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75화 (176/386)

< MISSION 04 : 츠바키 (3) >

항공사에서 제공한 차량을 타고 아자부(麻布)의 집으로 향하는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市万田存理)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자신과 같이 1등석을 타고 온 젊은 남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자 쪽을 회상하고 있었다.

완벽했다. 처음 비행기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녀처럼 완벽한 백인 여자는 본적이 없었다.

시마다는 꽤 많은 젊은 백인 여자를 만났었다.

그의 직업상 워싱턴에 갈 일이 많았고, 워싱턴은 할리우드와 더불어 젊고 아름다운 금발 여성들이 모여 있는 장소 중 하나였다.

차이가 있다면 가슴은 크고 머리는 빈 할리우드의 미녀들과는 달리, 워싱턴의 금발 미녀들은 아이비리그에서 딴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시마다가 그녀들의 옷을 벗길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시마다는 방법을 찾았다. DC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애틀랜틱 시티를 찾아간 것이다.

동부의 라스베가스라고 불리우는 애틀랜틱 시티는 그 별명에 걸맞게 카지노가 밀집되어 있고, 돈과 욕망과 젊은 여자들을 끌어모았다.

그 젊은 여자들이 시마다에 대안이 되어 주었다.

시마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에도 그곳에서 여자 하나를 품었다.

살짝 웨이브 진 금발, 시원한 이마, 약간 백치미가 느껴지는 눈매, 오똑한 코와 조화를 이루는 약간 큰 느낌의 입.

보형물을 집어넣지 않았음에도 전혀 처지지 않은 가슴과 탄탄한 복근, 그리고 절대로 일본 여자들은 가질 수 없는 긴 비율의 다리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2시간에 2천4백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시마다는 절대로 그 돈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일본으로 데려오고 싶을 정도로 최고의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의 평가는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네다로 향하는 비행기 1등석에서 바로 바뀌어 버렸다.

처음 비행기에서 그 여자를 보았을 때, 그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시마다는 확신했다.

최상급이다. 와규(和牛)로 치면 A-5등급 그 이상이다.

시마다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나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단아하게 차려입은 투피스 정장 아래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라인을 시마다는 알 수 있었다.

비행기가 게이트에 도착하고 브릿지가 연결된 이후에 시마다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봐 두기 위해서.

그리고 의도치 않게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를 보았다. 자신을 향해 재수없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건방진 놈.

그 젊은 남자의 미소를 떠올리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자신이 승자라고 선언하는 듯한 재수없는 미소를 보였다.

학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서생 같은 놈이었다.

어떻게 봐도 돈하고는 상관없을 것처럼 생긴 그런 놈이 120만 엔이나 하는 1등석에 탔다는 것이 시마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1등석 비용을 지불한 적 없었지만, 단 한 번도 1등석이 아닌 좌석에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마다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1등석이라는 것은 자신과 같은 사회 지도층에게나 어울리는 자리다. 다시 말하면 그런 젊은 놈에게 1등석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돈을 냈다고 1등석을 태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나 가문 등을 고려해 1등석에 걸맞는 사람에게만 일등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시마다의 생각이었다.

물론 시마다가 그 젊은 놈에게 화가 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1등석에 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극상 등급의 여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그를 화나게 했다. 그게 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기와 비슷하다.

일반 서민들에게 A등급의 와규를 준다 한들, 그들은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한다.

그저 맛있는 소고기구나,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런 고기는 숨어 있는 진미(眞味)를 찾아낼 줄 아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극상품의 여자에게는 극상품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남자가 필요하다.

마치 시마다 자신처럼 말이다.

그런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은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은 예술품을 감상하듯 많은 여자를 품어온 그만이 가능하다.

시마다는 입술을 비틀었다.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화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화나는 것은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일까?

동북아시아 쪽 인종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일본인인지, 증국인인지, 아니면 조선인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백인이었다면, 이왕이면 나이 많은 백인이었다면 이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같은 생각이 반복되면서 시마다의 분노 게이지는 선을 넘어 버렸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풀어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시마다의 시선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보좌관에게 향했다. 통역 겸 기타 잡일 담당을 위해 미국에 동행했던 보좌관은 앞자리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보좌관이 이번 방미 기간 동안 시마다를 대신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14시간 동안 이코노미석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마다는 알지 못했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마다는 손을 뻗어 비서관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보좌관은 깜짝 놀라며 깨어났다.

“피곤한가?”

시마다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시마다 선생님.”

“피곤하면 쉬어야지.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땅이나 파면서 살면 어떻겠어? 후쿠시마에 가서 쌀농사라도 하다 보면 휴식이 될 텐데, 엉?”

시마다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비서관이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거의 뒤집듯 움직여 머리를 숙였다.

도쿄대를 나온 보좌관의 얼굴에 고통이 묻어 있었다.

시마다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두 연놈, 완벽한 미모를 가진 백인 여자와 가난한 학자 같은 그 동양인 남자가 고통이 가득한 얼굴로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그의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

짜증 나는 놈이었지.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여전히 시선을 책에서 떼지 않고 있는 한규호는 비행기에서 만났던 장년의 남자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를 보며 불쾌감을 느끼는 데에는 도사견을 연상시키던 그 늙은 남자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욕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마치 도발이라도 하겠다는 듯, 한규호에게 적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틈만 있으면.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시작된 적의가 스며든 눈빛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남자일 것이다.

기업의 중역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관료, 아니면 정치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1등석에서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승무원들에게 막 대하는 행동이나 트레이시에게 음흉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야 한규호가 당사자가 아니기에 상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빛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규호가 당사자였고, 당사자는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개입하고 싶었다. 교훈을 주고 싶었다.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주먹으로 안구에 약한 충격을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만약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손가락으로 안구를 찔러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규호는 웃었다. 비행기 1등석에서 자신의 위장 신분으로 일본의 높은 양반의 눈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웃음이 나왔다.

