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4) >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 입국장을 나온 김규택은 공항 터미널 입구를 빠져나와 야외 흡연 장소를 향해 발을 옮겼다.
전(前) 국정원 요원 김규택은 짜증이 났다.
오후 3시 45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5시 30분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어야 하는 저가 항공이 3시간 반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거의 밤 9시 반이 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시간 2시간짜리 비행기가 3시간 반이나 연착된 것이다.
간사이공항에 내려서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밥을 먹고, 맥주도 한잔할 수 있는 시간을 인천공항에서 허비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잔뜩 화가 난 김규택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그가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이메일 때문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고, 바로 이메일이 한 통 들어왔다.
이메일에는 마중하러 오기로 했던 사람이 1시간 정도 늦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게 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김규택 때문이라는 변명이 붙어 있었다.
그 이메일이 김규택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를 일본에 초청한 것도, 그에게 연착으로 악명 높은 이 망할 놈의 저가 항공사 항공권을 예약해 준 것도 다 그들이었다.
지금 결과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한다면 적어도 자신은 아니라고 김규택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얼마 전의 김규택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었다.
몇 년 전에 국정원 요원의 자격으로 일본 정부와 업무 협의를 위해 방문했을 때, 그는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 왔다.
하네다에 착륙하고, 제일 먼저 비행기를 내려 귀빈들이 사용하는 전용 통로를 이용해 터미널을 빠져나왔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급 차량을 탔고, 차량에 타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 불을 붙여 주였다.
공손하게, 두 손으로.
꼭 귀빈 전용 입국 통로나 고급 차량이어서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김규택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김규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이초(内調)가.
나이초, 정식 명칭 내각정보조사실(内閣情報調査室), 영어로는 CIRO(Cabinet Intelligence and Research Office)라는 약자를 쓰는 일본 정부 총리 직속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김규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김규택의 모양새가 이렇게 초라해졌다.
김규택은 한숨을 쉬면서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흡연 부스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받고, 수화물을 찾은 다음 제일 먼저 흡연 부스를 찾아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김규택은 그런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도 그런 한심한 인간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정보원의 소속이 아닌 김규택을 기다려 주는 고급 차량도 없고, 차 안에서 담뱃불을 붙여 줄 사람도 없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다.
김규택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를 떠올렸다.
K-55, 오산 미공군기지에서 그를 엿먹인 독립 요원 놈.
자신의 이름을 걸고 미국과 공조하는 첫 사업이었다. 미국, 그것도 CIA와 하는 첫 공조였는데, 그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그 개새끼!
그를 떠올리자 김규택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잊어버리지 못할 이름.
한규호. 태청무역의 한규호.
***
“아니! 진짜! 과장님! 이러면 안 되죠!”
태청무역에서 남아시아 팀의 유일한 직원인 곽용신 부장은 전화기를 든 상태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게, 곽 부장님. 이해 좀 해 줘. 뭐 상황이 그렇게 되었어.
“아니,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야 이해가 되죠. 안 된다는 거, 힘들다는 거 해 달라고 해 달라고 해서 진짜 겨우겨우 판 깔아 놨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데!”
곽용신은 빠르게 말했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이면서 그의 말이 빨라졌다.
-아니. 뭐. 그걸 모르는 건 아니고. 내가 뭐. 결정권이 있나. 위에서 결정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어딥니까? 어디서 한답니까? 태연로지스틱스? 동호로지스? 금산해운항공? 실버웨이? 맥스퍼트?”
어디서 ‘뽀찌’ 받았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곽용신이 물었다.
-어허, 곽 부장. 앞으로 우리랑 일 안 할 거야?
이 새끼 봐라?
-미안해. 미안한데,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거 너무 심하게 나오네.
반말하네?
-아니, 일을 하다 보면 틀어지고 그러는 거야 뭐 부지기수지. 그리 드문 일도 아닌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고객사 아니야, 고객사.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거 곽 부장 너무 심하시네. 앞으로 우리랑 일 안 할 거야? 우리 짐 안 받을 거야?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방귀낀 놈이 성낸다고, 딱 그 짝이었다.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주에 물건을 보내야 한다고 간청했던게 보름 전이다.
인도 동북부의 격오지, 그냥 격오지도 아니고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그 유명한 맥마흔 라인이 있는 ‘개그지’ 같은 곳이 바로 아루나찰프라데시다.
