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4 : 츠바키 (1) >
도쿄 하네다(羽田)국제공항에 오후 8시 30분 도착 예정인 전일본공수(ANA) NH109편 777-300ER 항공기는 하네다공항 관제탑에 착륙 활주로를 요청했다.
요청을 받아든 하네다 컨트롤은 JFK에서 대권항로를 타고 날아온 이 항공기에 22번 활주로를 배정했다.
무전을 받은 기장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로스앤젤레스국제공항(LAX) 노선과 더불어 하네다의 주요 미국 노선 중 하나인 뉴욕 존에프케네디국제공항(JFK)발 항공기에 편의를 봐주는 것은 일종의 관례였다.
그래서 보통 16R이나 34L 활주로를 주로 이용했는데, 이날은 22번 활주로를 배정받은 것이다.
기장이 특별히 22번 활주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꼭 어느 쪽이냐 따진다면 좋아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장뿐만 아니라, 하네다를 거점으로 움직이는 파일럿들에게는 22번 활주로에 어떠한 애착 같은 것이 있었다.
04번 활주로로 이륙하고, 22번 활주로로 착륙하는 것은 하네다공항의 통과 의례였다.
A 활주로에 비하면 500m가 짧은 22번 활주로에 777-300ER 기종이 착륙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기장이 얼굴을 찡그린 이유는 활주 거리 때문은 아니었다. 게이트까지의 거리 때문이었다.
오후 9시에서 10시 사이에 하네다는 출퇴근 시간의 신주쿠만큼 혼잡했다.
일본 각지는 물론 인천, 베이징, 샹하이, 홍콩 등 2~3시간 거리에 있는 인근 단거리 노선의 마지막 항공편이 잔뜩 몰려 있는 시간이었다.
1분에 한 대꼴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그런 상황에서 터미널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22번 활주로에 착륙한다면 게이트로 향하는 택시웨이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허비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북극 상공을 지나 14시간을 날아온 승객들은 택시웨이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기다려야 하는 20분을 참지 못했다.
더군다나 JFK-하네다 노선은 귀한 분들이 많이 타고 다니는 노선이었다.
기장은 오늘 여덟 석의 퍼스트클래스가 만석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 VIP 누가 있었지?
기장은 자신 대신 일등석 승객에게 인사를 한 부기장에게 오늘 탑승 승객 중 VIP가 누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그의 미간에 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
불행하게도 기장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22번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는 계속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후 9시, 전국에서 몰려오는 비행기와 떠나는 비행기가 뒤얽히면서 택시웨이는 그야말로 러시아워의 도로를 방불케 했다.
지상 관제관이 열심히 꼬인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추월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비행기의 특성상 NH109편은 지루한 기다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불행하게도 기장의 두 번째 예상도 들어맞았다.
“시마다(市万田) 선생님. 죄송합니다. 현재 하네다공항이 혼잡한 관계로 도착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1등석을 담당하는 객실 사무장이 1A에 앉아 있는 장년 남자에게 계속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시마다 선생이라고 불린 남자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한 주름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그 남자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도사견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폐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사무장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자네는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고 있군,”
시마다라는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사람을 겁박하는데 특화되어있는 고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이 시간에 공항이 혼잡한 것을 모를 것 같나? 나를 지금 바보로 보나?”
“네? 아, 아닙니다, 선생님.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사무장은 당황했다.
일본 국회 중의원 시마다 아리히로(市万田存理)는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중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시마다는 일곱 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가업(家業)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유명했고, 제1당인 보수당에서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나와 신당을 창당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 신당이 보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차세대 총리 후보군 중 한 명으로 부상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는 항공 업계에서는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1등석 업그레이드를 포함한 특별 의전을 요구했고, 비행 중에 무리한 요청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화가 나 있었고, 그의 손은 언제나 승무원의 몸을 더듬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승객이었다면 진작에 탑승 금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도 남았을 만큼의 악명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현직 중의원이었다. 그것도 여당계 7선의.
그런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유독 더 화를 내고 있었다.
“늦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승객에게 이유를 알려 줘야 할 것 아닌가? 왜 늦어지고 있는지,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려 줘야 할 것 아닌가?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나?”
“아, 아닙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선생님.”
사무장은 등허리에 흐르는 땀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인지, 14시간의 비행 내내 객실 승무원들을 못살게 굴었던 그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당연해? 진짜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중의원이 아니라 그냥 일개 승객이었어도 그렇게 말 했을까? 사무장, 자네는 모든 승객에게 최선을 다해서 접객했다고 자부할 수 있나?”
시마다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그는 사무장의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뉴욕에서 이륙하기 전에 기장이 인사를 오지 않았다. 자신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딸랑 부기장만 보낸 그 기장 놈 때문에 촉발된 불쾌감이 비행 내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30대 초중반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사무장의 당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덕분에 그의 마음이 조금 풀어진 것이다.
