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36화 (137/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9)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백금산역.

백금산역 동쪽 0.9km.

포복으로 얼마나 빠져나왔을까?

이규철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일출시는 07시 16분, 늦어도 06시 44분까지는 1km를 벗어나야 한다.

가운데에 위치한 진도1 윤재운 중사가 팔을 움직인 횟수를 새면서 이동 거리를 계산하고 있다.

7천2백 번의 포복이 끝나면 윤재운 중사가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규철은 조금씩 조급해지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이규철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2001년 그날과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느린 심장박동, 조급해지는 마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지만, 머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웠던 2001년의 그날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좋지 않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규철은 빠르게 그 생각을 지웠다.

침착하자.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자.

언제나처럼 지혜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을까?

거리를 측정하던 진도1 윤재운 중사의 발이 멈추었다.

이규철은 고개를 들었다.

윤재운 중사의 손이 선두에 서 있는 진도4 정의성 상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7천2백 번의 포복을 통해 650m를, 백금산역 기점 1km를 빠져나온 것이다.

이규철은 감각을 집중했다.

HLC를 유지할 것인지, HLC를 풀고,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일반 낮은 포복으로 전환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몸을 일으켜 몸을 낮추고 빠르게 이곳에서 이탈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그는 분석에 들어갔다.

소위로 임관하고 육군보병학교에서 OBC(초등군사반) 교육을 받던 당시에 교관이 농담처럼 했던 말이 있다.

-지휘관은 절대로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노름꾼처럼, 좋은 패가 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베팅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 였다.

당시에는 그도 다른 교육생들처럼 웃고 넘어갔는데, 정보사에 들어오고, 대북 작전을 나가고, 진도 팀을 맡게 되면서 그 농담 같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판단을 해야 했고, 판단을 하려면 분석이 선행되어야 했다.

분석은 정확하게, 판단은 냉철하게, 행동은 빠르게.

이규철은 행동을 위한 판단을, 판단을 위한 분석을 시작했다.

소리를 듣는 청각, 사물을 보는 시각, 느껴지는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해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HLC를 해제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 그는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스윽.

청각이 신호를 보냈다.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그의 감각에 잡혔다.

이규철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각을 옮겼다.

선두에 엎드려 있는 진도4 정의성 상사의 손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전방. 무언가 있음.

이규철은 HLC를 유지하며 정의성 상사 곁으로 다가갔다.

정의성 상사는 이규철 대위가 다가오자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야간 투시경의 녹색광으로 가득한 시야에 완만한 오르막의 야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곡에서 올라오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거리는 5백 m 정도.

짐승일까?

이규철은 마음속으로 머리를 저었다.

지휘관은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근거 없는 낙관은 절대 금물이다.

이규철은 손짓으로 경계 2단계를 지시했다.

의심이 되는 무언가가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다시 움직였다. 그들의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그리고 계곡을 빠져나온 무언가가 조금 더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규철은 그 무언가가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립보행을 하는 두 명의 사람.

동초(動哨)였다.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덕만산.

백금산역 동쪽 63km. 정찰지점 남동쪽 0.4km.

위장포를 뒤집어 쓴 채로 철길을 주시하고 있는 한규호는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이동할 필요 없이, 안전한 이곳에서 철길을 감시하기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여유로워, 마치 봄날 벛꽃 잎 날리는 공원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것 같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이동하면서, 알게 모르게 긴장하면서 누적한 피로를 싹 다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규호는 나른함을 떨쳐 내기 위해, 뇌 회전 속도를 조금 더 높이기 위해, 기분 좋은 생각을 하기로 했다.

최근 그가 가장 즐겨 하는 생각, 전역에 대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특수정보부사관으로 임관한 한규호의 의무 복무 기간은 7년이었고, 군복을 벗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3년 동안 한규호가 진도 팀을 떠날 수 있을까?

떠날 수는 있다.

거제라든가, 한산이라든가. 정보사 직할 다른 침투 팀으로의 이동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침투 팀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규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한규호는 아주 잘 만들어진 침투 팀 특수요원이었고, 정보사는 그런 그를 다른 곳에 쓰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수정부부사관, 정확히는 ‘특수’라는 단어에 혹한 것이 잘못이었다.

치기 어린 짧은 생각에 그의 소중한 20대의 7년을 북한 땅에서 토막 잠을 자면서 허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한규호는 피식하고 웃었다.

사실 이 생활이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남자로 태어나서 강함의 정점에 속해 있는 자신이 조금은 멋있다고 생각했다.

진도 팀은 ‘특수’부대인 만큼 대접도 ‘특수’했다.

훈련이나 작전이 아니면 따로 출퇴근이라는 것이 없었다. 수당을 포함하면 금전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 군에서의 대접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팀원들이 마음에 들었다.

최고와 같이 일한다는 것. 최고의 군인들이 자신을 같은 팀원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 남자로서 그를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사춘기 청소년처럼 ‘뽀대’만 찾아 다닐 수는 없었다.

지금의 한규호는 군에 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3년 후에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써는 어서 빨리 군복을 벗고 싶었다.

인생의 변화가 필요했다.

한규호는 박종연 중사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독립 요원이라고 했던가?

전역 후에 무엇을 하고 먹고 살 것인지는 모든 직업군인의 화두였다. 한규호도 그런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장기 복무 신청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군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잡고 싶어 할 것이다.

