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39화 (140/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12)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백금산역.

백금산역 플랫폼.

“38연구소 소장입니다.”

임기웅 부총리가 외국인에게 인사하러 다가온 남자를 소개했다.

38연구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관리하는 181지도국 내 핵개발 담당 연구소 중 가장 똑똑한 인재가 모였다는 곳이 38연구소였다.

이곳을 총괄하는 연구소장 김봉은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절도 있게 팔을 내밀면서 말했다.

“경애하는 령도자 동지 김정일 장군님의 귀한 손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연구소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플랫폼을 가득 울렸다.

외국인은 감정 없는 눈으로 그 손을 잡았다.

손이 잡히자 김봉은 잔뜩 힘이 들어간 몸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김봉 연구소장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북경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연구보다는 정치에 더욱 몰두했다.

그런 그를 북한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핵 개발, 그것도 핵 개발의 핵심 부서라고 할 수 있는 38연구소의 소장으로 발탁한 이유는 연구원들의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연구 실적을 내기보다, 연구원들을 관리하라는 이야기였다. 연구소의 정치장교가 되라는 말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김봉은 야심한 새벽에 칮아오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이렇게 정중하게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현재 공화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김봉 입장에서 고작 외국인 한 명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가 호들갑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원심분리기를 제공한 인물이고, 원심분리기가 없으면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중단하고, 자고 있는 인원을 전부 깨워서 역에 도열하라는 당의 지시는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공화국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었고, 그런 중요한 일을 하는 38연구소 연구원들은 이런 일에 불려 다닐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김봉 자신은 더더욱!

그런데 이 새벽에 도열해 있으라니. 감히 38연구소를, 연구소장은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런 그의 생각은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관차의 모습을 보고 바뀌었다.

태양호였다.

경애하는 령도자이신 김정일 장군님의 전용 열차였고, 그 전용 열차를 내어 주신 것이다.

그 의미는 컸다.

최고 존엄의 귀한 손님은 공화국의 귀한 손님이다.

김봉 소장은 그래서 최고 존엄의 전용 열차를 타고 온 귀한 손님을 최고 존엄에 준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성심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김봉은 외국인의 손을 잡고 막 입대한 전사(이등병)처럼 외쳤다.

외국인 뒤에 서 있던 535정찰대의 서용석 특무상사는 김봉 소장이 외침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누가 들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보안이 중요한 시설에서 야심한 밤에 플랫폼이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는 김봉 소장의 생각 없는 행동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연구원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봉 소장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연구원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연구소 내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김봉이 소리를 지르자, 자연스럽게 밑에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마치 경쟁하듯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소리를 줄이지.”

결국 보다 못한 임기웅 부총리가 그들을 자제시켜야 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모시고 왔고, 지도자는 전용 열차를 내줬다.

원심분리기를 제공한 것보다 그가 태양호를 타고 왔다는 것이 연구원들에게는 더 큰 의미가 될 것이었다.

임 부총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연구원들과 악수를 하는 외국인의 얼굴을 보았다.

외국인이 여기에 방문할 계획은 원래 없었다.

그가 데려온 기술자들만 백금산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자신도 가겠다는 의견을 말한 것이다.

그것도 최고 존엄과 직접 만난 자리에서.

***

2006년 11월 16일.

74초대소.

만경대 구역, 평양시, 북한.

“직접 다녀오면 좋겠습니다.”

외국인의 통역이 말했다.

그 말에 김정일은 외국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세월이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그보다 20년은 젊은 외국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 보고 싶다고?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제의 여파는 북한 정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안겼다.

북한 정부는 식량 부족에 관해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겨 낼 자신도 있었다.

95년 시작된 고난의 행군 이후, 주민들은 배고픔에 익숙해졌고, 굶어 죽는 이웃에 무심해졌다.

그리고 북한노동당은 그들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제재를 시작하자 평양에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었다.

2005년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계좌 동결, 조선무역은행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 조총련에서 들어오던 자금과 물자가 끊기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향해갔다.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끄떡없던 평양에 처음으로 어려움이 찾아왔다.

시골 지역 주민들이 굶어 죽는 것보다, 평양에 고급 식재료가 떨어지는 것을 그들은 더 큰 위기로 인식했다.

당장 김정일이 즐겨 마시는 체코산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Budejovicky Budvar) 생맥주 수입이 중단되자 한동안 김정일의 심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양에서는 한동안 긴장된 기운이 감돌기도 했었다.

고급 식재료, 신형 플레이스테이션, 김정일 전용 벤츠 차량의 부품 수급이 어려워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항의 유일한 돌파구인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이 중단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라늄 농축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가 도입 직전에 어그러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핵연료 농축을 위한 기체 확산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북한은 원심분리기를 통한 우라늄 농축 방법만이 유일한 카드였다.

동위원소의 미세한 질량차를 분리하고 농축하는 데, 원심분리기만큼 저렴하고 확실한 장비는 없었다.

물론 북한도 원심분리기를 가지고 있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원심분리기는 비커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의학 실험실에서 세포나 분리해 내는 원시적인 형태의 원심분리기로는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없었다.

