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81화 (182/386)

< MISSION 04 : 츠바키 (9) >

“UC데이비스에서 주조학을 전공하셨다고요?”

차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하던 츠네타카는 브랜든 허드슨의 이야기를 듣고는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현재는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규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UC데이비스의 주조학과라면 ‘패리스의 심판’을 만들어 낸 그곳 아닙니까?”

츠네타카가 와인 세계의 대변혁을 이끌어 낸 역사적인 사건을 입에 올렸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한규호가 답했다.

패리스의 심판, 또는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 영국의 와인 평론가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와인 블라인드 테스트.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와이너리 산업계는 신대륙 와인을 대표하는 캘리포니아 와인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로 규모가 확대되는 신대륙 와인 시장은 전통적인 와인 시장의 지배자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졌고, 프랑스 와인 업계는 건방진 미국 놈들이 더 성장하기 전에 캘리포니아 와인을 망신 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도로 유럽 전역에 내로라하는 소믈리에, 와인 평론가들이 모인 세기의 블라인드 테스트가 열렸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레드 와인 부문에서는 ‘Stag's Leap Wine Cellars 1973’가,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는 ‘Chateau Montelena 1973’가 각각 1위를 차지한다.

둘 다 캘리포니아산 와인이었다.

영국의 타임지는 이 결과를 기사화하면서 헤드라인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으로 뽑았고, 이 기사는 전 세계로 빠르게 타진되었다.

그리고 파리의 심판, 미국 입장에서는 파리의 기적을 만들어 낸 일등 공신이 바로 싸구려 취급받던 캘리포니아 와인을 전 세계적인 품질로 끌어올린 UC데이비스 주조학과였다.

“와인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미스터 츠네타카는 평소에 와인을 좀 즐기시나요?”

트레이시가 츠네타카에게 물었다.

“즐긴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뭐 가끔. 사실 제가 혼자 살기 때문에,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술을 한잔씩 하고는 하는데, 아시다시피 와인은 한번 병을 따면 다 마셔야 해서, 그리 자주 즐기지는 못합니다. 꼭 따지면 저는 스카치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을 따도 10년이고 1백 년이고 괜찮으니까요, 하하하.”

츠네타카는 슬쩍 자신이 혼자 산다는 정보를 흘렸다.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미국인과의 대화에서 정보를 주고 얻는 데 거리를 재는 것은 중요했다.

“아무리 위스키라도 10년을 두면 독이 됩니다, 하하하. 와인을 드실 때는 적당히 드실 만큼만 드시고, 나머지는 밀봉해두셨다가 요리에 쓰면 됩니다. 너무 오래되면 식초가 돼 버리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요리할 때 와인을 조금 넣어 주는 것만으로도 잡미를 날리고 풍미가 확 살아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츠네타카는 그의 말에 실망스러움을 느꼈다. 그의 말에는 정보가 풍부했지만 그에 관한 정보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럼 니혼슈(日本酒, 일본주)도 드셔 보셨는지요?”

그러나 츠네타카는 그런 실망감을 감추고 다시 한규호에게 말을 건넸다.

세일즈맨이라는 것은 그런 직업이다. 하나하나 실망하고, 기뻐하고 해서는 절대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없다.

“많이는 아니지만 마셔 보기는 했습니다. 학부생 시절에 아시아권 술에 대해서 배우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러하시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일본에서의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도 한규호를 마주 보았다.

그들이 예상한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딱히 일정은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고 찾아온 것이라. 우선은 좀 호텔에서 쉴 생각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애블린에게는 미안하지만, 하하하.”

그 말에 애블린은 살짝 화난 표정을 보인 후, 다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브랜든은 술 마시는 것하고 책 보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어요. 이번에도 책을 몇 권이나 싸 들고 왔어요. 그냥 간단하게 이북 기기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을, 책은 직접 종이를 넘겨야 한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렸어요.”

트레이시의 표정과 말투는 남편에 대해 가벼운 험담을 하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괜찮으시다면…….”

