 중 하나로 일본 극우 정치단체의 역사에 관한 책이었다.

책은 일본의 우익, 그것도 극우(Far-East)라고 불리는 이들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영역을 확대했는지에 대해서 재미없게 설명하고 있었다.

특히 문장이 심각했다. 누가 번역을 했는지 문장구조가 심각할 정도로 복잡하고 쓸데없이 길었다. 마치 수능 영어 지문을 보는 것 같았다.

한규호는 읽던 책을 뒤집어 뒤표지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미쳤군. 85달러나 했다니.

한규호는 가격표를 보면서 과연 이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백번 양보해서 트레이시가 하는 일이 일본의 우익 집단과 미약하계나마 관계가 있다는 정도, 그 정도까지는 양보해 줄 수 있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정보 제공이라는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다. 그래야,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합리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독서를 취미를 가진 학자로 위장하기 위한 의도로 집어 든 몇 권의 책 중 한 권일 뿐이었다. 하드커버에 두꺼운 책이었기에, 그럴싸해보였기에 이 책을 고른 것이다.

만약 한규호가 정보를 원했다면 이런 책을 볼 필요도 없었다.

CIA에게 이야기만 하면 그 지독한 놈들이 관련 정보를 핵심만 추려서 보고서를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진상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한규호에게는 별로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다.

우선 이번 임무의 핵심은 중단된 무기 계약 건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문제에 한국인인 한규호가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거기에 양조학 박사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위장 신분 또한 역할이 없었다.

이번 작전의 표면적인 핵심은 무기 거래 협상이고, 무기 거래 협상은 트레이시가 알아서 할 것이다.

에이전트 역할을 맡은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고 결정할지에 대한 정보는 그녀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양조학 박사가 무기 거래와 관련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한편으로 짐빔과 관련해, 미국과 일본 간 무기 브로커였다는 제임스 붐의 죽음에도 의문점이 없다.

유일한 의문점이라고는 마지막을 함께했던 여자가 사라졌다는 것인데, 그 문제야 일본 경찰이 알아서 할 부분이었다.

브랜든 허드슨의 가치는 MD시스템즈의 에이전트인 애블린 길먼의 남편이기에 있는 것이다.

공항과 호텔에서 그들을 찍어 대는 카메라도, 츠네타카가 그에게 보여 주는 호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갔다.

거기까지 생각한 한규호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참아 내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아무리 내용이 부실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가치 있는 한 문장은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한규호는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옛 은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던져 버리고 말았을 책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일본의회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는 의원용 관용 차량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어제 너무 무리했어.

눈을 감은 시마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면서 그는 비행기에서 만난 연놈들 때문에 화가 났고, 그 화를 풀지 않고서는 그대로 잠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택으로 향하던 차량을 그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때 찾아가는 장소로 돌렸다.

시마다처럼 높은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회원제 고급클럽에서 항공사 유니폼을 입은 호스테스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분노를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무리했다.

해가 거의 뜰 시간에 집에 도착한 시마다는 침대에 눕기 전에 얼마 전 죽은 그 미국인을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큰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위험하다. 그러나 다 살아 있을 때 이야기다.

그는 오래 살 생각이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은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자제해야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오래 살고 싶은 시마다는 몇 시간 쉬지도 못하고 다시 오늘 일정을 위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량 뒷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다.

예정된 약속 시간은 11시 반부터 2시까지였다. 그 시간은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마다는 실눈을 뜨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가 가까워가고 있었다.

시마다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늦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의원 시마다는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차량이 멈추었다.

시마다는 어젯밤 자신에게 뺨을 맞은 보좌관이 문을 열어 주기 전까지 눈을 감은 그 자세를 유지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정오의 햇빛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피부에 느껴졌다.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는 시마다는 그 햇살조차 짜증이 났다.

이게 다 어제 그 연놈들 때문이야.

시마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

긴자에 위치한 전통 있는 쿄요리(京料理, 전통 쿄토 정식)집인 긴류(銀龍)의 여주인은 시마다를 내실로 안내했다.

시마다는 종종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여사장의 둔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따라가고 있었다.

탐스러운 엉덩이였다.

여체(女體)의 선을 최대한 숨기는 기모노라고 해도, 그녀의 둔부 곡선을 시마다는 그려 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벌써 손을 대고도 남았지만, 그녀에게는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은 중의원인 시마다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시마다 선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복도를 한참 걸어 내실 앞에 도착한 여주인은 미닫이문 앞에서 말했다.

시마다는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닫이문을 열어 버렸다.

자신은 허락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어제 너무 무리한 탓에 머리가 아파 어서 빨리 앉고 싶었다.

문이 열리자 시마다의 시야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점심 식사를 거의 마쳐 가고 있었다.

시마다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어딜 감히! 내가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분노를 느끼면서 호통을 치려던 그의 눈에 늦게나마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코시자와 카네모토.

