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74화 (175/386)

< MISSION 04 : 츠바키 (2) >

트레이시가 앉아 있는 이 좁은 공간이 회의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회의실이라기보다 조사실이나 고문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이 좁디좁은 공간은 쓸데없이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을 중심으로 의자가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패브릭 소재의 의자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여기저기 해져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무엇보다 조명이 공간에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이 음침한 방에서 먼지를 뿜어내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이 회의실만 문제가 아니었다.

이 망할 놈의 회사 건물에는 주차장이 없었기에, 인근 지하철역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대략 20여 분을 걸어와야 했다. 그것도 경사가 급한 언덕길을 하이힐을 신고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둘이 아녔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뽑으라면 두말없이 눈앞에 이 남자를 뽑았을 것이다.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노려보았다.

‘거절하겠소.’ 단 한 문장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그를 노려보면서, 가방을 들고 이 지저분한 회의실에서 당장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남자 때문에, 평소의 그녀라면, CIA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감내해야 했다.

언덕길, 지저분한 회의실, 자극적인 믹스 커피, 무엇보다도 무례한 이 남자를 참아 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CIA라는 이름을 가지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쓰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피해를 볼 것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계좌만 동결해도 일반인이라면 손이 꽁꽁 묶인다.

‘이 사람의 계좌는 테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된다’라는 한 문장이면 한 사람의 계좌를 무기한으로 묶어 놓을 수 있다.

랭리에서는 이 남자의 계좌를 전부 파악해 놓고 있을 것이다. 숨겨 놓은 차명 계좌가 있다고 해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리 파악해 놓은 약점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상대의 약점에 조금의 양념만 친다면 상대방은 죽을 때까지 CIA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회유라는 다른 방법도 있다.

가장 먼저 협상 대상자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돈. 그다음으로 CIA와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을 제시하는 방법도 있다.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상호 간 유대 관계를 기반으로 정서적으로 부탁하는 방법, 미인계로 대표되는 방법이었다.

트레이시는 눈앞에 남자를 보면서 어떤 방법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거라고 생각되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한 걸음 후퇴하기로 했다.

“일명 짐빔. 제임스 붐. 2주 전 도쿄의 호텔……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한 객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어요. 객실도 알려 드려야 하나요?”

한규호는 분한 듯한 얼굴로 말하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속으로 웃음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웃음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일본에서 죽으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어요. 짐빔은 몇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어요. 가장 많이 알려진 직업은 상원 의원들을 상대하는 로비스트였고, 그의 행보는 미 의회 그리고 상원 의원들과 관련되어 있어요. 대부분이 높은 수준의 보안을 필요로 하는 정보들이고, 어떤 사안들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승인이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트레이시는 한규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또 말을 끊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러나 한규호는 아무런 말 없이 트레이시를 바라보는 것으로 계속할 것을 허락했다.

“짐빔의 또 다른 직업은 방위산업계 중개상(Broker)이에요. 그가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이유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였죠. 아는지 모르겠지만 무기 거래를 포함한 방위산업에서 브로커와 에이전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들이 없이는 사업이 진행되지 않죠. 짐빔은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일본 정부 사이를 중개한 브로커였어요. 그가 유일한 브로커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브로커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 갑자기 죽었어요. 그가 죽음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움직이게 되었고, 그리고 당신이 같이해 줬으면 해요.”

트레이시의 말을 듣고만 있던 한규호는 책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들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트레이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트레이시는 얼룩진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니코틴과 타르가 농축되어 있는 눅눅한 냄새였다.

“피우겠소?”

한규호가 담뱃갑을 트레이시에게 내밀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한규호는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담뱃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평택 K-55에서 만났던 흑인 준장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지.

담배에 대한 혐오감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가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 전부 의도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양해도 없이 담배를 태움으로써 트레이시에게 선언하고 있다.

주도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노라고.

“궁금한 게 두 가지 있는데.”

한규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물었다.

“뭐죠?”

트레이시는 가방을 챙겨 나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면서 말했다.

“첫 번째로. 왜 나요?”

한규호가 물었다.

***

“별일 아닌데 왜 꼭 그여야만 하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일주일 전 일본에서 로비스트 겸 무기 거래상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가 죽으면서 워싱턴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 소란을 가지고 CIA가 움직일 정도는 아니라고 트레이시는 생각했다.

협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짐빔은 언제나처럼 일본 정부와 관련 업체로부터 접대를 받았고, 잔뜩 술에 취한 그는 언제나처럼 직업여성을 호출했다.

그는 직업여성과 객실에서 술을 더 마셨고, 잔뜩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실데나필 시트르산염, 일명 비아그라를 복용하고 정사를 벌였다.

