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1) >
2006년 11월 24일.
합류 포스트 북서쪽 15km.
진도5 안성종 상사는 낮은 목소리로 그간의 경과보고를 이규철 대위에게 하고 있었다.
정찰지점에서 철로를 조사하고, 열차를 기다리다 전조등을 끈 열차를 포착했다는 것. 그리고 그 열차가 태양호로 강하게 의심되어 작전 계획보다 더 이른 시간에 합류 포스트로 이동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추려서 빠르게 보고했다.
합류 포스트에 도착하고 8시간 거리를 마중 나왔고, 그곳에서 발생한 첫 번째 접촉을 처리했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이규철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외부 경계를 하는 한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신경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한껏 낮춰진 안 상사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기에 안 상사가 그동안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끼가 되어서 이규철 대위를 위험에서 보호하려고 했던 안 상사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한규호의 걱정과는 달리 이규철 대위는 안 상사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안 상사 팀이 계획에 따라 철도 정찰 지점에서 40시간을 대기하다 합류 포스트로 이동하던 와중에 합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규철은 안 상사의 짧은 보고를 듣고 상황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안 상사가 왜 계획 시간보다 빠르게 정찰 지점을 떠났는지, 왜 마중을 나왔는지, 그리고 왜 몸을 피하는 대신 수색조를 처리하고 엉뚱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는지, 안 상사의 의도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짧지만 중요한 내용은 모두 들어 있는 보고가 끝나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 상사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진도0을 만난 이상 작전과 관련된 모든 결정은 다시 진도0이 담당한다. 진도5는 그저 진도0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부터 모든 결정을 해야 하는 이규철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는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과 정보는 부족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계속 북으로 갑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규철 대위였다.
안 상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수색 개시와 더불어 퇴로 차단을 동시에 진행했을 것이다. 동해 탈출 루트는 막혔다고 보는 것이 좋았다.
아니, 확실히 막혔다.
작전은 도박이 아니다.
에이스 두 장을 들었다고 해도 세 번째 에이스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로 판돈을 올려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판돈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퇴각 방향이 결정되자 두 사람은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최대한 멀리 움직일 시간이었다.
“이동한다. 작전 대형으로.”
이규철의 명령을 들은 진도 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작전 대형에 따라 안성종 상사가 선두에 섰다.
한규호는 나쁜 생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살짝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도 팀이 다 모였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잔뜩 얼어붙은 11월의 공기가 그의 폐 안을 가득 채웠다.
괜찮다. 어떤 상황이든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폐 속에서 데워진 숨을 내뱉는 그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눈.
그동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안 내리던 눈이 막 시작한 것이었다.
한규호는 손을 뻗어 내리는 눈을 손으로 받았다.
장갑 위에서 잠시 그 결정을 유지하던 눈은 금세 녹아 사라져 버렸다.
***
2006년 11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인민위원회.
535정찰대를 이끄는 서용석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평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한참 무언가를 쏟아 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엇보다 독단적인 행동은 용납하지 않소. 모든 결정은 우리가 직접 할 것이오. 상사는 사령부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오.”
호위사령부 모남도 상좌가 매서운 눈으로 서용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호위사령부의 전문을 받고 바로 헬기를 타고 길주군 인민위원회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문에는 가려진 ‘XXX 상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호위사령부 호위총국 제4호위부의 모남도 상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상사에게 아주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당과 조국을 실망시킨다면, 그 책임은 단순히 상사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말이오.”
서용석 옆에 서 있는 535의 박철 상사는 모남도의 건방진 말투에 살의가 척추 끝에서 스멀스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상관의 명령만 있다면 당장 멱을 따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남도는 국가안전보위부 8국 차장인 모지철의 셋째 아들이었다.
보위부 차장이라는 모지철의 지위도 물론 중요했지만 했지만, 모지철이 가지는 더 큰 의미는 그가 김정일과 함께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다.
소위 ‘룡남산 줄기’ 중 한 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모남도도 같은 ‘룡남산 줄기’가 되었다.
물론 박철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박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과 조국, 백두 혈통, 그리고 서용석 그뿐이었다.
그 넷 중 하나인 서용석의 명령만 있다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그저 아버지를 잘 타고난 저 어린놈의 새끼의 목을, 말을 함부로 하는 입을 찢어 버릴 수 있었다.
박철은 서용석을 돌아보았다. 그의 상관에게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바라면서.