분당 10만 회 이상의 초고속 회전과 더불어 장시간 가동할 수 있는 안정성을 갖춘 장비가 필요했고,

북한은 그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구 KGB 요원으로 구성된 레드마피아를 통해 국제 무기 거래 암시장에서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제재에 대한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잔뜩 겁먹은 러시아 놈들이 재빠르게 발을 빼버렸다.

새로운 수입처로 파키스탄, 이란 등 반미 국가들과 접촉을 진행했지만, 미국의 방해 때문인지, 성과는 없이, 돈은 돈대로, 공작원들은 공작원대로 계속 소모됐다.

그때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들이 있었다.

크레디트 에우로파(Credit Europa). 일명 CE.

17세기 동인도 회사에 출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럽 최초의 투자 은행 중 하나이며, 21세기로 접어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온 CE가 그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CE가 원심분리기와, 운영 기술을 제공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심분리기 설치와 철도 설비 정비를 위한 자금도 지원했다.

CE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핵 개발은 지금과 같은 속도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핵실험도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CE는 골드만삭스, 도이체방크, 바클레이스 캐피털 같은 벌지브래킷(Bulge Bracket, 자본 규모가 큰 세계구급 투자은행)이 아니었다.

벌지브래킷을 가진 소유주였다.

CE는 오직 두 가지 분야에 한정해 투자를 진행했는데, 하나는 벌지브래킷의 지분 확보였다. 자신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서 세계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또 다른 분야는 정부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직 경제적으로 완전하게 자립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정부가 CE의 주요 투자 대상이었다.

북한처럼.

“꼭 가 보셔야 하겠소?”

김정일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CE를 창립한 베르그만 가문의 후계자이면서, 현재 CE의 소유주인 얀 베르그만(Jan Bergmann) CE 회장에게 물었다.

그의 말을 평양외국어대학교 교수에 의해 통역되었다.

금발과 은발이 적절히 섞여 있는 머리를 가진 베르그만(Jan Bergmann) CE 회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데려온 통역사에게 말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 안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통역이 말을 전했다.

김정일은 오래간만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 첫 번째 위화감은 자신의 앞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었다.

베르그만 회장이 데려온 통역은 베르그만의 사람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고용한 베르그만을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앞에서 다른 누군가에 대한 높임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위화감이 느껴졌다.

통역 후의 전달 방식도 달랐다. 자신의 통역을 담당하는 평양외대 교수는 1인칭을 사용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게 평양식 통역법이었다.

그런데 베르그만 회장이 데려온 통역자는 제3자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남조선 놈일까?

한편 다른 생각도 들었다.

저 외국 놈이 무슨 의도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일까?

자신이 제안하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미국의 제재는 얼마나 악독한지, 암시장에서도, 마피아에서도, 하물며 파키스탄이나 이란에서도 현재 북한과 손을 잡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 준 CE의 입지는 북한에 투자한 투자자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김정일도 알고 있었다. CE가 가진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모건스탠리나 도이체 방크 같은 벌지브래킷이 더 유명하겠지만, 그 벌지브래킷을 소유한 이들 중 하나가 CE였다.

21세기에서 금융과 자본의 힘은 국가의 힘을 뛰어넘는다. 김정일도 CE가 가진 파워가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CE의 회장이 직접 평양을 방문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가 직접 현장에 가 보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베르그만과 김정일의 만남은 단순한 손님 접대가 아니었다. 이 만남은 국가와 국가의 만남이었다.

“아니,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오. 그저 번거롭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동하기에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아서 이동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불편할 것으로 생각되기에 그리 말한 거요.”

김정일은 그렇게 에둘러 말했다.

핵 개발의 심장부를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한편으로 그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이 그라는 것도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김정일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을 봐 왔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감정 없는 눈이었다.

김정일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CE가 북한에 손을 내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70년대 동구권의 결속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련과 중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북한에 손을 내밀면서 그 둘의 밀월 관계가 시작되었다.

30년 전,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아버지인 CE의 전대 회장이 북한을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왜 받아들였을까?

왜 손을 잡았을까?

그리고 지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눈을 바라보던 김정일은 작게 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어 말했다.

“기웅이를 오라고 해.”

김정일은 철도성 참모장 출신의 내각 부총리를 호출했다.

“열차를 준비해 드리겠소. 빠르지는 않지만, 가는 동안 불편함은 없을 것이오.”

자신의 전용 열차를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

통역의 말을 들은 CE의 베르그만 회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김정일은 그의 아버지도 같은 선택을 했을까 확신하지 못했다.

“용석이 네가 모시고 다녀와라.”

김정일은 회담장 구석에 서 있는 짧은 머리에 남자에게 말했다.

그 말에 짧은 머리의 남자,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직할 535특수작전대대 정찰대 서용석 특무상사는 뒷굽을 모으며 경례로 답했다.

서용석은 모시고 다녀오라는 위대한 령도자 동지의 말이, 그를 보호하며, 또한 그를 감시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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