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8) >
아침을 먹고 객실로 올라온 트레이시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츠네타카가 그녀를 모시러 올 것이다.
자신의 방이 아닌 거실에서 화장을 하던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한규호의 방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식당에서 브랜든이던 남편은 객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독립 요원 한규호가 되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트레이시는 그 문을 바라보면서 이번 작전이 어쩌면 CIA가 예상한 시나리오와는 다른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향한 다음 마스카라를 꺼내 들었다.
그에게 최고의 작전 환경을 경험케 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 그를 조금 더 미국에 끌어오겠다는 CIA의 의도는 오판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한 여자를 떠올렸다.
트레이시가 방글라데시의 탄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구해 온 여자,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하나도 노출하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중요함을 CIA에 각인시킨 여자.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제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트레이시는 미국 동부에 있던 안전 가옥의 지하 서재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기억났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하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자신을 규라고 불러 달라던 그녀가,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띠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트레이시는 속눈썹을 향하던 마스카라를 멈추었다.
감정이 격해져 있는 상태에서 하는 화장은 결과가 좋지 않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트레이시는 다시 한규호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가면 저 여자는 죽어!
탄치로 갔던 그날, 그를 구출하기 위해 CIA 특작 팀을 데리고 갔던 그날에 그 여자를 부탁하고 피곤이 묻어나는 얼굴로 뒤돌아서던 그를 붙잡기 위해, 트레이시는 그 여자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다.
-……저 여자가 죽으며 당신도 죽어.
그리고 협박에 대한 그에 대답.
그 눈.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그의 눈.
진지하게 맹세하던 그의 눈이 잊히지가 않았다.
트레이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츠네타카가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화장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울 맞은편에는 화가 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트레이시. 트레이시 테일러. 너는 CIA 요원이야.
지금 네가 저 남자와 같이 있는 이유는 그가 기프티드 이고, 네가 CIA 요원이기 때문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절대로.
트레이시는 자신의 눈을 보면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
코시자와중공업의 해외 영업 3팀 팀장을 맡고 있는 츠네타카 히로시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 로비 소파에 앉아 에벌린 길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그는 5분을 더 기다렸다가 리셉션을 통해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5분을 더 기다리면서 그는 어제 처음 만난 애블린 길먼과 그녀의 남편을 떠올렸다.
늦은 밤 두 사람을 호텔에 배웅한 츠네타카는 그대로 본사로 들어가 긴급 대책 회의에 참여했다.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코시자와중공업 회의실에서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려야 했던 이유는 코시자와중공업이 예상한 시나리오와 다른 두 개의 사실 때문이었다.
하나는 에블린 길먼이 예상과는 달리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 또 다른 하나는 남편과 동행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초 코시자와중공업이 MD시스템에서 연락받은 내용은 단 두 가지였다.
제임스 붐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할 에이전트이 NH109편을 타고 하네다로 입국한다는 것, 그리고 그 에이전트의 이름이 에블린 길먼이라는 내용뿐이었다.
이쪽 업계에서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최소한의 정보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츠네타카가 속한 세계는 무기를 사고파는 세계였다.
그것도 회사와 국가, 경제와 정치, 합법과 불법의 영역이 교묘하게 뒤섞인 세계였다.
최대한 속내를 숨기고,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세계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츠네타카의 눈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에블린 길먼의 모습이 보였다.
츠네타카는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영국 셰빌로우까지 가서 120만 엔을 주고 그가 직접 고른 스카발 원단으로 맞춘 양복이 그의 몸에 맞게 딱 떨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양복은 전투복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걸어오는 여자는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이제 개전(開戰) 시간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안한 밤 보내셨는지요?”
앞으로 걸어 나간 츠네타카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
그는 초탄을 쏘았다.
***
트레이시 테일러는 그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어젯밤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안한 밤 보내셨는지요?”
츠네타카가 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일본인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가 있었다.
어젯밤에 그녀는 약간 이질적인 그 이미지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아침에 보니 그제야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에 얼굴에는 미묘하게 서양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코카서스 인종의 특성이 살짝 묻어나는 얼굴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잘생긴 얼굴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 미소를 보면서 생각했다.
여자를 잘 안다. 이 남자는 여자를 잘 알고 있는 남자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잘 알고 있는 남자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스터 츠네타카. 덕분에 편히 잘 쉬었습니다.”
트레이시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대답을 미소로 받은 츠네타카는 트레이시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도 손을 뻗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허드슨.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한규호는 브랜든의 얼굴로 츠네타카의 손을 잡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호텔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트레이시는 악수를 하는 한규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미소가 번지는 부드러운 얼굴을 보면서 그 누구도 그가 주조학을 전공한 학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왔습니다. 어제 제대로 하지 못한 감사 인사도 드릴 겸 해서.”