그러나 서용석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눈앞에 앉아 있는 호위사령부 상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서용석은 오랜만에 웃고 싶은 기분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라도 짓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서용석이 어이없어 하는 이유는 모남도가 특무상사인 자신을 상사로 격하해 부르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상좌 주제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신에게 건방지게 말을 해서도 아니었다.
거만한 표정으로 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아 모남도가 서용석에게 말한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호위사령부의 지시에 따를 것.’
호위사령부는 정찰총국 휘하 병력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정찰총국 병력을 활용해 공적을 쌓을 수 있는,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강조하고 강조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명령에 어이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용석이 어이없어하는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세부적인 지시 사항 때문이었다.
‘백금산 역에 대해 눈치챘을 수도 있는 적을 끝까지 추적해 ‘생포’할 것.’
서용석은 호위사령부 놈들이 535가 실패하기를, 더 나아가 535 병력을 줄이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침투한 쥐새끼들이 남조선 정보사의 개들이라면 ‘생포’라는 단어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개념이 없는 호위사령부라고 해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저 멍청한 놈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책상에 앉아 있는 놈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헛웃음을 짓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적을 생포해 오라는 명령 때문도 아니었다.
“상사, 어째 대답이 없소?”
모남도가 다시 물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서용석은 모남도의 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적을 추격하고, ‘생포’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어라?”
서용석은 모남도를 바라보며 그가 받은 명령을 다시 떠올렸다.
‘1호 귀빈이 생포 작전을 참관할 것이니, 경호에 각별히 유의하면서 공화국 군대의 우월성을 보여 줄 것.’
서용석은 왜 이 어린놈이 이곳에 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일곱 개 호위부로 구성되어 있는 호위사령부 1국, 4호위부는 외국 수반 및 중요 인물, 소위 1호 귀빈이라고 불리는 최고 존엄의 손님들을 경호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 4호위부의 모남도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평양으로 보내 버렸던 외국 놈의 경호를 위해서, 서용석이 백금산에서 평양으로 보내 버린 크레딧 유로파의 얀 베르그만 회장이 다시 이곳으로 오기 때문에.
모남도는 서용석이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상사! 지금 상사는 당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오?”
모남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모남도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관련, 서용석은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랑이 앞에서 개가 짖어 봤자다.
서용석은 그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할 뿐이었다.
평양으로 간 그 양놈이 최고 존엄에게 요청을 했을 것이다.
작전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아무리 1호 귀빈이라고 해도, 군사작전을 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허락해 주었을까?
허락해 주었을 것이다. 단서가 붙는다면.
535부대원 중 몇 명을 경호원으로 쓰고 싶다.
거금을 주고.
그렇기에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다.
그런 조건이 붙어 있다면 계좌 동결로 자금줄이 막힌 평양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상사! 대답해 보시오! 지금 당의 명령에 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요!”
서용석의 대답이 없자 우위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남도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서용석의 시선은 그 손가락을 향해 있었다.
꺾어 버릴까?
535부대원에게, 서용석에게 해외에 나가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가혹한 훈련으로 인간 병기라는 소리를 듣는 북한군 특수부대를 원하는 곳은 많았다.
서용석 또한 당의 명령을 받아 이라크로, 아프가니스탄으로, 아프리카로 날아가서 군대를 키우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없었다.
“상좌.”
서용석이 입을 열었다.
소리를 지르던 모남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가 자신의 계급에 ‘님’자를 빼 놓고 말했다는 사실보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강력한 기운이 더 먼저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소리 지르지 마시오.”
서용석이 말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모남도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특무상사 주제에 상좌인 자신의 계급을 ‘님’자도 없이 부른 것도 모자라, 조용히 하라고 명령조로 말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본능은 서용석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앉으시오.”
서용석이 말했다.
모남도의 본능은 그 말에 따르라고 하고 있었지만, 그는 참아 냈다. 그리고 선 채로 최대한 온몸의 힘을 줘서 서용석을 노려보았다.
“당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오. 그저 확인할 뿐이지.”
모남도는 서용석이 그렇게 말하자 몸에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한풀 꺾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그 ‘귀빈’이 다시 여길 찾는다. 그리고 그 ‘귀빈’에게 적을 찾아 생포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팔릴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증명하라. 그런 말 아닌가?”
모남도는 서용석의 말이 짧아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서용석의 말투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분노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듣기엔 호위사령부가 지시가 그런 이야기 같은데. 맞나?”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