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58화 (159/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31)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무산군.

백금산역 북북동 140km 지점.

535 정찰대 정찰1팀장을 맡고 있는 박철 상사는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끄는 특무상사 서용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용석의 뒤를 이어 다음 535정찰대를 이끌 것으로 내정되어 있는 박철 상사는 그의 상관이자 스승인 서용석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이었다.

소중하다는 것은 전투 기술적인 부분, 어떻게 적을 찾아내고, 또는 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는지. 적과 조우했을 때 어떻게 적을 처지하는지 등의 실전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용석에게 배운 것들 중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팀을 이끄는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지금처럼, 가장 선두에 서서 믿음직스런 등을 보여 주는 것처럼.

서용석은 언제나 등을 보여 주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 예를 들어 적지에서 강하를 할 때, 적에게 돌격을 해야 할 때, 평양의 쓰레기들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때, 그가 제일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 팀원들에게 등을 보였다.

그 탄탄한 등으로,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부대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언제나 특유의 그 무표정하고,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그의 등을 따랐다.

박철은 지금도 그가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박철 또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당혹감과는 별개로 그의 상관에게서 배운 무감정한 얼굴로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박철의 시선이 서용석에게서 다른 사람의 뒷모습으로 이동했다.

새하얀 설원을 걷는 열다섯 명의 사람 중 유일하게 군복을 입지 않은 남자, 유일하게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지 않은 남자, 유일하게 전투화 대신 가죽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의 이질적인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박철이 느끼는 당혹감은 행렬에 속해 있는 1호 손님에게서 기인했다.

양복을 입고 헬기에서 하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서용석을 비롯해 모두가 하강을 하고 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강용 장비는커녕 장갑도 끼지 않고서 밧줄 하나를 이용해 헬기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박철이 놀란 것은 그가 밧줄을 이용해 헬기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밧줄을 이용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무장비 레펠링의 정석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잔잔하기는 했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두꺼워 보이는 모직 코트야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가 신고 있는 가죽 구두는 절대로 겨울의 설산을 행군하는 데 적합한 신발은 아니었다.

구두를 신고 설산을 오랜 시간 동안 행군한다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걷는 것도 걷는 것이지만, 방한기능이 부족한 가죽 구두로는 절대로 동상을 막아 낼 수 없다.

걷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동상은 535라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데 저 당의 귀한 손님의 모습에서 고통의 징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봄날 공원을 산책하는 노인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행렬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 발걸음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박철의 시선이 다시 자신의 상관의 등으로 옮겨졌다.

그의 상관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상 못 한 상황에서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의 스승은 오로지 사냥감만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철은 조용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분명,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박철의 예상과는 달리 서용석은 온전히 사냥감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크레디트 에우로파(Credit Europa)의 얀 베르그만(Jan Bergmann) 회장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저 늙은 자본가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자본주의의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상태로 행렬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호흡.

2시간 가깝도록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눈 내린 산을 걷고 있음에도, 그의 호흡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서용석은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전투화와는 이질적인 구두의 눈 밟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서용석이 저 알 수 없는 미지의 인물을 평가하는 잣대는 오직 하나뿐이다.

공화국에 득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해가 될 것인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조국에 원심분리기를 제공하고, 미국이 알 수 없도록 자금을 투자하고, 체제 유지를 위한 도움을 주기로 한 유럽 투자은행의 회장이라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득이 된다.

물론 가슴속에 시커먼 칼을 감추고 있겠지만, 향후에 공화국의 자원과 인민을 침탈하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득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득이 된다. 그저 유럽계 투자은행의 회장이라면.

그러나 지금은?

지금 그가 보여 주는 모습은 유럽계 투자은행의 회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급 양복과 모직 코트, 가죽 구두를 걸치고 헬리콥터에서 강하해 2시간이 넘도록 설산을 행군하면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남자를, 그저 유럽에서 온 투자은행 회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단지 사람을 사냥하는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 타락한 자본가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535부대원 중 일부를 경호원으로 쓰고 싶다고? 그래서 그 실력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의도가 있다. 분명히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535에, 지금 이 현장에 접근한 것이다.

왜일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공화국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서용석은 다양한 상황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그가 헬리콥터에서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을 동승하고 있던 통역사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함경북도의 이름 없는 산야에서 가혹한 자연환경에 의해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한다 해도,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증명을 해 줄 것이다.

***

2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계속 이동하던 서용석은 결국 행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휴식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귀한 손님이 힘들어해서도 아니었다.

통신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길주에서 현장 지휘소를 꾸리고 있는 모남도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헬기에서 뛰어내린 1호손님을 다시 모시러 갈 테니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미친놈들.

