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5) >
도쿄 외곽, 한 일본 전통 구조의 가옥에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람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공간은 로테이(料亭)라고 불리는 고급 요릿집의 한 내실이었다.
방 한쪽에 마련된 도코노마(床の間, 일본식 방에 마련된 장식 공간)에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가 말년에 그린 우키요에(浮世繪, 에도시대 말 유행한 풍속화)가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다색목판화인 니키시에(錦絵)가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말년에 남긴 몇 안 되는 육필화 중 하나였으며, 민간이 소유한 유일한 육필 유키요에였다.
방에 앉아 있는 두 명 중 한 명인 코시자와 카네모토(越沢兼友)는 그 유키요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입니다.”
코시자와 카네모토 앞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코시자와 중공업의 회장이자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인 ‘일본을지키는국민회(日本を守る国民会)’의 2대 회장이었던 코시자와 카네모토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시자와 회장은 에도시대의 니혼바시의 풍경이 그려져 있는 저 유키요에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계속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림에 농축되어 있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었다.
“얼마나 할까요?”
앞에 앉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불쾌한 질문이었다.
“87년도에 우타가와의 니키시에 중 하나가 15억 엔에 거래가 된 적이 있었지.”
그러나 코시자와 회장은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 주기로 했다.
“대단하군요. 15억 엔이라니.”
“당시에는 놀랄 정도의 가격은 아니었네.”
코시자와 회장이 말했다.
버블 시기에 일본에는 돈이 넘쳐흘렀고, 넘쳐흐르는 돈으로 전 세계의 명화를 사들였다.
대표적으로 1988년에 손보재팬닛폰코아가 창립 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53억 엔에 사들여 세계 미술계를 술렁거리게도 했었다.
코시자와 회장이 생각하기에,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반 고흐 이상이었다.
고흐가 53억 엔을 받았다면 우타가와의 작품에는 그 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가격이 많이 빠졌겠군요.”
앞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다시 그림으로 향했다.
버블이 꺼진 지금에야 아무리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가격이 나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5억엔은 넘어갈 것이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그 정도다.
더군다나 지금 도코노마에 걸려 있는 저 유키요에는 판화가 아닌 육필화이니까.
코시자와 회장은 고개를 돌려 내실 공간을 둘러보았다.
5억 엔이나 하는 문화재급 작품이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공간에 위화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있는 료테이는 이제 몇 개 남지 않았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아카츠카(紅塚)였다.
태평양전쟁 이전에 긴자에서 이곳 외곽 히가시쿠루메(東久留米)로 옮긴 덕분에 도쿄 대공습을 피할 수 있었던 아카츠카는 전쟁 이전에도,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높은 사람들이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내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 내에서도 스무 명이 되질 않았다.
그 스무 명만이 우타가와의 우키요에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깝게 되었군요. 짐빔에게 들어간 노력이 적은 게 아니였는데.”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다시 앞에 있는 남자를 향했다.
사와베 노리히데(沢辺法偉), 일본의 방위를 담당하는 방위성 내부부국 방위정책국장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렇군.”
코시자와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붐, 일명 짐빔은 오랫동안 미국과 일본을 연결해 온 무기 브로커였다. 정확히 말하면 양국 정부와 방산기업에 모두 선이 닿아 있는 유일한 브로커였다.
1976년 발생한 록히드 사건 이후로 일본에서 방산 브로커의 입지는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져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브로커로서 살아남아 스스로의 입지를 다져온 인물이 짐빔 그였다.
코시자와 회장도 그가 조만간 현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을 함부로 굴렸다.
그래도 너무 빨랐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위해서 코시자와 회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였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를 대체할 인물이 마땅하지 않은데, 이래저래 걱정입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사와베 국장이 말했다.
코시자와 회장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1970년부터 시작된 초장기 플랜의 결실을 맺을 날이 멀지 않았다.
만약 이번에 그 결실을 수확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코시자와 회장의 나이를 감안할 때, 결실을 보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왔나 봅니다.”
사와베 국장이 말했다. 코시자와도 나무 복도를 통해 들려오는 발 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발소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첫 번째 미닫이문(ふすま)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발걸음이 두 번째 미닫이문 앞까지 다가왔다.
“모셔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사와베 국장이 말했다.
곧이어 미닫이문이 열리고 실크로 만들어진 이로무지(色無地)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20대 후반,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이 모셔 온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히 문을 닫았다.
곧이어 그녀가 멀어지는 종종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그 발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품에 끼고 온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사와베 국장이 서류 봉투를 개봉한 다음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을 꺼내 코시자와 회장에게 전달했다.
코시자와 회장은 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8 X 10 크기로 인화된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에는 두 사람의 남녀의 모습이 인화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찍었습니다. 왼쪽의 여자가 에블린 길먼입니다. MD 시스템즈 소속 에이전트입니다.”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여자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방위산업체의 에이전트라기보다는 할리우드의 여배우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아니면 미인계용 고급 창부(娼婦)이거나.
