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78화 (179/386)

< MISSION 04 : 츠바키 (6) >

트레이시는 닫힌 방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문을 바라보면서 기묘한 기분이 느꼈다. 어떻게 한 단어, 한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만약 반대로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자신이 먼저 캐리어를 끌고 방을 지정하고, 뒷모습을 보이고 사라졌다면.

그랬다면 한규호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을까?

트레이시는 닫힌 문을 보면서 이번 작전을 시작하기 전 밀러 국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상관없어. 확보할 수만 있다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테니까.”

밀러 국장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 목소리가 마치 모래 같다고 느껴졌다. 물기라고는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모래.

트레이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밀러국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시선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듯.

“원하는 것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나요?”

트레이시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밀러 국장은 그저 같은 시선을 트레이시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그와 잠을 자야 하나요?”

트레이시가 다시 물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의뢰하면서 가능한 지원은 전부 다 제공함으로써, 그에게 CIA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를 알려 주기 위한 작전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국장은 그가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 모든 말의 의미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미인계(Honey-trap).

국장은 답이 없었다.

“트레이시 요원.”

침묵을 깬 것은 신시아 챔버였다.

“우리는 절대로 요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지시를 하지 않아요.”

트레이시의 시선이 천천히 신시아 챔버를 향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적어도 밀러 국장님 체제하에서는 그런 지시는 한 번도 내려진 적이 없었어요. 국가를 위해 위협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요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그런 명령은.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런 명령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미합중국은 절대로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권과 소유권이라는 가치 위에 탄생한 미합중국은, 미합중국의 안녕을 위해 만들어진 CIA는 절대로 소속 요원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CIA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8천1백만 달러를 들여 만들고 알카에다 포로들에게 적용된 선진 심문 프로그램(Enhanced Interrogation Program)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다행스럽게도 트레이시 테일러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였고, 그녀의 인권은 보호받는 대상이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려 다시 국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답해 보라는 눈으로 첩보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보고 신시아 챔버가 다시 자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트레이시 요원, 오해할 소지는 분명히 있어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되지만…….”

“지시하면 할 텐가?”

트레이시를 달래기 위해,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기 위한 신시아 챔버의 말이 밀러 국장의 말에 의해 끊겼다.

트레이시와 신시아의 시선이 국장을 향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각각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시아의 시선에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트레이시의 시선에는 적의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와 자라고 하면 잘 텐가?”

트레이시는 국장을 노려보았다.

일반 요원이던 시절에는 감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던 국장을 지금은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 잘 기회가 생기면 잘 텐가?”

국장이 다시 물었다.

신시아는 국장이 던진 두 개의 질문에서 차이를 발견했다.

자라고 하면, 잘 기회가 생기면.

수동과 능동. 그리고 자유의지.

신시아는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런 국장의 의도를 알아챘기를 바라면서.

그런 신시아의 우려와는 달리 트레이시도 국장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첫 번째 질문, 그와 자라는 지시가 내려온다면 트레이시는 아주 잠깐의 고민도 없이 그 명령을 거부할 것이다.

트레이시는 미국인이었다. 스스로가 미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개인이 가지는 권리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이고 그 어느 나라보다 자국민들의 권리를 중요시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연방 헌법에는 자기 결정권에 대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방 헌법 1조 9절에 명시되어 있는 연방의회에 의한 개인의 권리 박탈법(Bill of Attainder) 통과 금지 조항과 권리의 천부적인 성격을 명시한 수정 헌법 9조를 통해서 모든 미국 시민에게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어 있다.

성적(性的) 자기 결정권은 헌법에 보장된 자기 결정권의 하위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누군가와 잠을 잘 때, 그것이 남편이든, 남자 친구이든, 불륜 상대이든, 포르노 영화의 상대 배우이든, 심지어 성 매수자라 할지라도, 그 기본 배경에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이야기다.

남자 친구이고 남편이라 하더라도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가 있고, 마찬가지로 성매매 여성이라 하더라도, 성행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권리는 비용을 지불 하는 성 매수자가 아니라 여성에게 있다는 의미였다.

국장은 묻고 있는 것이다. 자기 결정권에 근거해 그와 잠을 잘 의사가 있는지를.

트레이시는 그 두 번째 질문에 아니라고 확실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

트레이시는 한국으로 가서 성남의 그 언덕길을 올라 한규호를 만나고 그를 설득해 그에게 일을 의뢰하고, 수락한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다시 와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나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호텔에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는 그 순간까지 국장의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인 한규호. 그리고 CIA가 부여한 임시 코드명 기프티드 ‘스튜’,

만약 다른 상황에서 그를, 독립 요원 한규호가 아니라 그저 한국인 한규호로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트레이시는 답을 쉽게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업무적으로 엮인, 그저 같이 업무를 수행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면 당연히 그와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가 업무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반대로 여자와 남자로 만나,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고, 호감으로 발전하고, 그에게서 애정을 느낀다면 당연히 그와 잠을 잘 것이다.

