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54화 (155/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7) >

2006년 11월 28일.

함경북도 무산군 큰민봉.

백금산역 북북동 134km 지점.

선두에서 팀을 리드하던 진도0 이규철은 이동속도를 조금 늦추며 숨을 골랐다.

자정이 지나기 전부터 시작된 눈이 빠른 속도로 쌓이고 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함박눈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안성종 상사가 벌어 준 시간이 허비되고 있었다.

최악이군.

이규철은 숨을 고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시선은 발끝을 향해 있었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쌓인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발밑에서 압축되었다.

바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리는 눈은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공기에 흐름에 가볍게 흔들리며 쌓이고 있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바람이 잦아 눈보라로 확대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진도 팀에 있어서 이 상황은 눈보라보다 좋지 않았다.

차라리 시야가 제한되면 눈보라였다면 오히려 탈출에는 유리했다. 이동이 힘들어지지만 그건 추적해 오는 북한군들에게도 마찬가지니까.

무엇보다 흔적을 지울 수 있다.

눈은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추격조를 피해 몸을 빼내야 하는 진도 팀에게 흔적을 남기는 것은 가장 치명적이다.

지금처럼 발목까지 쌓이는 눈이라면 진도 팀이 남긴 흔적은 더욱 선명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발끝을 바라보던 이규철은 고개를 들어 다시 눈앞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 최악은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적설량이 계속 유지된다면, 진도 팀이 남긴 흔적은 그들이 지나가고 1~2시간 후에 새로 내린 눈에 덮여 버릴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눈발이 잦아지는 것이다.

흔적이 남고, 눈발이 잦아들고, 내리는 눈이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 진도 팀에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기후 변화가 심한 개마고원의 고지대였다.

소복소복 내리는 이 눈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몰아치는 눈보라로 바뀔지, 아니면 잦아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내리는 이 눈도 이상기후라면 이상기후라고 할 수 있었다.

개마고원은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규철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 멍청아! 왜 북쪽에는 무조건 눈이 많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개마고원은 격해도가 높고 특히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가장 눈, 비가 안 내리는 지역이라고, 소우지라고! 몇 번씩 이야기했잖아!

몇 년 전이었을까? 정지혜가 아직 고등학생이던 시절,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과외 학생과 선생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타박하는 자신을 보면서 헤 하고 웃던 여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규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사위를 감싼 어둠 속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한 줄기 빛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 가야지. 살아서 돌아가야지.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아서 가자. 살아서 그녀에게로 가자.

이규철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에 다시 한번 힘주어 앞으로 뻗었다.

***

발목을 넘어선 눈 때문에 진도 팀의 이동속도는 더욱 느려지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소모가 너무 컸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최대한 버티고 있다고 해도 진도 팀은 체력적으로 조금씩 한계에 다가서고 있었다.

이규철의 결정에 따라 진도 팀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멈추었다. 길게 쉬지는 못해도 영양 공급이라도 할 시간동안만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눈 때문에 앉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무에 기대 숨을 고르던 한규호는 군장에서 칼로리바를 두 개 꺼내어 그중 하나를 박종연에게 건넸다.

칼로리바를 건네받은 박종연은 말없이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규호도 칼로리바를 입에 넣고 씹었다.

유난히 퍽퍽하게 느껴지는 식감이 안 그래도 잔뜩 말라붙어 있는 입안에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몇 개 남았냐?”

박종연 중사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정면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한 개.”

한규호가 답했다.

대답을 들은 박종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씩 잦아지는 눈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칼로리바를 씹어 삼켰다.

박종연은 자신이 가진 칼로리바 전부를 안 상사와 정 상사에게 넘겼다.

그래 봤자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며칠분의 식량을 전부 그들에게 넘겨 준 것이었다.

박종연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성적으로 판단했어야 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박종연은, 진도 팀원들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11챠리를 발동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미끼가 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북한 땅을 밟은 사람들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다시 한번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박종연은 맛없는 칼로리바를 천천히 씹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칼로리바를 씹고 있는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진지함을 보고 있었다.

박종연의 재미없는 농담이 끊긴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안 상사와 정 상사가 그렇게 떠나간 이후, 그는 유난히 더 말이 없었다.

박종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그 어이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뀨.”

한규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종연이 그를 불렀다.

“뀨라고 부르지 마십쇼.”

한규호는 조금은 반가운 마음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한 개 남은 거 나 주라.”

박종연이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

한규호는 대답 없이 평상시 그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개소리 하지 마십쇼.’ 그런 눈빛으로 박종연을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자 박종연은 한규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그 눈빛을 보고서 박종연은 피식하고 웃었다.

“너 지난번에 작전 끝나고 뭐 먹었냐?”

박종연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하며 물었다.

한규호는 잠시 머릿속을 더듬었다.

뭘 먹었더라? 지난 훈련이 끝나고?

“음…… 짜파게티?”

기억을 더듬어 한규호가 말했다. 그때 먹은 짜파게티를 생각하자 입에 침이 고였다.

언제나 그랬다.

작전만 끝나면 정말 비싼 음식을 다 먹지도 못하고 시켜 놓고 먹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막상 작전이 끝나면 항상 저런 것들을 제일 먼저 찾고는 했다.

분식집 라면, 특색 없는 잔치국수, 얼큰한 수제비, 동네 식당 된장찌개, 김밥천국 스페셜 정식 같은 그런 흔한 음식들을 제일 먼저 찾곤 했었다.