“물러가게. 자네와는 더 할 말이 없어. 히라코 군에게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지.”
시마다는 그렇게 말하고 팔짱을 꼈다. 마치 너와는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사무장은 그가 말하는 ‘히라코 군’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항공사 사장의 이름을 마치 중학생 이름처럼 부르고 있었다.
사무장은 시마다가 그의 말처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일본 2대 항공사 중 하나인 사장을 불러서 거짓말로 일을 크게 만들 것을 알고 있었다.
사무장에게는 두 개의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그를 달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에 말대로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사무장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몸을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미 충분히 힘든 비행이었다. 그가 사장에게 가서 난동을 피운다 하더라도, 더는 저 얼굴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린 사무장은 1D 좌석에 앉아 있는 백인 여성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미시즈 길먼(Mrs. Gilman). 공항이 혼잡한 관계로 이동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길먼이라고 불린 젊은 백인 여성은 사무장에게 미소를 지어주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먼이라고 불린 백인 여성은 영어로 답했다.
에벌린 길먼(Evelyn J. Gilman). 이번 일본 방문 동안 CIA의 트레이시 테일러 요원이 써야 하는 이름이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 출신으로 컬럼비아 경영대학원(Columbia Business School)을 나와 미국 5대 방위산업체 중 하나라는 MD SYSTEMS에 입사했고, 에이전트 업무를 담당하게 된 에벌린 길먼은 이번이 첫 일본 방문이고, 일본어는 전혀 모른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트레이시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브라운대학교에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마치고 CIA에 입사해 극동아시아 지부에서 몇 년 동안 근무했던 트레이시 테일러는 일본어는 물론 일본인 특유의 이상한 발음과 억양으로 점철된 영어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신사분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네요.”
한동안 에벌린이라는 이름을 써야 하는 트레이시는 사무장에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주며 말했다.
“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사무장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국인인 트레이시의 입장에서 사무장의 사과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항이 혼잡해 지연이 생긴 것뿐인데, 승무원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저 남자의 행동도 미국이었다면 체포와 소송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항공사는 승무원이 사과한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트레이시는 슬쩍 1A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시마다 아리히로. 트레이시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지역구를 물려받았고, 일곱 번의 선거에서 전부 이긴 유명한 정치인이기에 그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안전보장위원회 전임 상임위원장이었고, 방위족(防衛族) 의원 중 한 명이었기에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트레이시는 미소로 그렇게 답하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죠?”
트레이시의 말에 책에 향해 있던 옆자리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트레이시에게 향했다.
그 눈에는 자상함이 담겨 있었다.
***
2주 전.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태청무역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태청무역의 좁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트레이시가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서용석. 나이는 대략 50대. 확실하지 않소. 그 이상일 수도도 있고. 얼굴에 자상이 있고, 왼쪽 귀가 없고. 북한 535 출신으로 마지막으로 확인된 장소는 베네수엘라요. 그곳에서 탈출했다고 들었소.”
트레이시의 눈앞에 있는 남자, 한규호는 다시 한번 말했다.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바라보면서 그가 찾아 달라고 말한 남자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저장했다. 랭리에 보내야 할 내용이었다.
“알겠어요. 전달할게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눈앞에 종이컵을 잡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Korean Mix Coffee라는 이 액체에 담긴 과도한 당분이 그녀의 미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는 데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을 들었으니, 이제 그녀가 말할 차례였다.
“일을 의뢰하고 싶어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번 만남 자체가 그녀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CIA가 독립 요원인 한규호에게 일을 의뢰하기 위해서는 태청무역이라는 이 위장 회사를 통해야만 했다.
그를 베네수엘라로 보낼 때도 같은 절차를 따랐다, 베네수엘라 작전을 통해서 한규호와 직접적인 커넥션을 구축했음에도 이 같은 절차는 변하지 않았다.
태청무역을 가운데 두는 것은 한규호의 의지였다.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일반적인 독립 요원들이라면, 독립 요원이 아니라도 정보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CIA와의 직접적인 커넥션은 최종 목표였다.
CIA와 직접 연락한다는 것은 축구로 치면 유럽 4대 리그와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도 한규호는 고집스럽게 한국 측 연락 사무소를 고집하고 있었다.
“들어 봅시다.”
한규호가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의 말투에서 냉랭함을 느꼈다.
“2주 전 일본에서 한 남자가 사망했어요.”
“한 남자?”
한규호는 말을 끊었다.
한규호는 트레이시가 사용한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남자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정보만이 담겨 있다.
인원과 성별.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전부 감추어져 있다.
몇 살이고, 어떠한 일을 하고, 어떻게 죽었고, 왜 죽었는지 그런 정보들이 전부 감추어져 있었다.
말을 끊긴 트레이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부탁하고, 그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자세한 정보는 의뢰를 수락하면 그때…….”
“거절하겠소.”
한규호가 다시 말을 끊었다.
< MISSION 04 : 츠바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