코시자와 중공업의 회장이자, 일본 최대 우익 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2대 회장이면서 이 모임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그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오랜만에 모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시마다군. 늦었군.”

끝내주는 둔부를 가진 이곳 여주인의 임자인 코시자와 회장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의정 활동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시마다는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사과를 표했다. 그에게는 아주 드문 행동이었다.

“앉게. 기다리다 먼저 식사를 했네.”

“죄송합니다.”

시마다는 그렇게 말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시마다를 내실까지 안내한 여주인이 시마다에게 물었다.

“식사가 끝났으니 정리를 부탁합니다.”

시마다가 채 말을 하기 전에 일본 방위성 방위정책국 사와베 노리히데 국장이 먼저 말했다.

시마다의 고개가 그를 향해 휙 돌았다.

그리고 당당한 국장의 얼굴에서, 그의 말에 코시자와 회장의 의중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주인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들이 들어와 조용하게, 하지만 신속하게 테이블을 정리했다.

“용무가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여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이제 그들이 앉아 있는 내실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시마다는 허기를 느꼈다. 피곤과 두통, 그리고 허기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그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게 다 어제 그 연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었다.

그 연놈들은 없었고, 대신 코시자와 회장이 상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시마다가 아니었다.

시마다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그를 배려하지 않고 밥을 처먹은 괘씸한 놈들이 누구인지 둘러보았다.

상석에는 코시자와 회장,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는 전 방위성 사무차관 출신의 코시자와 중공업 시게노 이오(重野懿王) 상무, 그 맞은편에는 일본 방위성 방위정책국 사와베 노리히데((沢辺法偉) 국장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이초 소속인 것은 확실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에 말석에 있는 남자는 시마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말석에 앉은 그는 시마다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마에하라 키이지(前原希一).

활동우익(活動右翼) 단체 중 하나인 타이코우카이(大行会)를 이끄는 남자였다.

***

[‘활동우익’ 단체는 일본의 마피아인 야쿠자 조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우익 단체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이다.

일부에서는 분리하지 않고, 그냥 야쿠자조직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본 서에서는 ‘Groups affiliated with yakuza syndicates’로 지칭하도록 한다.

우익 단체에서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이 제국주의의 기치를 걸고 주변국을 침탈하던 20세기 초반 당시 대표적인 우익 단체인 아이코쿠샤(愛国社, Society of Patriots), 겐요샤(玄洋社, Black Ocean Society), 고쿠류카이(黑龍會, Black Dragon Society) 등은 목적을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활동우익이 고전 우익 집단으로 분류되는 그들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다고는 분석되지 않는다.

현대의 활동 우익은 주로 1960년대 이후 급속도로 규모를 늘려 온 일본 내 폭력 집단이 1991년-일본 연호로 헤이세이 3년 발효된 폭력단대책법으로 인해 세가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생존을 위해 가면을 바꿔 쓴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불법적인 일을 주로 담당하는 그들의 업종 특성상 그들을 필요로 하던 우익 정치계와의 동행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한규호는 손에 들고 있는 책에서 오랜만에 흥미를 느꼈다.

야쿠자로 대표되는 폭력 단체가 어떻게 우익 집단화되었는지를 소개하는 챕터는 4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두꺼운 책에서 그나마 읽을 만한 부분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폭력단대책법 발효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야쿠자들과 더러운 일을 해 주길 바라는 우익 정치 세력이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정치 세력과 폭력 단체가 손을 잡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민주주의의 태동기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며, 1950년대에서 60년대 초반에 정치 깡패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한국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일본만의 특이성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세계 최고의 경제 수준을 가진 일본에서, 막 선거 제도를 도입한 개발도상국 국가에서나 보일 법한 양상, 폭력 집단이 정치 집단과 결탁해, 과격한 구호가 걸린 트럭에 고출력의 스피커를 달고 노상 프로파간다를 벌인다는 것이 일본의 특이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었다.

한규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재미있는 부분이 끝나고, 재미없는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야쿠자의 계보나, 그들이 어떻게 사고를 치고 다녔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나름의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 내용은 정치 경제사회적 분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21세기의 경제 규모, 20세기 사회체제, 19세기 정치 구조.]

한규호는 은사님이 말씀하신 의미 있는 한 문장을 이것으로 정했다.

한 문장을 찾았으니 더 읽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들고 있던 책을 던져 버렸다.

4백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하드커버의 책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모르겠다. 트레이시가 알아서 하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보았다. 오후 1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놈들이 사 준 비싼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 커피라도 마시고 있을 것이다.

한규호는 그녀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까지 말단 요원이었던 그녀가 무기 거래라는 큰 사업에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우려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한규호는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몸에 힘을 주어 기지개를 켰다.

밥이나 먹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룸서비스를 주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간 그는 룸서비스용 메뉴판을 보면서 비싼 메뉴 몇 개와 적당히 가격이 나가는 와인 한 병을 골랐다.

CIA가 날로 먹게 해 주니 날로 먹을 생각이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1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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