트레이시의 말이 끝나자 츠네타카는 한규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본에 계시는 동안 저희가 모실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규호는 그가 이런 말을 꺼낼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에게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딱히 일정이 없으시다면 계시는 동안 저희가 안내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애블린이 일하는 데 영향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 눈빛으로.

그러나 츠네타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담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주조장이 몇 곳 있습니다. 니혼슈에 저변 확대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츠네타카는 주조장 방문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주조장이라는 단어를 들은 트레이시는 이 제안만큼은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규호는 주조학 박사 학위를 받은 브랜든 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 브랜든이 아니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의미를 담은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제안이라면…… 제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가 없군요.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한규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브랜든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트레이시는 한규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얼굴로 츠네타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세 사람은 처음으로 합의를 이루어 냈다.

첫 번째 전투가 막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

그리 길지 않은 다도를 즐기고, 호텔 로비로 내려온 세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츠네타카는 한규호와 악수를 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한규호를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규호는 기대하겠다고 답했다.

그런 둘을 트레이시는 약간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트레이시는 츠네타카와 일을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한규호는 그런 그 둘을 배웅하고, 객실로 올라가 쉴 계획이었다.

“그럼 오늘 일 잘하고 와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녀올게요. 어디 멀리 가서 나가서 괜히 길 잃어버리지 말고요. 일본어도 못하면서.”

입맞춤을 받은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앤가. 무슨 길을 잃어버리고.”

한규호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그녀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츠네타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공략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그가 주로 상대할 대상은 아름다운 입술로 키스를 하는 저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어젯밤에 남자도 그의 타깃 중 하나가 되었다.

위화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었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보고할 것이다.

인사를 나눈 트레이시가 몸을 돌렸다. 이제 진짜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미스터 허드슨,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트레이시를 모시고 호텔 입구로 향했다.

한규호는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 몸을 돌렸다.

잠이나 자자.

잘 수 있을 때 자 둔다.

그의 철칙 중 하나이다.

***

“일이 몰리면 이렇게 한번에 몰린다니까.”

민간정보기업 박물관연대(Museum Union)을 운영하는 데니얼 양은 그렇게 투덜거렸다.

홍콩의 골동품 거래 회사인 ‘HK Antique Trade Co.Ltd’로 위장하고 있는 이 사무실의 진짜 정체는 박물관연대 아시아 지역 총괄 사무소였다.

물론 위장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골동품을 거래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HK Antique Trade사는 최고는 아니어도 홍콩 내에서 나름 상위 다섯 개 안에 들어가는 거래 실적을 보유한 회사였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꽤나 괜찮은 거래가 잡히는 바람에 오랜만에 사무실은 활기를 띄고 있었다.

2013년 중국 정부가 원명원(圓明園) 문화재 발굴 공사를 재개했다.

청대의 황궁정원이었던 원명원은 2차 아편전쟁과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 박살이 나 버렸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은 여러 번 진행되었다.

1996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계속 이어졌으며, 수만 점의 문화재가 1백 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수천이 아니고 수만이었다.

그 정도 대규모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그중 몇몇 문화재가 중간에서 사라졌다.

관리 소홀로 파손되기도 했고, 작은 문화재들은 그 가치를 모르는 발굴 인력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개중에는 의도적으로 리스트에서 빠진 문화재도 있었다.

지금 HK Antique Trade사가 거래하려는 ‘청동 코끼리 머리 모형’ 같은 것이 그랬다.

누군가의 의지로 물건이 리스트에서 빠졌고, 누군가의 소유가 되었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물건의 가치를 평가했고, 높은 평가를 받은 그 모형은 누군가의 창고에서 몇 년간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에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HK Antique Trade사가 그 물건을 맡게 되었다.

데니얼 양은 구매자를 쉽게 찾았다.

대만의 재벌 총수 중 한 명이 관심을 보였다. 거래 금액은 9천4백만 타이완달러, 미화로 3백만 달러가 책정되었다.

거래 금액 3백만 달러, 그중에서 데니얼 양의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그 10%인 30만 달러 정도였다.

푼돈이었다.