고도비만에 고혈압, 당뇨 등등 온갖 지저분한 병을 가지고 있던 그의 심장이 정사 도중에 멈춰 버린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과음, 약, 그리고 과격한 정사에 의한 복상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일본과 워싱턴에 있어서 짐빔이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였지만, 짐빔의 죽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그도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트레이시는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으로써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를 CIA가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것인지, 그것도 기프티드인 그를 호출해 가면서까지.

밀러 국장은 손톱으로 책상을 치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를 한규호 전담으로 배정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을까.

“나와 앤 사이에는 깊은 유대가 있어요.”

트레이시에게 답을 준 것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었다.

신시아 챔버.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경영감사 부문 부사장이자, 미국이 보유한 기프티드 앤 챔버의 전담 요원이며 법적 보호자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트레이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형적인 백인 중상류층 가정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앤 사이의 유대는 가족이라는 명분에서 나오는 유대에요. 우리에게는, 미국에게는 운이 좋았죠. 우리는 운 좋게 라마 아마도르를 확보했고, 그녀를 앤 챔버로 키워 냈어요. 그 사이에서 유대가 생겼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트레이시는 두 모녀가 반년 전 베네수엘라 작전 이후 둘 사이에 있었던 벽 하나를 허물어 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테일러 요원, 당신의 궁극적 임무는 기프티드로 강하게 의심되는 스튜, 미스터 한을 미국 소속으로 만드는 것이에요.”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기프티드 전담 요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담당하는 기프티드를 포섭해 미국의 전략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테일러 요원 말처럼 별것 아닌 작전이에요. 말 그대로. 의혹 따위는 없는 죽음이고, 용의자도, 용의자라는 표현은 알맞지 않군요. 관계자도 일본 경찰이 금방 찾아 주겠죠. 이전 작전에 가장 중요한 의도는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에요. 그동안 용병 취급을 받으며 힘든 일만 도맡아 했던 그에게 미국과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지를 알려 주기 위함이에요. CIA와 같이 일을 하면 얼마나 대단한 지원을 받게 되는지, 얼마나 많은 예산을 쓸 수 있는지를 말이에요.”

신시아 챔버의 이야기를 들은 트레이시는 그제야 국장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접대.

이번 작전의 목적은 한규호를 접대하기 위함이었다. 별것 아닌 작전을 맡겨서 그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하고, 부가적으로 미국의 부와 힘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를 포섭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너무…… 저자세로 나가면 나중에 조건을 조율하는 데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를 확보하는 작업의 마지막은 협상 테이블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사전 작업이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상관없어.”

말없이 듣고만 있던 밀러 국장이 말했다.

“확보할 수만 있다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테니까.”

트레이시는 밀러 국장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녀 자신이 국장이 말하는 ‘원하는 것’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첫 번째로. 왜 나일까?”

한규호가 물었다.

“당신이니까요.”

트레이시가 답했다.

한규호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더 설명하라는 눈빛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트레이시는 이 남자가 왜 기분이 나쁜지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남자는 그녀에 대해 배려가 없었다.

트레이시는 상대방에 배려에 익숙했다.

트레이시는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이었다, 그것도 자연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런 그녀는 배려를 받는 것에 익숙했다.

더군다나 그냥 백인 미녀도 아니었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대학교를 다녔고, 졸업하고서는 CIA에 들어왔다.

그녀의 조건 중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에게 친절했고, 그녀를 배려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부터 그는 언제나 냉랭했다.

“미국은 당신, 미스터 한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러나 관심이 있다고 해도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트레이시는 거짓말로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가치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방글라데시로 불러 준 덕분에 본토에 갈 수 있었어요. 그때 내가 당신을 담당한다고 했었죠? 거짓말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을 담당해요. 그러니 당신이 계속 우리와 일을 해 줘야 해요. 우리와 일을 해서 당신이 계속 공적을 쌓아야만 해요. 당신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과 평가는 더욱 높아질 것이에요.”

“그것뿐?”

“물론, 저에 대한 평가도.”

트레이시가 말했다. 거짓과 진실이 교묘히 섞인다. 그러면 거짓은 진실에 덮여 버린다.

한규호는 말없이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내가 승진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여자의 눈,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두 가지 이득을 얻게 돼요. 첫 번째로 CIA와의 더욱 돈독해진 관계에요. 관심 없다고 말하지 마요. 관심이 있든 없든 독립 요원으로서 당신에게는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당신이 찾는 서용석이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데 CIA보다 더 확실한 곳은 없어요. 두 번째로 CIA는 그 어느 곳보다 높은 보수를 지급할 거예요.”

한규호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직 확보되지 않은 정보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시는군. 블러핑이 심하다고 생각되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좋소. 두 번째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번에도 경호를 해 주면 되는 거요? 일본어를 못하는 일본계 인문학 박사 스즈키가 되어서?”

한규호가 물었다.

“당신이 이번 작전에서 맡을 역할은.”

트레이시가 한규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제 남편이에요.”

< MISSION 04 : 츠바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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