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13)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백금산역.
백금산역 플랫폼.
지루한 인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비굴한 표정의 그들은 자신들이 인사를 하고 있는 외국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알았다 해도, 그들에게는 그 외국인이 원심분리기를 제공한 것이나, 세계구급 투자은행인 CE의 회장이거나, 부총리가 의전을 담당하고 있거나 하는 부분은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태양호를 타고 왔다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서용석은 외국인을 뒤따르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십여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과 악수를 하면서, 그는 단 한 번도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감정 없는 눈과 감정 없는 얼굴로 여전히 같은 악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서용석은 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평생을 군에서, 그것도 특작부대에서 사람을 죽이며 살아온 서용석에게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신경이 쓰였다.
“누추하지만 쉬실 곳을 마련했습니다. 일단 쉬시고, 내일 시찰하시도록 하시지요.”
도열한 사람들과의 인사가 끝나자 김봉 소장이 재빨리 베르그만 회장에게 붙어서 말했다.
베르그만 회장이 직접 데려온 통역의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김봉 소장을 따라 임 부총리와 함께 걸어갔다.
서용석은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검은색 군복을 입고 도열해 있는 군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플랫폼에 도열해 있던 검은옷을 입은 535정찰대 소속 상사 둘이 민첩하게 베르그만의 뒤에 따라 붙었다.
서용석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오늘 귀빈을 지키는 임무는 저 둘이 담당할 것이다.
귀빈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플랫폼에 도열해 있던 대좌(대령)가 서용석에게 다가와 경례를 붙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대좌 박호경입니다!”
서용석은 고개를 살짝 까딱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백금산역과 인근 시설 지역의 경계를 담당하는 부대의 지휘관인 대좌가, 특무상사에 불과한 서용석에게 다가와 경례를 붙인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서용석에게 계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경계는?”
서용석이 물었다.
“안에서 보고드리겠습니다.”
대좌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짧게.”
서용석이 다시 말했다.
대좌는 잠시 주저했지만 바로 표정을 원래대로 바꾸고 플랫폼에 선 채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경계 지대 범위, 주요 접근로, 접근로에 설치된 초소 등등에 대해 최대한 핵심적인 사항만을 보고했다.
“마지막으로 연구소를 중심으로 반경 1km 이내에 동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약 10여 분간의 브리핑을 서서 들은 서용석은 대좌의 눈을 보았다.
출신 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나왔을 것이다.
그 정도 성분이 아니고서야 이곳에서 경계부대장을 맡을 수는 없겠지.
이렇게 병신 같은 경계 계획을 가지고서 말이다.
서용석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였다.
“명단.”
서용석이 말했다.
“네?”
대좌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명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네!”
그제서야 이해한 대좌가 크게 대답했다.
“필수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 전부 대기.”
“넷!”
“그리고.”
“넷!”
“한 번만 더 그렇게 큰 소리 내면 죽는다.”
서용석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
2006년 11월 20일.
백금산역 동쪽 12km 지점.
“일단 여기.”
함경남도와 북도 경계를 지나 얼마 안 가서, 어느 이름 없는 야산의 한 계곡에 도착한 진도0 이규철 대위는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고 판단했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계곡이 깊었다. 계곡으로 접근하는 길도 하나뿐이었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이미 남동쪽에서 떠오른 11월의 태양은 온 세상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계곡이 깊어 태양빛이 스며들지 않아 숨어서 낮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규철은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 2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더 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해가 떴지만 산맥은 깊었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이곳에다 동초 시신을 버려두고, 조금만 더 나아갈까 고민했지만, 이규철은 쉬는 것이 맞다고 판단을 내렸다.
슬슬 피로가 쌓일 시간이었고, 어제 새벽 포복으로 탈출하면서 잔뜩 긴장한 몸과 정신을 쉬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규철은 자신의 어깨에 맨 동초의 시신을 들고 계곡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신을 내려놓았다.
계곡의 구조상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어린아이였다.
영양 공급이 부족한 북한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겠지만, 한국이었다면 고작 중학생이나 되었을가 싶을 정도로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이규철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진도4 정의성 상사가 자신이 들쳐 메고 온 시신을 내려놓고는 주변에 낙엽을 모아서 시신 위에 덮었다.
낙엽이 이규철이 바라보는 어린 얼굴을 덮었다.
중학생 정도의 앳된 얼굴 대신, 시신이 입고 있는 북한군의 군복만이 보였다.
이규철은 몸을 돌렸다.
그가 군 생활을 하면서, 진도 팀에 들어와 팀장이 되면서 그의 지시에 따라, 그의 의지에 따라 이미 수많은 북한군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 저 어린아이도 그러한 북한군 중 하나였다.
같은 상황에 다시 맞닥뜨린다 해도 이규철은 같은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몸을 돌려 나갔다.
***
이규철은 일반적으로 행하는 전투 명상 대신 불침번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토막잠을 자는 것보다 몇 시간이나마 숙면을 취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4시간씩 불침번을 선다. 초번은 재운이. 내가 가운데. 마지막은 정 상사가. 일몰 이후 바로 이동한다. 이동 개시 시간은 18시 30분. 여기서 다음 포스트까지 30km 정도 남았으니까, 오늘 밤 돌파한다. 질문?”
이규철이 두 팀원에서 오늘 일정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특별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상사 팀과 연락하려면 얼마나 접근해야 하지?”
이규철이 무전을 담당하는 윤재운 중사에게 물었다.
“최소 5km.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봐야 합니다.”
이규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중요한 결정이 남아 있었다.