“이번에 끝나면 뭐 먹을 거냐?”

박종연이 물었다.

한규호는 잠시 고민했다. 뭘 먹을까? 돌아가면 뭘 만찬으로 할까?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음식 대신, 안성종 상사, 정의성 상사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음식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처럼 느껴졌다.

“만두.”

한규호가 말했다.

한규호의 대답에 박종연은 한동안 말없이 칼로리바를 씹고 있었다.

“어떤 만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박종연이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돌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 만두를 먹겠느냐고 묻는 그의 얼굴에서도 음식에 대한 욕구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아무거나, 그냥, 뭐.”

그 대답에 박종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아무거나, 그냥, 뭐.”

“어쩔 겁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뭘?”

“복귀하면 뭐 먹을랍니까?”

“복귀……하면……. ”

박종연의 시선이 천천히 눈 내리는 하늘로 향했다.

“그냥…… 찌개나 하나 시켜서…… 소주나 마시고 싶네.”

한규호의 시선도 그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괜찮군요.”

두 사람은 말 없이 하늘을 바라 보았다.

칼로리바도 다 먹었다. 이제 슬슬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한 번 있었지.”

박종연의 뜬금없는 말에, 한규호의 시선이 다시 박종연을 향했다.

“안 상사, 그 노인네랑 작전 끝나고, 찌개에다가 소주를 마신 적이 딱 한 번 있었지.”

“안 상사님…… 술 마십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뭐 그래 봤자 한두 잔 정도. 알잖아, 어떤 사람인지.”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에, 그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윤재운 중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날 기분이라고 안주를 좀 과하게 시켰는데, 그 양반이 결국 한마디 하더군. 다 먹지도 못하면서 뭘 그렇게 시키냐고. 나는 그래도 기분을 좀 내고 싶기도 했고, 또 뭐랄까. 대접한다? 살가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난 그 양반 좋아했으니까, 뭐 이것저것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데, 그렇게 말하니 좀 섭섭하달까. 그런 마음이 들더군.”

진도 팀의 모든 사람은 박종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날 그 양반은 내가 과하게 시킨 안주를 다 먹고 갔어. 술도 안 마시면서 말야. 천천히,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그 음식을 다 먹더군. 왜 그랬는지 몰라. 그냥 야 이 멍청한 놈아 하고 그냥 가면 될 것을, 미련하게 그걸 다 먹었다니까. 평상시엔 제대로 먹지도 않는 양반이 말이지.”

한규호는 안성종 상사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도 선비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천천히, 그리고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칼로리바를 먹고 있으니 그냥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어. 제대로 식사 대접 한번 한 적 없구나. 기껏 한 번 모신 게 고작 그 정도뿐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냥, 그래서.”

그 말을 끝으로 박종연은 기댄 나무에서 몸을 떼어 냈다.

“다시 이동한다.”

기다렸다는 듯 이규철 대위가 말했다.

한규호도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등을 떼어 냈다.

돌아가면 뭘 먹을까? 힘든 작전 상황에서 언제나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

2006년 11월 28일.

연사 소학교.

함경북도 연사읍.

서용석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시작된 눈이 밤새도록 내리고 있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눈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해가 뜨고, 동쪽 하늘에는 여명이 찾아왔을 시간임에도, 하늘을 뒤덮은 회색빛 눈구름 때문에, 아직 어둠은 그 세력을 지켜 내고 있었다.

서용석은 여전히 그 창밖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잦아졌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고 있었다.

눈이 잦아졌다. 그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박철 상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견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던 서용석의 시선이 천천히 박철 상사로 옮겨졌다.

“북쪽입니다. 3팀이 30분 전에 쌓인 눈 위에 난 발자국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인원은 최소 세 명 이상, 발자국 깊이를 봤을 때 무장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3팀이 발자국을 따라 추적 중에 있습니다. 3팀과 가장 가까이 있는 2팀이 3팀의 추적 경로로 이동하고 있고, 4팀과 5팀은 기존 수색 경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용석은 그저 고개를 돌려 박철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박철은 서용석이 원하는 내용을 전부 알려 주었다.

얼마나 되었더라, 이 친구와 함께한 지가? 이번 작전이 끝나면 은퇴해도 괜찮겠군.

서용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쥐새끼의 꼬리를 잡은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가서 잡으면 된다. 아니, 잡아야 한다.

“어떻게 합니까?”

서용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철은 고개를 돌려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1호 손님이 있는 임시 응접실 쪽이었다.

“어떻게 할까?”

서용석은 박철에게 물었다.

박철의 시선이 서용석을 향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를 모셨지만 이렇게 질문을 해 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태우고 갑니다. 뛰어내릴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박철이 답했다.

인간 사냥을 보고 싶어 하는 저 추악한 늙은이를 같이 헬기에 태운다. 서용석과 떨어지지 않겠다고 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쥐새끼들이 도망치는 그곳에 도착하면 서용석을 비롯한 535대원들은 밧줄 하나에 매달려 강하를 할 것이다.

복도 너머의 저 늙은이가 공화국 최고의 사냥 솜씨를 보고 싶다면 그도 밧줄 하나에 매달려 뛰어내려야 할 것이다.

535는 당의 명령대로 그를 데려간다. 따라올지 말지 선택은 그가 할 것이다.

서용석의 입가가 오랜만에 약한 웃음을 담았다.

“가자, 사냥하러.”

서용석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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