정 할 거 없으면 그냥 장기로 남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정보사 소속 특수정보부사관의 장기 복무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군에서 특수 계급으로 대접을 받아도 전역하고 사회에 나가면 그저 몸 좋은 예비군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실히 돈을 모았다고 해도 치킨 프랜차이즈를 겨우 차릴 정도의 돈이었고, 최종 학력은 고졸이 일반적인 부사관의 특성상, 그들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사실 거의 없었다.

민간군사기업(PMC)에 대한 소문은 들어 본 적 있었다.

전역한 특수부대원들을 대상으로 헤드헌팅을 제안한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랙워터 같은 회사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국특수부대원들, 특히 정보사 침투 팀의 능력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하지만, 문제는 그놈의 영어였다.

미국 PMC에서 작전 브리핑을 이해할 정도의 영어 실력이 있다면 왜 부사관을 하겠는가? 대기업을 들어가지.

소문은 최근 특수부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국형 민간군사 기업 설립을 준비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창단 멤버들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몇몇 선배들은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군대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민간 기업만큼 하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규호는 생각이 달랐다.

자고로 ‘한국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치고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한규호의 지론이었다. 특히 군대와 관련해서는 말이다.

진도 팀이 쓰는 대부분의 장비가, 미군 특수부대의 장비와 동일하다는 것이 그 사실을 입증했다.

한국형 민간 군사 기업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용역 깡패들이 떠올랐다. 편견인지 몰라도, 그리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독립 요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박종연 중사는 용병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단독으로 일을 의뢰받는다고.

뭐, 역시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쓰고 버리기 딱 좋은 이미지 아닌가? 문제가 생겨도 뒤탈도 없을 것 같고.

그런데 이상하게 호승심을 자극했다.

어려운 일을 맡길 것이다. 미국 PMC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돈도 돈이지만, 긴장과 자극에 중독되어 있는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규호는 웬만한 어려운 일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 정도면,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 고급 인력이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던 한규호는 조금 전 미숙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절벽을 내려가서, 잔뜩 긴장해서 안성종 상사에게 총구를 돌렸던 미숙했던 자신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올렸다.

그러자 건방진 생각을 했다는 부끄러움이 그를 찾아왔다.

한규호는 몸을 살짝 비틀어 부끄러움을 떨쳐 낸 다음, 시선을 안성종 상사에게로 돌렸다.

전투 명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처음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립 요원이라.

어쩌면 저 양반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 작전을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해도,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걱정 없겠지.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안성종 상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진도5, 상사, 이름은 안성종.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평소에는 뭐 하고 사는지, 취미는 뭔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일반적으로 같은 부대 전우라면, 선후배라면 보통은 다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 진도 팀의 성격, 혹시라도 포로로 잡혔을 경우,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정보를 누설할 수도 있는 위험 등등 서로에 대해서 몰라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로 목숨을 걸고 등을 맡기는 전우치고 너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몇 번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박종연을 제외하고는 다른 팀원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게 없었다.

신기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음에도, 그런 그들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고, 서로의 등을, 목숨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한규호는 몸을 살짝 비틀어 자세를 바꿨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하자.

좋은 생각. 몸에 좋은 생각.

한규호는 그렇게 주제를 전환하기 위해 다른 주제를 찾았다.

허기진다. 무언가 먹고 싶은데. 칼로리바는 지겹다.

복귀하면 본부 PX에서 칼로리 바란스를 박스째로 사다가 연병장 한구석에 쌓아 두고 불을 붙여 고기를 구워 먹을까?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그거 말고. 우선 복귀하면 제일 먼저 뭘 먹을까?

박종연 중사에게 물어보면 그는 뭐라고 할까?

여자.

그렇게 말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

아니, 지금은 식욕이다. 국방부 보급단 개자식들이 일부러 가장 맛없는 놈으로 고른 칼로리바에 괴롭힘 당한 미각을 달래 주는 것이 더 시급했다.

지난번 작전 끝나고 뭐 먹었더라? 라면이었나? 짜장면이었나? 칼국수였나?

항상 작전 중에는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야지 마음먹어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저런 걸 먹는단 말이지.

사실 그런 게 맛있다. 안 비싸고 흔하지만, 절대로 맛있는 음식들.

카레가 떠올랐다.

그래. 돈가스카레. 맥주랑!

그게 좋겠다.

한규호의 입에 침이 고였다. 반사적으로 침샘이 활성화되는 것을 한규호는 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니까.

그래. 돈가스카레다. 카레돈가스인가? 뭔 상관이야?

저번에 찾아라 맛있는 TV에서 본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있었다고 했지?

그 순간, 다른 감각이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질적인 감각이. 그의 온몸을 지배하는 미각을 몰아낸 또 다른 감각이 찾아왔다.

“들립니까?”

한규호가 박종연에게 말을 건넸다.

“너까지 왜 그래. 정신 차려, 이 자…….”

박종연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에게도 감각이 찾아왔다.

“들리십니까?”

박종연이 그의 옆에 있는 안성종 상사에게 물었다.

안성종 상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박종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종연은 자신의 앞에 거치된 야간 감시 장비를 안성종에게 넘겼다. 10배 줌 기능이 있는 감시 장비였다.

장비를 받아 든 안성종 상사는 야시경 대신 장비를 눈에 대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 상사는 말이 없었다.

박종연 중사도 자신의 저격 총에 거치된 적외선 스코프에 눈을 붙이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도 찾을 수 없었다.

망원 장비가 없는 한규호는 그저 1x 배율의 야시경으로 주변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청각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실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아무것도 없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열차가 다가오는 소리는 분명히 들리는데, 기관차에 달려 있어야 할 전조등 불빛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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