미국이 해결해 줄까?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그런 시선을 보고, 기분 좋게 교훈을 내려주고, 미국이 해결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한규호에게 옆자리에 앉은 트레이시가 말을 걸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들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 테일러, CIA에서 그를 전담하는 요원. 그리고 이번 작전 동안 그의 아내인 에블린 길먼을 연기하는 여자.

한규호, 아니 에블린 길먼의 남편인 브랜든 허드슨(Brandon Hudson)은 다정한 눈으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조금 긴장해서.”

이번 일본 방문 동안 트레이시의 남편 역할을 수행하는 한규호는 위장 신분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LA에 도착해서 받은 신분이 UC 데이비스 양조학과 부설 윙클러 연구소의 연구교수인 브랜든 허드슨이었다.

브랜든 허드슨, 일본계 미국인.

1988년에 일본 효고현 히메지(姫路)역의 짐 보관용 임시 사물함에서 발견된 아기, 일명 코인로커 베이비는 세이신(聖心) 수녀회 산하 복지재단을 통해 미국으로 가게 되고 캘리포니아에서 중소 규모의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허드슨 가문에 입양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허드슨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하느님이 보내 주신 아이에게 브랜든이라는 이름을 주고 사랑으로 키워 냈다.

와이너리에서 자란 아이는 세계 최고의 양조학과 중 하나라는 UC 데이비스 양조학과를 진학했고, 학교를 다니던 도중 부모를 잃었고, 상실감에 3년간 방황했고, 방황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힉위를 받은 다음 UC 데이비스의 부설 연구소에서 연구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그런 쓸데없이 디테일한 설정을 들으면서 한규호는 속으로 지독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반년 전 베네수엘라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도 위장 신분을 받았었다. 일본계 미국인 인문학 박사 스즈키라는 신분을 받았지만 이번처럼 쓸데없이 자세한 설정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생각인지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한 설정과 서류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UC 데이비스에서 그가 받은 박사학위 논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정부 기능이 마비된 베네수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만반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변명이었지만, 한규호에게는 귀찮게 외울 것만 더 많아졌다는 생각이었다.

“많이 피곤하죠? 미안해요. 괜히 같이 오자고 해서.”

트레이시가 한규호의 손을 부드럽게 쓸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자신의 아내역인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2년 전이라는 설정이었다.

결혼을 원한 것은 에벌린 길먼이었다. 그녀가 브랜든에게 청혼했다는 설정이었다.

청혼을 하면서 그녀는 조건을 내걸었다. 애벌린 길먼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있었고, 결혼을 통해서 그저 그런 가정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설정이었다.

그렇기에 에벌린은 청혼을 하면서 동시에 조건을 걸었다.

회사는 계속 다닐 것이다. 남편 성을 따라 바꾸지 않겠다. 앞으로 5년 동안 임신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브랜든은 거기에 동의했고, 결혼식은 애벌린의 직장이 있던 뉴저지에서 진행했고, 신혼여행은 바하마에서 2주간을 보냈다는 설정이었다.

결혼 직후에 에벌린은 IUD(IntraUterine Device, 피임을 위한 자궁 내 장치)를 시술했고, 결혼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직장에서, 에벌린은 동부 뉴저지의 MD 시스템즈 본사에서, 브랜든 허드슨은 캘리포니아주 데이비스에서 각자의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지독한 놈들.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트레이시의 얼굴에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오히려 고맙지. 당신 덕분에 오게 되었으니까.”

한규호는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치 실크처럼 부드러운 트레이시의 뺨이 한규호의 손가락에 느껴졌다.

브랜든은 친모와 모국에 대해 단 한 번도 궁금해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설정이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에 일부러 일본이라는 나라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그런 미움은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 다만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 준 허드슨 부부를 생각하면 친모와 모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악처럼 느끼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단 한 번도 일본을 찾아가 보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그가 일본을 찾게 된 이유는 일본에 출장을 오게 된 그의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설정이었다.

미친놈들. CIA 놈들은 분명히 드라마 작가를 고용했을 거야.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정한 시선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꼭 같이 오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당신하고 여행한 지도 오래되었고. 오히려 잘되었지.”

한규호가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애정과 고마움이 담뿍 담겨 있는 말투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조금만 더 가면 호텔에 도착합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치도 없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츠네타카.”

트레이시가 조수석에 앉은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트레이시의 감사 표시에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주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규호는 그 남자가 멋진 미소를 지을 줄 안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두 사람을 마중나온 그 남자는 자신을 츠네타카(常隆)라고 소개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트레이시의 회사인 MD 시스템즈 일본 협력사인 코시자와(越沢) 중공업 해외 영업 3팀 팀장이라는 직함이 쓰여 있었다.

180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신장, 양복 너머로도 알 수 있는 균형 잡힌 몸매, 서구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는, 아주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가 짓는 미소는 어느 회사의 샐러리맨이라기보다 샐러리맨을 연기하는 배우가 나오는 광고에나 어울릴 법한 미소였다.

한규호는 그 미소가 미국이 만들어 준 위장 신분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적이 있다.

분명히 숨겨진 목적이 있다.

무기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방위산업체 해외 영업 팀장이 단순한 샐러리맨일 리는 없다.

방위산업은 죽음을 사고파는 산업이고, 방산업체의 해외 영업 팀장은 일종의 죽음의 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규호는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죽음의 샐러리맨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행기에서 소란을 피우던 도사견 얼굴의 남자를 떠올렸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규호는 두말할 것 없이 도사견 얼굴의 남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는 짜증은 나지만, 적어도 위험하지는 않으니까.

< MISSION 04 : 츠바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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