한규호는 츠네타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츠네타카는 맞잡은 한규호의 손에서 군살 하나 없는 부드러움을 느꼈다.
크기만 작다면 여자의 손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부드러운 손이었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츠네타가가 물었다.
“네. 좋은 호텔을 잡아 주신 덕분에 훌륭한 아침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께 차를 한잔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어제는 밤이 너무 늦어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도 좀 남아 있습니다만.”
츠네타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젯밤 본사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 하나였다.
남편에 대해서 파악할 것.
코시자와중공업 본사에서는 지금 남자의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담 팀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츠네타카는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많은 없는 상황이다.
가장 지근거리에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츠네타카만이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것이다.
차를 한잔 마시자는 말에, 트레이시와 한규호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시간이 괜찮겠습니까? 저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한규호가 약간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 괜찮으시다면 저희는 전부 다 괜찮습니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에 있는 미소를 조금 더 짙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한규호는 그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음은 분명했다. 그 꿍꿍이가 무엇일지 의심되는 몇 가지가 빠르게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괜찮겠어요?”
트레이시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트레이시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괜히 내가 당신을 방해하는 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지.”
한규호는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츠네타카를 향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꿍꿍이가 뭐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규호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츠네타카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
츠네타카는 두 사람을 호텔 로비의 커피숍이 아닌, 호텔 3층에 있는 전통 찻집으로 모셨다.
다다미가 깔린 방 안에서 세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의자에 마주 앉아 짓토쿠(十徳, 다도용 겉옷)를 입은 중년 남성이 차를 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일본에 오셨으니 기왕이면 제대로 된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츠네타가가 두 사람에게 그렇게 양해를 구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일본 차는 드셔 보셨는지요?”
츠네타카가 두 사람을 보면서 물어보았다.
“음, 마셔 보기는 했지만 전통 있는 일본차라고 자신 있게 말 못 하겠어요.”
트레이시의 말에 츠네타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저나 저희가 실례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한규호의 말에 츠네타카가 의하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일본의 사도우(さどう, 茶道, 다도)는 절차와 예의에 대해서 엄격하다고 들었습니만,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규호는 일부러 다도의 영어식 표현인 ‘Way of Tea’ 대신 ‘さどう’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츠네타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다.
“저희 일본의 다도 문화를 존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츠네타카는 차분한 목소리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재미있군, 이 친구.
한규호는 그를 칭찬하는 츠네타카가 칭찬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기본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칭찬이라는 기술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심리적 기술이 필요하다.
칭찬이 과하다면 아부로 느껴질 수가 있고, 어색한 칭찬은 오히려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츠네타카가 놀란 표정을 지었거나, 일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면 한규호는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얼굴이 좀 반반한 영업맨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츠네타카는 아주 훌륭하게 상대방을 칭찬했다. 과하지 않게,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비행기에서 애블린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일본에 오기 전에 일본에 전통에 관한 책을 보았어요. 예의에 어긋나고 싶지 않았어요.”
한규호의 갑작스러운 말에 트레이시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한규호는 그런 트레이시를 보면서 웃어 주었다.
다른 누군가가 한규호의 시선을 보았다면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남편의 미소라고 생각했을 그런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규호는 이곳이 바둑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둑을 두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상대방에게 아주 작은 한 수씩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매끄럽게 그 수들을 받아 넘겼다.
다들 선수로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남자에게로 향했다.
“메이지 5년, 그러니까 서기로 치면 1872년에 일본 교토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츠네타카는 시선을 돌려 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도는 일본에 있어서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예술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국박람회 당시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다도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하면 일본 다도의 정신이 폄훼되지 읺을까를 고민했고, 다도의 유파 중 하나인 우라센케(裏千家) 종가는 다도용 전용 탁자를 고안했습니다.”
츠네타카의 시선이 그들 사이에 놓인 탁자를 향했다.
“이 탁자가 그때 고안된 덴차반(点茶盤)입니다. 외국인들도 편한 자세에서 다도를 즐길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기품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고안된 탁자입니다.”
한규호와 트레이시의 시선이 테이블을 향했다.
검게 칠한 테이블에는 은은한 광택이 흐르고 있었다.
“다도의 정신 중 하나가 이치고이치에(一期一会)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일생에서 단 한 번뿐인 만남이라는 의미인데, 다도를 매개로 이어진 만남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처럼 소중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두 분을 이곳으로 모시게 된 이유도 그러한 마음에서라는 것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츠네타카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츠네타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규호는 그가 한 말을 되새김질했다.
이치고이치에.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
전장에서 만나,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그런 관계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 MISSION 04 : 츠바키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