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68화 (169/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41) >

서용석은 몸을 잔뜩 굽힌 상태로, 머리를 눈밭에 대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등허리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통증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도, 그렇다고 엎드려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그 상태로, 겨우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하들에게 포위당한 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분명 가슴팍에 전투용 대검이 박힌 것을 서용석이 똑똑히 보았는데, 그는 마치 그런 사실이 없다는 듯 부상을 입지 않은 것처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수의 적에게 포위당하고, 다수의 칼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마치 병 안에서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물처럼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그 칼들을 피해 냈다.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칼을, 머리를 살짝 움직임으로써 피해 내고, 복부를 향해 날아오는 칼을, 몸을 살짝 비틀면서 비켜 냈다.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칼을 몇 센티미터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면서 그는 보이는 빈틈마다 자신에 손에 든 칼을 찔러 넣고, 옆으로 긋고, 비틀어 빼냈다.

검무(劍舞).

서용석은 그 모습이 마치 검을 들고 추는 춤처럼 느껴졌다.

회전과 곡선,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깨지 않는 직선운동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평생을 총과 칼을 친구 삼아 살아온 그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운 움직임에 부하들의 목숨이 잃고 있었고, 그 상황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마치 서로 관련되지 않은 두 개의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서용석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흉곽이 팽창하면서 온몸을 찔러 오는 고통이 더욱 강해졌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려 나간 왼쪽 귀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용석은 그렇게 끔찍한 고통을 대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저 아름다운 움직임을 막아야 한다. 언제까지 저 죽음이 가득 묻어 있는 검무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게 결정한 서용석은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근처에 떨어져 있던 권총을, 조금 전 얀 베르그만의 이마에 겨누었던 권총을 집어 들었다.

힘겹게 집어 든 권총을 든 팔을 힘겹게 뻗어, 총구를 겨누었다.

총구의 끝에는, 누워 있는 상태로, 서용석과 같이 검무를 바라보고 있던 박종연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

한규호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상황이었다.

다수의 적이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그의 목숨을 끊기 위해 칼날이 그에게 덮쳐 오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용 대검으로 만들어진 검막(劍幕) 안에 갇혀 있는 상황임에도, 한규호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칼이 날아온다. 그의 목을 향해 칼이 날아온다.

예전에 그였다면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었다. 상대방의 원투 콤비네이션을 위빙으로 피해 내는 권투 선수처럼, 타이밍과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움직임은 그 같은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었다.

날아오는 칼날을 확인하고, 그 칼을 든 상대의 눈을 보고, 손목과 어깨의 비틀린 각도를 계산해서, 칼날의 이동 궤도를 완벽하게 파악한 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 내고 있었다.

본능이 아니라 완벽한 계산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한규호는 한꺼번에 그의 몸을 덮쳐 오는 대여섯 개의 칼날에 대해 각각의 계산식을 세우고 결괏값을 도출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몸을 피해 낸 다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적을 배었다.

칼을 회수하면서 변화된 상황에 맞춰 다시 계산하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 내고, 무력화시켰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세 명의 적이 한규호의 손에 들린 칼에 무력화되었다.

한규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동료 세 명이 쓰러졌지만, 여전히 한규호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네 명이 남아 있었기에 한규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모금의 숨이면 1시간 정도는 무호흡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숨 쉬는 시간마저 아껴서 빨리 남은 네 명을 처리하고, 다시 몸을 돌려 그 개자식을 상대하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칼을 찔러 넣고 싶었다.

그 순간 한규호의 직감이 다시 발동했다.

그동안의 직감이 평소 그에게 위험이 찾아왔을 때 찾아왔다면, 이번에 찾아온 직감은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 끈적하고, 기분 나쁜, 불쾌감으로 점철된 그런 직감이었다.

한규호는 관자놀이로 날아드는 칼날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 빈틈으로 칼날을 그었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확실한 무게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한규호는 팔을 빼냄과 동시에 180도 몸을 돌렸고, 몸이 다 돌아가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던졌다.

한규호는 그의 등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보지도 않고 피하면서, 자신이 던진 대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박종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남자의 팔목에 꽂히는 것을 보았다.

탕!

그리고 그 손에 들려 있는 권총에서 터지는 화염과 총성이 한규호의 감각에 잡혔다.

***

박종연은 그저 무아지경의 상태로 한규호의 움직임을 보고만 있었다.

다수의 적에게 포위당했지만, 오히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적들을 사냥해 가는 한규호를 보고만 있었다.

박종연은 한규호가 영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적들을 하나씩 배어 내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희열과 깊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희열의 정체가 무엇인지,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박종연은 그저 자신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에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감정에 파도에 마음껏 휘둘리고 있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박종연이 살았던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진도5가 11챠리를 발동하고 떠나면서, 힘들게 이곳까지 걸어온 진도1이 허망하게 한 발의 총알에 의해 고혼이 되면서, 언제나 기둥 같던 진도0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기에, 죽음을 맞이했던 진도3, 한규호가, 죽음에서 걸어 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면서.

박종연이 살아왔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시간, 이 장소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기존 세계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계였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적들을 도륙하는 한규호를 보면서, 박종연은 알 수 없는 희열과 온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슬픔과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한규호가 몸을 돌려 칼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한규호가 던진 칼을 박종연은 눈으로 따라잡지 못했다.