영토 분쟁은 그렇다고 치자. 뭐 당장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곳으로 물건을 보내기 위해서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일이 엄청나게 복잡해진다는 이야기다.
인도의 영토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방글라데시와 중국 사이에 껴 있는 아주 개그지 같은 위치 대문에 해상 운송을 하려면 치타공항을 이용해야 했다.
즉, 인도로 가는 물건을 방글라데시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1차로 비용이 발생한다.
아주 지랄맞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방글라데시 세관을 통과해야 하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육상 운송 수단을 수배해야 하고, 수배한 트럭을 이용해 또 국경을 넘어야 한다.
지랄맞기로는 방글라데시에 절대 뒤지지 않는 인도 국경을 넘는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지방 토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아주 개깡촌에!
“우리는 이미 작업 들어갔는데, 거기 들어간 비용은 어떻게…….”
-곽 부장, 자꾸 왜 이래. 왜 자꾸 지분거려?
곽용신은 그 말에 결국 터져 버렸다.
“그거 씨발 단가 안 나오는 거, 해 달라고 해 달라고 그래서, 진짜 방글라데시 들어가는 물량 X 빠지게 찾아다니면서 겨우 콘솔 하나 짠 건데, 갑자기 안 된다 그러면 그거 손해는 우리가 다 뒤집어쓰는 거 아냐! 아무리 화주고 고객이고 나발이고, 이딴 식으로 하면 이게 일하자는 거야, 싸우자는 거야!”
곽용신은 소리치면서 생각했다.
인도에 있을 것을 그랬다.
아무리 개그지 같은 인도라도 해도 코트라 무역관에서 근무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하는 건데.
-곽부장, 지금 말 다 했어?
“다 안 했어, 이 자식아! 그리고 씨발 왜 자꾸 반말이야! 짐 안 받아, 이 새끼야.”
-새끼? 너 지금 새끼라고 했어?
“그래 이 새끼야. 새! 끼! 라고 했다. 내가 씨발 사표 쓰고 만다, 이 개자식아!”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기를 집어 던지려다가 손에 들고 있는 휴대전화가 회사 전화기가 아니라 와이프가 얼마 전에 사 준, 약정이 아직 1년 넘게 남아 있는 신형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참아 냈다.
“아오, 이 씨발 놈.”
곽용신은 잠시 씩씩거리다 무언가 생각 난 듯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왜 그래?”
신문을 보고 있던 태청무역의 사장 김형원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곽용신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뭔 신문을 하루 종일 봅니까?”
곽용신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직접 김형원의 책상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찌잉 하는 고주파음이 잠깐 들렸다 사라졌다. 도청 방지용 고주파 진동 동조 장치를 그가 직접 가동했다.
“왜 그래, 갑자기.”
김형원이 신문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작업 하나 하게 허가해 주십쇼.”
곽용신이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작업? 어디?”
“영재상사요,”
곽용신이 조금 전 자신과 통화한 과장의 소속 회사 이름을 말했다.
“영재상사?”
김형원은 이름을 듣고 회사 하나를 떠올렸다.
여기저기서 잡다한 물건을 떼다 파는 그저 그런 작은 회사였다.
작게나마 동남아시아에도 공장도 가지고 있어서 태청무역에 이런저런 수출입 건을 의뢰하는 화주사 중 하나였다.
그리 수익이 나는 화주사는 아니었지만, 억지로라도 매출을 유지해야 하는 태청무역에는 소중한 고객사 중 하나였다.
“그냥 간단하게 세무조사. 더도 말고 딱 한 번만.”
곽용신이 말했다.
씨발 아무리 그래도 태청무역이 국정원 위장 기업인데. 어딜 감히!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흠, 그냥 이번 한 번만 참지.”
김형원이 말했다.
“왜 안 됩니까? 고객사라서? 매출 때문에? 그냥 간단하게 세무조사 한 번만 해도 안 됩니까?”
김형원은 그런 곽용신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웃음 지었다.
잘 뽑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일을 더 잘하고 있다.
