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56화 (157/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9)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부령군.

백금산역 북북동 147km 지점.

어느 이름 모를 계곡의 작은 그늘에 숨은 안성종 상사는 병풍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보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힘들겠군, 이 상황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결국 포위망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적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빠르게 포위망을 구성했다.

퇴로를 찾고 찾다 결국에는 이 이름 모를 계곡까지 몰려 버렸다.

1시간 전, 제압사격과 함께 북한군들이 접근해 왔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이라도 발휘된 것일까? 안 상사는 물론 정의성 상사도 1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분대 하나를 저지했다.

한 사람당 한 발씩, 제압사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효율적인 사격과 경이로운 명중률은 이전에도 경험한 바 없었고, 다시 하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기적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 상사는 알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분대 하나를 처리해 봤자 적들은 여전히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고, 포위망을 뚫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 상사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시야를 넓게 확장했다.

1차 교전이 끝난 후, 북한군은 더 이상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이 마냥 저렇게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 상사는 잘 알고 있었다.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또한 그럴 것이니까.

방법이 없군.

시간은 진도 팀의 편이 아니었다. 움직일 수도 없다. 활용할 수 있는 카드도 없다. 이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탄약이 몇 발이나 남았지?

대략 반 탄창, 아마도 열다섯 발 정도. 아마 정의성 상사도 그 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두 사람 합쳐 약 서른 발,

지금 저 병풍 같은 산에 숨어서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북한군은 몇 명이나 될까?

서른 명 이하라면? 아까와 같은 기적이 다시 한번 일어나, 지금 가진 총알만으로 적들을 전부 처리한다면, 그렇다면 살 수 있을까?

안 상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이야기다. 단 두 명이 서른 명을 조준 사격으로 한발에 한 명씩 처리하고 포위망을 뚫어 버린다니.

그답지 않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껴졌다.

만에 하나, 그런 기적이 또 생겼다 치고, 그렇게 빠져나갔다 하더라도, 그다음은?

탄약은 물론 식량도 없이 추격조를 계속 뿌리치면서 북한 땅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 상사는 지금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였군, 내 묘지가.

안 상사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6년 전, 그날 이후, 죽음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면서, 가끔 적지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었다.

그 상상 속에서 안 상사 자신은 그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적들을 향해 총을 쏘다 날아오는 총알에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상황이 되자 기분이 묘했다.

막상 죽음에 앞에 서자, 그의 안에서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절망 또는 좌절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이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 상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느낀 감정은, 오랜 기다림의 끝을 맞이하는 후련함이었다.

안 상사는 옆으로 시선을 돌려, 정의성 상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총구를 전방으로 향하고 조준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전방경계에 몰두하고 있었다.

“미안하군.”

안 상사는 그런 그에게 사과를 했다. 지금 해 두지 않으면 앞으로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안 상사의 사과를 들은 정의성 상사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안 상사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팔을 뒤로 돌려 군장을 뒤져 칼로리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박종연이가 챙겨 준거니 이건 다 먹죠. 자기는 굶었는데, 다 안 먹고 남겼다고 투덜거릴 테니. 마침 두 개 남았군요.”

안 상사는 그가 내민 칼로리바를 받아 들었다.

“……이걸 먹었다고 때깔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군.”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껍질을 벗기며 박종연 중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뛰어난 실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박종연을 그저 가벼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 상사도 그의 그런 실없는 농담에 적응을 해 버렸다.

언제나 그의 농담을 무표정하게 무시했지만, 어느 사이, 그의 농담에 약간씩은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는 했었다.

생각해 보면 작전을 진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진도 팀원과 특별히 교류하지 않는 안 상사가 유일하게 술잔을 기울였던 인물이 박종연이었다.

한번 모시겠다고 싸구려 선술집에 데려가 안주를 엄청나게 시켰더랬지.

안 상사는 칼로리바를 입에 넣었다. 특유의 퍽퍽하면서도 뭔가 기분 나쁜 식감임에도, 입에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침샘이 자극되었다.

박종연은 칼로리바를 먹을 때 그냥 먹는 법이 없었다. 꼭 뭐라도 한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국방부와 보급단, 그리고 정보사 이 개썅놈들은 일부러 가장 쓰레기 같은 맛을 골랐을 거야! 작전 중에 맛있는 거 배 터지게 처먹고 나태해지지 말라고! 아주 고오맙습니다! 씨바랄.

그의 농담을 떠올린 안 상사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살짝 올라갔다.

팀장님을 잘 모시고 가고 있는지 모르겠군.

안 상사는 한규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로 조사를 위해 절벽에서 막 뛰어내리려던 그에게 들리는 것이 없는지 물었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한규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 상사도 알고 있었다. 그가 듣는 그 소리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것을.

6년 전에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 상사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환청 취급 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청이라는 증상은 정보사의 진폐증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보사 침투 팀원에게는 흔한 증상이었다.