그 칼이 어디를 목표로 하는지 박종연은 확인할 수 없었다.

탕!

그리고 박종연이 칼의 최종 목적지를 채 확인하기도 전에, 총성과 함께 강한 충격이 그에게 찾아왔다.

근거리에서 터져 나온 총성이었다.

***

서용석의 총구는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부하들을 도륙하는 괴물을 향하지 않았다.

그가 그 방향으로 총구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괴물과 부하들이 뒤얽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쏜 총알에 부하들이 맞을까 하는 우려 때문은 아니었다.

서용석은 그런 상황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하들을 이용해 적을 확실히 맞힐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을 주저 없이 썼을 사람이다. 것이다.

부하들은 이해해 줄 것이다. 그 또한 마찬가지니까.

서용석이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 적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도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활용할 것이고, 그 사실을 부하들도 알고 있기에, 신뢰하고 있기에, 서용석은 아무런 부담 없이 부하들의 목숨을 이용하고, 부하들도 서용석의 목숨을 이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535는 그런 부대였다.

서용석의 계산은 단순했다.

부하들과 엉켜서 싸우고 있는 저 괴물 자식에게 총을 겨누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부하들을 이용한다고 해도 딱히 명중률이 높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저 괴물이 1호 손님과 같은 괴물이라 총을 맞혀도 죽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가능성이다.

어차피 단 한 발만 박아 넣어야 한다면 머리를 뚫어 버려야 한다.

권총으로 확실히 머리를 뚫어 버리기 위해서는 지금 거리는, 더군다나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지금 이 거리는 가능성이 낮았다.

더 짧은 거리에서 확실한 사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서용석은 자신에 근처에 누워 있는 다른 남조선 병사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이미 무력화되어 있는 이 자식을 쏜다.

총소리가 난다.

이자가 죽는다.

거기에 분노한 저 괴물이 뛰어온다.

그리고 근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한 발을, 두 발도 필요 없다. 딱 한발을 그 머리에 박아 넣는다.

그게 서용석의 계산이었다.

죽인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죽인다.

그렇게 생각한 서용석은 팔을 뻗어 근처에 있는 박종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서용석의 예상 중 일부는 들어맞았다.

괴물의 신경이 분산되었다.

아직 총을 쏘지도 않았음에도 그 괴물은 어떻게 알았는지 서용석의 살기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대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당황은커녕 한순간에 주저함도 없이 칼을 집어 던졌다.

그 괴물이 던진 칼은 총알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와 서용석의 팔, 총을 들고 있는 하완을 꿰뚫어 버렸다.

그 반동 때문에 조준선이 흐트러졌다. 몸통을 향했던 총구가 박종연의 흉부에서 비켜 나갔다.

하지만 서용석에게는 아직 행운의 동전이 남아 있었다. 조준선이 움직였지만, 아직 박종연의 신체 범위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서용석의 팔에 박힌 칼이 심지굴근을 자극하면서,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쥔 검지가 오므라들었다.

서용석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지만, 방아쇠는 당겨져 버렸다.

***

한규호는 자신이 칼을 던져 저지했음에도 결국 총이 발사되고, 그 총알이 박종연의 발목을 관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한규호는 지체 없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들에게서 몸을 돌려 박종연에게로 달려갔다.

박종연은 고통이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런 박종연의 상체를 한 손으로 누르면서 총알이 관통한 발목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깔끔하게 관통했는지 좁은 틈 사이로 꿀렁꿀렁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아니라면 상처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남겨 두고 온 세 명의 적이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던진 칼에 손목을 관통당한 남자가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은 개자식이 눈 위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한규호의 시선은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

그는 아주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러나 한규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몇 번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한규호는 알고 있었다.

한규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남쪽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한규호의 청각에.

헬리콥터의 로터 회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헬리콥터의 로터 회전 소리는 인간은 물론,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청각을 가진 동물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였다.

하지만 한규호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규호는 빠르게 생각했다.

얼마나 걸릴까? 저 헬리콥터가 여기까지 닫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달려오는 저 세 명을 처리하고, 팔에 칼이 박힌 이 남자를 처치하고, 저 개자식까지 처리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한규호는 하늘을 향하던 시선을 낮추었다.

그에게 달려오는 세 명의 적이 거의 근접해 들어오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들의 눈을 보았다.

자신의 손에 상당한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그들의 눈에서는 공포 같은 감정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죽이겠다는 살기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눈빛을 보면서 안 상사를 떠올렸다.

다른 팀원들을 살리기 위해 11챠리를 발동했던 그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규철 대위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던, 어떻게든 진도1 윤재운 중사를 데리고 온 그를 떠올렸다.

두 사람의 눈에는 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포기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생각이 눈에 가득했다.

안 상사님은 희생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 자신들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려 했을까?

아니다.

안 상사님은 살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도 살리고, 그들도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려고. 살아 돌아가려고.

한규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오는 적들에게

그를 죽이려고.

죽여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몸을 뻗었다.

살려야겠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살려야 되겠다.

진도2를 살려서 돌려보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눈에 담은 한규호는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4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