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55화 (156/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8)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무산군 큰민봉 북서쪽 사면.

백금산역 북북동 141km 지점.

한규호는 내늑간근을 수축시켰다.

늑간근이 수축하면서 그 반동으로 횡경막이 이완되었고, 횡경막이 이완되면서 폐가 수축했다. 그리고 몸 안에서 데워진 숨이 기관지를 지나 입에서 김의 형태로 뿜어져 나왔다.

더운 숨을 뱉어 낸 한규호는 자연스럽게 차가운 공기를 폐 속 가득 받아들였다.

잔뜩 얼어붙은 냉기가 기관지를 지나 폐포에 도달했다. 그 느낌이 마치 차가운 얼음 결정들이 기관지를 긁고 나아가는 것 같았다.

한규호는 그 느낌을 참아 내면서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산소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진도 팀은 평소보다 더 지체된 이동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눈은 거의 그쳤지만, 밤새도록 내린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쌓인 눈의 높이가 발목을 넘어서면 더 이상 눈 위를 걸어갈 수 없었다. 헤치고 나아가야 했다.

그 말은 선두에 서서 팀을 이끄는 사람에게 걸리는 부하가 평소보다 몇 배 이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선두에 걸리는 부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진도 팀 네 명은 번갈아 가며 선두에서 팀을 이끌었다.

한규호는 약 2시간 전부터 선두에 서서 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눈을 헤치고 나아감으로써 뒤따르는 팀원들은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선두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이 방식은 자전거 팀 레이스와 비슷했다. 선두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면서 선두가 감내해야 하는 공기저항의 부하를 최소화 하는 방식과 동일한 의도라는 점에서.

다만 공기와 달리 쌓인 눈이 주는 부하의 강도가 훨씬 어마어마하고, 무엇보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 팀 레이스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동상이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 선 한규호는 자신이 동상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따끔하던 발가락에 더 이상 어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지 않는다기보다 마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고의 방수 기술이 적용된 미군의 고어텍스 전투화도 이런 눈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신체를 단련해도 동상은 어쩔 수 없다.

자르게 될까?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상에 걸려 괴사한 발가락을 잘라 내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한규호에게는 첫 경험이 되겠지만.

발가락으로 끝났으면 좋겠군. 발가락에서 발목까지의 거리는 고작 10여 cm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고작’이라는 단어로 끝나지 않는다.

한규호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집중하자. 지금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눈을 헤치며 나아가는 그에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다. 뭔가 생각에 집중하고 있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소리였다.

그러나 소리 특유의 확연한 특징을 가진 소리가 그의 고막에 잡혔다.

환청?

한규호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환청일까? 환청이 아닐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그래서 감각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한규호는 자신에 고막에 포착되는 소리가. 헬리콥터의 로터가 회전하는 특유의 소리가 환청이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무산군 큰민봉 서쪽 사면.

백금산역 북북동 136km 지점.

무산군 큰민봉 서측 사면에서 80년대 초반, 구 소련에서 제작된 Mi-8이 호버링을 하고 있었다.

맑게 갠 하늘, 하얀 눈에 반사되는 햇빛과 눈으로 완전하게 덮여 있는 큰민봉을 배경으로 하늘 위에서 호버링을 하고 있는 오래된 헬리콥터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서용석은 헬기 창문 밖으로 큰민봉을 보고 있었다.

과도한 벌목으로 나무 하나 남아있지 않은 민둥산이지만, 그렇기에 눈 덮인 봉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조국의 산천은 언제나 경애의 대상이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이유로 이곳에 왔다.

서용석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략 15m 아래, 설원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용석이 지정한 경로를 따라 탐색하다 눈밭에 난 발자국을 발견한 535정찰대 3팀이었다.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그들의 무릎 아래로는 눈 때문에 보이질 않았다.

고생들 했겠군.

서용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에 앉아 있는 대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기 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대원은 서용석의 끄덕임에 반응해 헬리콥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로터가 돌아가는 소음이 더욱 강하게 기내를 진동시켰다.

서용석은 이 진동과 소음을 좋아했다.

강하를 위해 헬리콥터의 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과 진동하는 소리는 언제나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문을 연 대원이 강하용 밧줄을 늘어트렸다.

서용석은 손짓으로 강하 지시를 내린 후, 제일 먼저 강하하기 위해 로프를 잡았다.

로프를 잡은 그는 몸을 날리기 전에 고개를 돌려 헬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박철 상사를 비롯해 몇 명의 535부대원들이 보였다. 서용석이 강하면 바로 그를 따라 강하해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용석의 시선이 기장 뒤 좌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향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의 얀 베르그만 회장.

미국의 경제 제재로 어려움에 처한 공화국에 핵연료 추출용 원심 분리기를 제공한 은인, 최고 존엄이 직접 맞이하는 손님, 그리고 서용석을 따라 이곳까지 온 미친 늙은이가 겨울용 코트를 입고 앉아 있었다.

따라오시지요. 1호 손님.

서용석은 속으로 살짝 웃은 후 로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풀었다.

그의 몸이 15m 높이에서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몇천 번을 뛰어내려 본 그에게 강하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익숙했다. 거기에 밤새 내린 눈이 쿠션 역할까지 해 주면서 서용석은 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강하를 마쳤다.

서용석이 강하를 완료하자 대기하고 있던 3팀 팀장이 다가왔다.

“저쪽입니다.”

경례도 없이 그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서용석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온통 하얀색으로 덮여있는 가운데 유독 두드러지게 나 있는 흔적, 누군가가 눈을 헤치고 나아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흔적은 헬기에 탑승한 상황, 2차원 평면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 같은 높이에서 3차원 입체로 봤을 때만 찾아 낼 수 있는 흔적이었다.