길주로 돌아간 헬리콥터가 착륙하고 통역 놈이 모남도에게 달려갔겠지. 그리고 1호 손님이 헬기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고, 부랴부랴 평양에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호위총국이 뒤집어 졌겠군.

당과 최고 존엄의 귀한 손님이 어떠한 방한 대비도 없이 현장에 고립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몸이 상하기 전에 빨리 모셔 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에 보고했을까?

안 했을 것이다.

발각이 된 이후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용석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아예 당이 모르게 하는 것이니까.

곤란하군. 남조선 놈들이 열심히 도망가고 있을 텐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지.

서용석은 지금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남조선의 쥐새끼들 보다 호위총국의 높은 놈들의 목을 따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용석은 고개를 돌려 1호 손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표정을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상화에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용석 그 자신도 언제나 무표정을 유지하기에 그리 어색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 알 수 없는 백인의 얼굴은 무언가 달랐다. 정말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한 손님은 불의의 사고는 피할 수 있게 되었군.

“당신을 모시러 올 테니 기다리라는군,”

서용석이 그에게 말했다.

최고 존엄과 당의 1호 손님에게 건네는 말 치고는 굉장히 불손한 어투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선말은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서용석은 대기 지시를 내리려 박철 상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귀한 분이 기다리시는 동안 추위에 떨지 않도록 앉아 있을 장소라도 만들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냥 가도록 하지.”

그런 그의 귀에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용석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얀 베르그만 회장은 무전기를 잡고 있는 서용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용석. 535라는 부대에서 가장 실력 좋은 군인 중 한 명.

이 나라의 지도자가 직접 지명했고, 그다음에는 자신이 그를 지명했다.

어떤 인물인지 지켜보기 위해서, 그가 찾는 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온 바로는, 서용석이라는 이 남자는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인간의 범주에서 보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위 1%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보유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의 범주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평양에서 만난 군복 입은 고깃덩어리들에 비하면 적어도 이 남자와 그의 지휘를 받는 다른 군인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역시 인간의 범주에 불과했다.

북한에 방문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돈을 들였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그리 긴 시간도, 그리 많은 돈이라고도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헛수고를 한 것 같았다.

“당신을 모시러 올 테니 기다리라는군,”

그가 말했다.

얀 베르그만은 그의 불손한 말투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 불손함은 자신이 아닌 평양의 고깃덩어리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 까지 않은 카드가 한 장 남았는데, 이대로 게임을 덮을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얀 베르그만은 그에게 말했다.

“그냥 가도록 하지,”

***

서용석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선말을 할 줄 안다고?

불길한 예감이 그를 감쌌다.

헬리콥터에서 보여 준 강하 실력, 양복을 입고 2시간 넘게 설산을 행군할 수 있는 체력, 그리고 지금 그가 한 조선말.

모든 것이 그가 위험인물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자본주의의 맹점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라서, 공화국의 어려움을 이용해 침투하려는 자본주의 독사여서, 사람 사냥을 원하는 쓰레기여서, 그래서 거부감이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그 위험함을 간파한 것이었다.

서용석은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죽일까? 지금 당장 목을 졸라 버린 다음에 절벽 위에서 던져 버릴까?

절벽을 굴러떨어지면서 시신은 심하게 훼손될 것이고, 미끄러운 구두 때문에 절벽에서 실족했다는 증언만이 남을 것이다.

죽일까? 지금이 가장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서용석의 손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그 순간 무전이 다시 들어왔다.

서용석은 여전히 1호 손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전병이 건네주는 무전기를 받아 들었다.

***

박철 상사는 아주 오랜만에 서용석의 얼굴에서 감정을 보았다.

그를 제외한 몇몇만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변화였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서용석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박철은 알 수 있었다.

서용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방향이, 갑작스럽게 조선말을 꺼낸 외국인에게 향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위험인물이라고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박철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는 다른 대원 모두는 서용석의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렸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전병이 서용석에게 다가가 무전기를 내밀었다.

서용석의 시선은 여전히 백인에게 고정된 상태로, 무전기를 받아 귀에 댔다.

무전을 듣고 있던 서용석의 얼굴에 감정이 물결쳤다.

그 변화는 박철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변화였다.

서용석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1호 손님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출발한다.”

갑작스러운 이동 명령에 박철을 비롯해 모든 부대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존경하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이동을 하기 위해 몸에 힘을 넣었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온 서용석의 말에 그의 움직임이 멈추어버렸다.

“두협이가 죽었다.”

서용석이 여전히 백인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쥐새끼들을 추적한다. 한 명만 생포한다.”

대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철은 무전병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전기 꺼.”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3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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