30만 달러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유통경로를 이용해야 하는 문화재를 중국에서 홍콩으로 가져오고, 다시 홍콩에서 대만으로 넘기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수고를 생각한다면 30만 달러는 그리 큰돈이 아니다.

서류 작업에만 5만 달러가 들어갔고, 관련 인물들에게 뿌려야 되는 뇌물이 그 배 이상이었다.

거기다가 직원들 월급 주고 하다 보면 실제로 데니얼 양이 수중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진짜 이거 먹겠다고…… 그냥 확 접어 버릴까?”

데니얼 양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결재 서류를 넘겼다.

위장하기 위해서 매출이 있어야 했고, 매출을 만들기 위해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뭐 일이야 그렇다 치자. 일은 해야 하니까.

그러나 그 대만 재벌 놈, 꼴랑 3백만 달러짜리 물건 거래하면서 원하는 것은 뭐 그리도 많은지. 아주 치가 떨렸다.

재산이 있으면 재산만큼의 기품이 있어야 했는데, 부동산으로 돈 번 그 졸부 놈에게는 기품이라는 것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확 그냥 죽여 버려?

데니얼 양의 캐비닛에는 그 재벌에 관련된 파일이 스무 개가량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대여섯 개는 그의 엽색 행각이 담겨있는 영상 파일이었다.

데니얼 양이 그를 사회적으로 죽여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데니얼 양은 그의 소망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 전에 빠르게 서류에 사인을 하고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일본에서 박물관연대에 의뢰한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깔끔하기로 치면 일본 애들이 제일 깔끔하지.

비용에 대해서도 별로 불만이 없고, 결과에 대한 클레임도 적다.

단골손님인 나이초(일본내각정보조사실) 애들은 물론이고, 일본 기업들도 그런 부분에서는 일하기가 편했다.

얼마 전 트라이앵글의 한 카지노에서 진행했던 일도 깔끔했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태국 정부가 연관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가 직접 주 선생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트라이앵글에서 도박꾼 역할을 수행했다.

생각만큼 좋은 정보를 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본 애들은 별말이 없었다. 잔금 지불도 깔끔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고객이란 말인가.

단순히 돈이 많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이초나 일본 기업들은 나름의 점잖음이 있었다. 돈 몇 푼, 결과 몇 개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런 것이 깔끔하고 좋았다.

그는 나이초의 서류를 보았다. 거기에는 한 남자의 사진 몇 장과 함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데니얼 양은 사진부터 보았다.

약간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 남자의 여권 사진이었다.

30대 초중반 정도. 동북아시아 쪽 얼굴에, 코카서스의 피가 섞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언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데니얼 양은 그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낯설지 않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 말은 그 얼굴이 흔한 얼굴이라는 의미였다.

데니얼 양은 이 세계에 뛰어들면서 많은 얼굴을 보았고, 많은 얼굴을 기억했다.

이 남자의 얼굴은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DB 중 누군가와 닮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일은 흔했다.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만약 그 남자가 데니얼 양이 만났거나,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데니얼 양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누군가라는 확신이 아니라, 누군가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흔한 일이었다.

데니얼 양은 시선을 사진에서 밑에 쓰여 있는 글자로 옮겼다.

브랜든 허드슨이라는 이름, 그리고 국적과 여권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이초에서 이 남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사진 한 장, 이름, 그리고 여권 번호를 알려 주고 5일 이내에 정보를 알아오는 조건으로 1천만 엔이다.

“まいど(毎度, 매번 감사하다는 의미로 점원이 하는 인사).”

데니얼 양은 그렇게 말하고 서류철을 접었다.

밑에 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잘할 것이다.

데니얼 양은 그다음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서류철이 열리고 또 다른 남자의 사진이 첨부된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그가 결재할 서류 중에 유일하게 돈이 되지 않는 서류였다.

사진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새끼, 인상 봐라.”

데니얼 양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김규택. 1980년생. 200X년 국가정보원 입사. 200X년 폴란드 대사관 근무…….

데니얼 양은 박물관연대의 새 식구가 될지도 모를 한 남자의 이력을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 MISSION 04 : 츠바키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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