그가 동양인이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트레이시는 다른 백인 여자들처럼 인종별로 등급을 매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종적 관점은 그녀에게 가치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드넥으로 대표되는 백인 남성 우월주위가 지배하는 미국 남부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백인우월주위를 혐오했고 자신이 인권과 다양성에 대해서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합리적인 미국인의 스탠더드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매력이 있다면, 호기심이 느껴진다면, 호감으로 발전한다면, 백인이든,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상황에서 한규호를 만났다면, 그 관계가 로맨틱한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한규호는 상황이 달랐다.

한규호와의 관계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비정상적인 관계였다. 단순히 업무적 또는 개인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이상한 관계였다.

업무로는 분명히 엮여 있다. 그것도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한규호는 지금 트레이시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와 업무로 엮이면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고 업무로 엮였기에 잠을 자지 않겠다고 단순하게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은 분명히 트레이시 안에 내재되어 있었으니까.

트레이시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그 호기심이 한규호라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기프티드’에 대한 호기심인지 그녀는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매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규호라는 남자는 그만이 가지는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한규호의 그 매력이 남자로서의 매력인지, 아니면 ‘기프티드’로서의 매력인지 트레이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국장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무심한 어투로 말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트레이시는 마음을 정했다.

트레이시는 CIA 요원이다.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통해 좋은 직업을 얻고, 많은 돈을 벌고, 커리어 우먼으로서 사회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미래를 CIA 입사와 맞바꾸었다.

그녀는 기프티드 전담 요원이다.

평온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아이를 갖고, 가족들과 함께 캐리비안에서 3주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미래도 그와 맞바꾸어 버렸다.

트레이시가 맞바꾼 것은 그녀가 아직 가지지 않은 미래였다.

그녀 자신을 협상 테이블에 올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창녀가 아니야.

트레시는 지금 결정을 내렸다.

절대로 그와 같은 침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로.

***

욕실에서 나온 한규호는 대충 몸에 물기를 닦아 낸 후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공항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찍던 사람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사진이 찍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신은 몰라도 트레이시는 최소 수십억 달러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무기 거래 계약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방위산업체의 에이전트이니까.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 귀찮아질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최근에 그가 해 왔던 몇몇 작전들을 떠올렸다.

마지막 작전은 베네수엘라에서였다.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몸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힘들다기보다 짜증 나는 작전이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레이스에 비하면 아고스토는 차라리 귀여워 보일 정도였으니까.

한규호는 피식 웃었다.

기억은 희석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고작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고스토에 대한 기억을 희석한 자신이 우스웠다.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작전은 아니었다.

살짝 몸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도밍게즈 그리고 그의 부하와 디플로마띠코를 마신 것은 좋은 추억이었다. 앤 챔버를 통해서 기프티드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역시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서용석이 북한을 빠져나왔다는 정보는 그가 독립 요원이 되고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행운이었군. 베네수엘라에 가게 된 것은.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규호의 기억이 조금 더 뒤로 감겼다.

생각해 보면 트라이앵글에서의 작전도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프라이멀 카지노에서 바보짓을 하는 것은 조금 지겹고 스스로가 좀 한심해 보였지만, 결국엔 정보위원회가 원하는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완을 만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잘 있는지 모르겠군.

한규호는 칼로로 가는 불빛 하나 없는 도로에서 불만이 가득한 중학생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완을 떠올렸다.

칼로의 트래킹 업체에서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투피를 향해 걸어가던 그 산맥에서 자신에게 가 버리라고 말하던 그 차가운 얼굴을 떠올렸다.

두 팔을 가슴에 올린 자세로 맨땅에 반듯하게 누워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울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랐다.

미국 동부 어딘가라고 했는데, CIA가 잘 대접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겠지. 잘하고 있을 것이다.

똑똑한 여자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문 너머에 트레이시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처음 봤을 때 그녀를 보면서 CIA에 들어가면서 그녀를 비서로 붙여 달라고 해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진지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농담 같은 가벼운 생각이었다.

그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군.

한규호의 시선이 다시 천장을 향했다.

소말리아 작전은 쉬웠지.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고.

생각해 보면 소말리아 작전처럼 몸으로 때우는 작전이 그가 해 오던 일반적인 작전이었다.

레드 마피아를 상대했던 하바로스크도. 억류된 해외 건설 업체 임원을 구출하러 갔던 리비아도. ‘사자의 손자’ 작전을 진행했던 아프가니스탄도 다 몸으로 때우는 작전이었다.

몸은 힘들지언정 그런 작전이 마음은 편했다.

또 뭐가 있었지?

한규호는 그렇게 예전에 수행했던 작전들을, 장소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렸다.

그렇게 과거로 향하던 그의 의식이 백금산에 가서 닿았다.

한규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명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한규호는 손을 뻗어 자신의 명치로 가져갔다.

칼이 들어간 자리에는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가 상흔(傷痕)을 지워 버린 그 부위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백금산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릎까지 쌓인 눈이 얼음처럼 딱딱해져 가던 그 산등성이.

기차를 기다리던 그 절벽.

맛대가리 없던 칼로리바.

이불처럼 덮고 자던 위장포.

그리고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

-이제부터 네가 진도5다. 팀장님을 끝까지 모셔라.

안성종 상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그 말이 마치 몇 시간 전 들었던 것처럼 생생했다.

기억은 희석된다.

그러나 백금산의 기억은 희석되지 않았다.

한규호는 그 기억이 희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죽는 그날까지.

< MISSION 04 : 츠바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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