서용석은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 때문에 걷는 것이 쉽지 않았다.

좋군.

힘주어 눈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서용석은 생각했다. 이 눈은 지금 도망치고 있는 쥐새끼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남겨진 흔적은 대략 2~3시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직도 눈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고, 서용석과 그 부대원들은 쥐새끼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을 따라 조금 더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잡았군.

서용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흔적을 눈으로 흝었다.

두 명? 세 명? 적어도 두 명 이상.

흔적을 확보했고, 방향을 알았다. 정보도 수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냥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한 명만 살려 두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서용석의 청각에 부대원들이 헬기에서 강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용석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보였다.

두꺼운 모직 코트를 펄럭이며, 로프를 타고 강하하는 1호 손님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무산군 큰민봉 북서쪽 사면.

백금산역 북북동 142km 지점.

한규호는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달되어 오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같은 속도로 눈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환청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지금 진도 팀에게 필요한 것은 어서 빨리 몸을 빼내는 것뿐이었다.

지금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팀원들을 바라본 다음, 지금 그 소리가 들립니까 하고 확인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X발, 죽으면 죽는거고.

한규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서는 다시 한번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발끝에 힘을 주어 눈을 밀어 냈다.

그런 그의 의식에 갑자기 안 상사가 떠올랐다.

-들리나?

아흐레 전, 백금산역 북동쪽 철로 환경 정찰 지점에서, 절벽에 레펠용 로프를 늘어트려 놓고 막 몸을 던지려던 찰나에 안 상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참을 북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그가 했던 말.

-들리나?

철로 정찰을 마치고 다시 절벽을 올라갈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더랬지.

-들리는 것이 있나?

한규호는 당시 안 상사가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환청은 드문 경험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를 은퇴시켜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안 상사가 듣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무엇을 들었을까? 무엇을 들었기에 질문을 한 것일까?

궁금하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때 물어봐야겠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어보려면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군.

안 상사 그 괴물이 그냥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올 것이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때 찌개 하나 두고, 소주 마시면서 물어봐야겠군.

뭐가 들렸는지.

뭘 들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또 한번 앞으로 나아가려는 한규호의 어깨를 무언가가 잡았다.

한규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박종연 중사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교대?

“아직 괜찮습니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박종연의 손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한규호.”

박종연이 소릴 내어 한규호를 불렀다.

한규호는 그 손을 털어 내기 위해 몸을 돌리면서, 아주 약간의 짜증을 섞어서 말했다.

“아직 괜찮다니까요. 조금 더 가서 바꿔 주…….”

그러나 한규호는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상당히 뒤처진 윤재운 중사가 눈밭 위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부령군.

백금산역 북북동 147km 지점.

535부대 정찰대 소속 이두협 상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 서용석 대장의 명령을 받고 바로 이곳으로 온 이두협 상사는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 부채꼴 모양으로 차단진을 펼쳤다.

서용석에게 교육을 받은 이두협은 절대로 적을 경시하지 않았다.

적들은 항상 최고의 상황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하고, 차단진을 필요 이상으로 넓게 펼쳤다.

그런데 그 필요 이상으로 넓게 펼쳐진 그 끝에서 겨우 잡아낸 것이었다.

동쪽으로 향하던 쥐새끼들은 26일 자정부터 27일 새벽까지 네 번의 교전을 진행했다.

마지막 교전 지점에서 지금 그들이 발견된 이곳까지의 거리는 눈 내리는 산맥을 하룻밤 사이에 걸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남쪽의 정예 특수부대라고 하더라도,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고통받으며 산악 지형을 행군해 왔을 그들이 하룻밤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절대 아니었다.

이두협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빨리 병력을 이동시키고, 예상 경로를 찾아내고,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리고 탈출 경로를 전부 차단해 버렸다.

더 이상 도주가 힘들다고 생각한 쥐새끼들은 어느 작은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계곡의 좁은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었다. 그들이 도망칠 방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서용석의 경고대로 독 안에 든 쥐는 독이 바싹 올라 있었다.

제압사격을 하면서 분대 하나를 접근시켰는데, 잔뜩 몸을 낮추고 접근하던 십여 명의 분대가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전멸해 버렸다.

이두협 그 자신도 535부대에서 혹독하다면 혹독하다는 훈련을 받았고 전투력에서도 535부대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곡 안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의 사격 실력은 경탄이 나올 정도였다.

몇 명이나 있는지 몰라도, 제압사격을 당하는 와중에 조준사격으로 분대 하나를 1분 만에 처리하는 것은 그도 자신이 없었다.

한편 제압사격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탄약이 넉넉지 않은 상황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인민군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제압사격과 돌입을 계속 반복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돌입하는 방법이었다.

몸으로 때워 가면서,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적의 탄환을 소모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군관 놈들이라면 하전사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렇게 돌격 명령을 내렸겠지만, 이두협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이두협 그 스스로가 하전사 출신이라 총알받이가 될 하전사들에게 연민을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추구하는 전투의 미학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관이자 스승인 서용석 특무상사도 그런 추악한 방법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용석에게서 가능하면 생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 안에 든 쥐는 놔두면 힘이 빠진다.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두협은 마냥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비겁한 방법이었고 535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계곡에 있는 저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해 주고 싶었다. 그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단한 놈들이었다. 절대적 열세의 상황에서 총알 몇 발로 포위하고 있는 병력들의 몸과 마음을 묶어 버렸다.

이두협은 지시를 내렸다.

전부 지금 위치를 지킬 것. 적의 모습이 보이면 사격, 그 이전에는 움직이지 말 것.

그렇게 지시를 내린 이두협은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그들이 숨어 있는 계곡 위를 향해 포복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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