오랜 기간 현장을 돌아서 그런지 적응력이 좋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임에도 반년 조금 넘은 시점에 완벽하게 포워더 영업 일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정원 요원이라는 어깨 뽕이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국정원 요원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적지 않은데, 그나마 가장 만만한 세무조사를 들고 나온 곽용신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국정원 요원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엘리트 의식이 가지는 장점도 분명했지만, 김형원에게는 그런 쓸데없는 어깨 뽕을 가진 놈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승진을 하지 못하고 현장으로만 돌았는지도 모른다.
뭐 그 덕분에 자신에게 온 것이겠지만.
곽용신 그는 모르겠지만, 정보위원회의 다음 멤버가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불 옆에서 기름통을 채울 필요는 없겠지.”
김형원이 말했다.
“…….”
곽용신은 김형원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위장 기업의 위장 요원이다. 쓸데없는 의심을 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어딘데?”
김형원이 불만스러워 하는 곽용신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인도입니다.”
“어메이징 인디아라……. 인도에서 문제가 좀 생기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곽용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곽용신이 엿 먹이고 싶은 당사자는 회사가 아니라 포워더에게 뽀찌를 받아먹는 것이 분명한 그 과장 놈이다.
만약 통관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담당 과장이 엿을 먹는다.
그때 곽용신이 해결한다.
해결해 주면서 과장 놈이 뽀찌를 받아먹는다는 이야기를 영재상사 임원에게 흘린다.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냥 한 번 참든가.”
김형원이 말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거짓말이다.
이 방을 나가자마자 당장 인도에 있는 김승섭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혼자서 인도에서 꿀 빨고 있는 김승섭에게 전화를 걸어 강짜를 놓으라고 지시할 것이다.
과장 놈도 엿 먹이고, 김승섭도 귀찮게 하고, 일석이조다.
곽용신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좋은 방법이 있을 줄이야.
“그건 그렇고.”
김형원이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곽용신에게 건네면서 말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기분이 좋던 곽용신은 등골에 흐르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경험상, 담배를 건넨다는 것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거나 귀찮은 일을 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그렇고’라는 말이 그 불길함을 가중시켰다.
“일본어 할 줄 아나?”
김형원이 담뱃불을 붙여 주면서 물었다.
일본어? 갑자기 일본어는 왜?
“일본어는…… 뭐…… 거의…… 못한……다고…… 보는…… 게…….”
등골에서 시작된 불길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곽용신이 말했다.
“그래. 그렇군.”
김형원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곽용신은 회사 사장이자 국정원 상사의 얼굴에 스쳐 가는 미소를 보았다.
아주 불길한 미소였다.
***
김규택은 분노가 가득한 발걸음으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김규택을 마중하기 위해 오기로 했던 사람은 1시간을 늦는다 했는데, 도착했다는 이메일이 온 것은 그보다 30분이나 더 지난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것도 입국장으로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직접 주차장까지 찾으러 오라는 이야기였다.
김규택은 분노했다.
살면서 이보다 더 분노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후 12시가 되기 이전에 집을 나왔다.
오후 1시에 공항에 도착했고, 비행기가 3시간 반이나 지연된다는 소식을 공항에서 들었다.
겨우 참아 내며 체크인을 하려는데, 수화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규택을 초청한 놈들이 예약한 항공권에는 수화물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착오가 있었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수화물 비용을 지불하고 공항에서 3시간 반을 기다려 좁은 저가 항공 좌석에 구겨져서 물만 마시며 일본에 도착했는데 1시간 반을 기다리게 하다니!
김규택은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에서 최악의 날이 언제였냐고 물어보면 주저 없이 오산에서 한규호가 자신의 인생을 망친 그날을 뽑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분노한 날이 언제였냐는 질문에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김규택이 아쉬운 상황이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김규택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상판을 보고 싶었다. 잡 인터뷰고 나발이고, 자신을 엿 먹인 놈이 누구인지,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놈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김규택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가서 얼굴을 보고, 일을 얼마나 X같이 처리했는지 직접 알려 주고 싶었다. 격하게, 아주 격하게.
김규택의 눈에 이메일에 적혀 있던 차량 모델이 보였다.
나와 있지도 않네?
차량으로 다가간 김규택은 있는 힘껏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치기 위해 잔뜩 들이마신 숨을 뱉어 내려던 그 순간, 그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킴.”
운전석에 앉아 그렇게 말을 건내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것도 김규택이 살면서 지금까지 봐 왔던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 MISSION 04 : 츠바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