과도한 긴장 상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업무 특성상, 정신은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 상사는 자신에게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환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청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였다. 환청이라고 인정하는 그 순간, 아내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었다.

존재하고 있다. 아내는 어떠한 방식으로는 그의 곁에 존재하고 있었고, 말을 걸어 주고 있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유령이든, 귀신이든, 원한을 가진 악령이든 상관없었다. 아내가 그의 곁에 있고, 그에게 말을 걸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안 상사는 아내의 목소리가 환청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인정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랬던 안 상사가 처음으로 한규호에게 물어보았다.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으려 했다.

한규호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직감이라는 비과학적인 특기로 진도 팀에 배치된 한규호가 혹시나 어떤 영감(靈感)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아내가 영적인 형태로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으려 한 것이다.

한규호에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신뢰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한규호가 들어 준다면, 그래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규호는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했다.

상관없다.

안 상사는 실망하지 않았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확신하고 있다. 타인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북한군이 이제 행동을 보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적지를 누비며 살아온 그는 알 수 있었다. 조만간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다가왔을 때, 그때가 마지막 교전이 될 것이다.

6년 만인가?

야속하게도 꿈에서조차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아내를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눈밭 위를 낮은 포복으로 이동해 적들이 숨어 있는 계곡 뒤쪽으로 숨어 들어간 535의 이두협 상사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상태에서 계곡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계곡의 작은 그림자 안에서 숨어있는 두 사람을 확인했다.

두 명이었다니.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고작 두 명이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분대 하나를 처리했다니.

항상 공화국의 전사들이 남조선의 개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이두협 상사는 작게나마 충격을 받았다.

저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된 휴식이나 보급 없이, 한겨울과 다름없는 함경북도의 고지대를 걸었다.

그것도 그들을 쫒아오는 추적대를 뿌리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몇 개나 되는 산을 넘으면서.

이두협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체력적인 부분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런 한계 상황에서, 제압사격을 받으면서, 정밀한 조준 사격으로 분대 하나를 그 짧은 시간에 처리했다는 사실은 실력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훈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직 실전, 그것도 목숨을 건 실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까지 혼자 오길 잘했군. 다른 누군가를 데려왔다면, 분명 그들에게 기척을 발각당했을 테니까.

당에서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직속상관은 무리하지 말라고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지만, 당에서 내려온 명령은 생포하라는 것이었다.

생포할 수 있으면 생포하고 싶었다. 이두협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535의 명예와 그가 모시는 상관의 명예를 위해서 당의 명령을 수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을 생포할 수 있을까?

생포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희생되는 아군의 수를 생각한다면 실익이 없었다.

저놈들이 가진 총알은 몇 발이나 남았을까? 저놈들의 총알이 전부 마르려면 얼마나 많은 인민군 전사들이 희생되어야 할까?

이두협은 마음을 정했다.

생포는 포기. 시신만 들고 간다.

이두협은 최대한 천천히 총을 견착했다. 혹시라도 저기에 있을 괴물들이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두 사람 중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겨누었다.

조준선을 정렬하고.

숨을 참고.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

안성종 상사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총 발사음을 듣자마자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엎드려 있던 자세에서 눕는 자세로 순식간에 몸을 돌려 계곡 위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적의 살기를 느끼는 맹수의 본능으로 그는 몸을 뒤집고 총구를 움직여 계곡 위를 조준한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오늘 안 상사를 보호하기로 한 듯, 그의 조준경에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적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 한 번에 조준만으로 적을 찾아낸 것이다.

오늘은 진짜 이상한 날이군.

그런 생각을 하며 안 상사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곧이어 조준경 너머로 계곡 위에서 그들을 겨누고 있던 북한군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안 상사는 다시 몸을 한 바퀴 더 굴렸다. 그러면서 빠르게 계곡 위쪽을 스캔했다.

그에게 남겨진 행운의 동전을 모두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계곡 위에 있던 적은 단 한 명뿐이었는지,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대신 전방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가 계곡의 좁은 틈을 타고 들어와 진동했다.

두 발의 총 소리가 고요한 산지의 적막을 깼고, 그리고 한동안 계속되었던 소강상태도 깨 버렸다.

안 상사는 다시 몸을 반 바퀴 돌려 엎드린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의 눈에 여러 방향에서 그를 향해 돌격해 들어오는 북한군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시 조준경에 눈을 붙이고, 조준 사격을 하려던 안 상사는 작게 숨을 내쉬고 조준경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정의성 상사의 총구는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정면을 향하지 않았다.

총알이 관통한 뒷목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그의 목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안 상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전우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다시 만나면 그때 제대로 사과하마. 먼저 가 있어라.

안 상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북한군들이 달려오며 외치는 고함 소리, 그들이 발사하는 총소리와, 총소리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와 소리의 작은 틈 사이로, 오직 안 상사만이 들을 수 있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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