코시자와 회장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남자는 에블린 길먼의 남편입니다. 이름은 브랜든 허드슨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남자는 회장의 시선 이동에 맞춰 남자에 대해 말했다.
“남편?”
사와베 국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코시자와 회장은 말 없이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젊은 아시아계 남자였다. 학자의 분위기가 풍기는 얼굴을 가졌고,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체격이 좋아 보였다.
코시자와 회장은 보고 있던 사진을 사와베 국장에게 넘기고, 자신은 두 번째 사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코시자와 회장이 남자가 들어오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가 말했다.
두 번째 사진을 넘기자 에블린 길먼에 대한 신상 명세가 적혀 있는 서류가 나왔다.
코시자와는 소리 없이 서류 위의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출신지, 학력, 입사 연도, 소속 등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서류를 다 읽은 코시자와가 물었다.
남자의 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가 없었다.
“준비 중입니다.”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가 말했다.
“얼마나 걸리나?”
사와베 국장은 코시자와 회장이 건내주는 서류를 받아 들면서 물었다.
“검증까지 포함해 빠르면 일주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남자가 말했다.
“일주일?”
사와베가 반문했다.
“검증을 포함해서입니다.”
남자가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사와베는 그렇다고 해도 일주일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거의 50년 가까이 이어진 계획이 결실을 맞이하려는 이 시점에서 시간은 말 그대로 돈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었다.
그런 사와베와 달리 코시자와 회장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였다.
단순히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고 하는 그런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까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내는 그런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남편이 미국에 남아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조사하고 검증했을 일이었다.
“방법은?”
코시자와가 물었다.
“우선 저희와 이치가야(市谷), 그리고 교차 검증을 위해 하쿠렌(博聯)에도 의뢰를 넣었습니다.”
코시자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각정보조사실(内閣情報調査室), 일명 나이초의 내각정보집약센터 국제교류연구반 반장 히사키소마(久木総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코시자와의 시선을 받아 내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일본 최고의 정보기관은 나이초다.
그러니 나이초가 빠질 수는 없었다.
도쿄 신주쿠 이치가야혼무라초에 위치해 이치가야라고 불리우는 일본 방위성 정보본부(情報本部, DIH)가 참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부 세력에 의뢰했다는 말에 코시자와는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하쿠렌, 하쿠부츠칸렌타이(博物館連帯, 박물관연대).
코시자와도 하쿠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민간 정보 기업.
민간 군사 기업인 PMC가 의뢰를 받아 전투를 수행하는 것처럼, 의뢰를 받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주는 일을 하는 민간 정보 기업이다.
꽤나 맡은 일을 잘 처리해 내던 곳이었다. 코시자와가 회장을 맡고 있는 코시자와 중공업에서도 몇 번 일을 의뢰한 바 있었으니까.
유능하다는 말은 반대로 정보가 새어 나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통제 가능합니다.”
나이초의 히사키 반장이 말했다.
코시자와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남자의, 예상하지 못한 애블린의 남편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췄다.
***
한규호와 트레이시, 두 사람을 태우고 하네다공항을 출발한 차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롯폰기(六本木)에 위치한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들어섰다.
차량이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총지배인이 직접 나와 한규호와 트레이시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로비 앞까지 직접 마중 나온 호텔 총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호텔 객실에 여장을 풀었다.
일반 손님들의 예약을 받지 않는 VIP 프리미어 스위트 객실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단정한 은발이 중후한 느낌을 주는 총지배인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츠네타카라는 잘생긴 남자도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가자 100 제곱미터가 넘는 침실 두 개짜리 스위트룸에 트레이시와 한규호 두 사람만이 남았다.
“겨우 도착했네요.”
트레이시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트레이시는 피곤함을 느꼈다.
아무리 일등석이라고 해도 14시간의 비행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많이 힘들었죠? 아무리 퍼스트클래스라고 해도 장시간의 비행은…….”
한규호에게 말을 건네던 트레이시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객실을 둘러보는 한규호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한규호는 천천히 객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트레이시가 앉아 있는 거실에서 시작해 두 개의 침실과 세 개의 욕실을 천천히, 마치 산책하는 느낌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그런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규호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를 보는 시선은 다정했고, 잡은 손은 따스했다.
한규호는 16시간 동안 완벽하게 브랜든 허드슨이었다.
그러나 지금 방을 둘러보는 남자는 더 이상 브랜든 허드슨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성남 태청무역의 그 좁고 지저분한 회의실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한규호였다.
한규호는 천천히 방을 돌아보면서 도청기나 감시 카메라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공항에 나오면서 사진을 찍혔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사진을 찍었지만 한규호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없군.
한규호는 대충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청기나 감시 카메라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몸을 돌려 거실로 나와 자신의 캐리어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섭섭한 표정을 하고 있는 트레이시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방을 쓰도록 하겠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지정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트레이시는 소파에 앉은 그 자세 그대로,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