합류 포스트에 도착한 후에, 안 상사 팀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계속 이동할 것인지를 말이다.
진도팀이 가진 단거리 무전기의 수신 거리는 5km. 군사용 무전기치고는 짧은 거리였다.
모토로라에서 제작한 이 디지털 무전기는 음성신호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계속 변조되는 주파수를 통해서 신호를 주고받는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두 개의 무전기에 열여섯 자리 디지털 코드를 입력하면 다른 무전기에는 절대로 동조가 이루어지지지 않는,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안이 특별히 강화된 제품이었다.
안 상사 팀이 5km 이내에만 들아온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주고 받을 수는 있다.
그 말은 5km 바깥에서는 절대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일단은 휴식. 경계를 부탁한다.”
이규철이 말했다.
불침번 초번인 진도1 윤재운 중사가 믿고 편히 쉬라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보면서 이규철은 우선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은 휴식을 취한다. 시간이 있으니 판단은 나중에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2006년 11월 20일.
백금산역 북동쪽 45km 지점.
한규호는 바위에 앉아 산 너머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태양빛을 보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살짝 남아 있는 빛은 동쪽에서 밀려오는 어둠에 거의 다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아 있는 태양빛과 어둠의 싸움이, 마치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긴장감과 피로감의 싸움처럼 느껴졌다.
한규호는 안 상사가 이동을 지시했을 때, 기껏해야 15km 정도 이동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출발했을 때 이미 밤은 상당히 지나가 있었고, 일출이 얼마 남지 않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대략 15km 정도를 이동하고 숙영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안성종 상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해가 뜨고, 태양빛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는 대낮이 되었음에도, 안 상사는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평상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동을 고집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함경북도의 험한 산자락 사이를 움직이고 있었고, 이곳에는 군인은커녕 민간인도 보기 힘든 산골짜기였으니까.
안 상사는 낮에 이동해도 괜찮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판단. 그리고 결정.
지금 한규호가 속한 팀에서 판단과 결정은 안 상사의 몫이었다.
고작 팀원에 불과한 한규호는 결정할 권한 같은 건 없었다. 지시가 내리면 따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한규호는 슬쩍 안 상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지도와 작전명령서를 펴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저 괴물은 지치지도 않을까?
분명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자정을 넘겼을 때만 해도 뭐가 들리지 않느냐는 등 이번에 돌아가면 이라는 등, 은퇴시켜야 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이상해 보였는데 말이다.
몇 시간 동안 선두에 서서 행군을 이끌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휴식 시간에도 저러고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 몇 년은 침투 팀에서 진도5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저 괴물이 조바심을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규호는 자정부터 일어난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철길을 조사하고, 철로가, 노반이, 침목이 정리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열차를 한 대 보았다.
안 상사는 그 열차가 태양호, 김정일의 전용 열차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도0 팀과 빠르게 합류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안 상사는 이규철 대위 팀을 마중 나갈 것이라고 했다.
8시간, 즉 하룻밤 이동 거리를 이규철 대위가 있는 백금산역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였다.
한규호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행동은 계획된 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안 상사가 현장의 판단으로 작전을 수정하고 있다는 것을, 작젼명령서를 보지 못한 한규호도 알 수 있었다.
한규호는 그 부분이 불안했다.
일찍 이동하는 것은 좋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어차피 가야 하는 합류 지점이니까, 조금 더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것도 괜찮다.
정찰 지점에서 쉬나, 합류 지점에서 쉬나 쉬는 건 마찬가지니까.
문제는 마중 나간다는 것이다.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찾아올 터인데, 괜히 마중 나갔다가 서로 길이라도 엇갈리면 골치 아파진다.
뭐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야간에 쓸데없이 예정에 없던 이동을 하다가 서로 잘못해서 오인 사격이라도 할 가능성도 있다,
뭐 최악의 최악의 경우에나 일어날 일이겠지만, 진도 팀이 그런 미숙한 실수를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가능성이 제로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한규호는 마중 나간다는 안 상사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한규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명치끝을 은근히 불쾌하게 만드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불안감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한 불안감인지, 아니면 작전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 불안감이 그가 가지고 있는 위기 탐지 능력과 연계된 감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것일 수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한규호가 뭔가 의견을 내거나 명령에 불복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진도 3이라는 자리는 그저 명령에 따르는 자리였으니까.
툭.
작은 돌 하나가 한규호의 팔을 치고 갔다.
‘졸라 피곤하다.’
한규호가 돌을 던진 박종연 중사를 바라보자 그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규호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기대가 없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 40시간동안 한 장소에서 쉴 수 있겠구나 기대하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평소보다 더 빠른 페이스로 행군을 했기에, 한규호는 더 피곤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 기차 태양호 맞아요?’
한규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몰라.’
아마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씨발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했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박종연 중사가 말했다.
한규호는 피식 웃었다.
그가 농담을 꺼내지 못한 지 시간이 꽤나 흘렀다. 쓸데없는 농담을 하지 못해 초조해하는 것이 박 중사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아무리 개소리를 밥 먹듯 하는 그라고 해도, 지금처럼 텐션이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농담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5분 후 이동한다.”
안 상사가 지도와 명령서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한규호는 기차를 기다릴 때 쓸데없는 생각 대신 제대로 자 둘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40시간이라는 여유가 있을 줄 알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으로 쉴 수 있는 시간을 날렸다는 것이 새삼 아깝게 느껴졌다.
잘 수 있을 때 자고,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
자고로 선배들이 한 말치고 틀린 말이 없었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1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