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35화 (136/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8)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덕만산.

백금산역 동쪽 63km. 정찰지점 남동쪽 0.4km.

철로 정찰을 마친 한규호는 안성종 상사와 다시 레펠 로프가 늘어져 있는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절벽을 올라가 진도2와 합류한 다음 44시간가량을 대기하면 이번 작전은 끝나게 된다.

절벽에 도달한 안성종 상사는 로프를 한 번 잡아당겼다.

결속 상태도 점검하고,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박종연 중사에게 이제 올라간다는 신호도 보낸 것이다.

줄을 잡아당긴 안성종 상사는 이제부터 올라야 할 암벽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로프를 이용해 빠르게 내려왔지만, 올라갈 때는 직접 암벽등반을 해야 했다.

그렇기에 올라가기 전 암벽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은 필수적인 절차였다.

“기찻길에서 놀다 보면 말이지.”

역시 암벽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던 한규호에게 안성종 상사가 말을 꺼냈다.

한규호는 걸음을 멈추고 안 상사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철로 위를 걷거나, 철길에 깔아 놓은 자갈 중에서 이쁜 놈을 찾는다거나, 돌을 철길 위에 올려 둔다거나. 그런 놀이를 하다 보면. 조금씩 더 위험한 짓을 하고 싶어지지.”

“더 위험한 짓……. 말입니까?”

“철길 위에 올려놓는 돌이 커진다거나, 철교에서 뛰어내린 다거나, 아니면 담력 시험을 한다든가.”

“담력 시험이라면…….”

“쉽게 말해, 열차가 오고 있을 때 철길 위에 올라가 어떤 놈이 가장 늦게까지 버텨 내느냐 뭐 그런 거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길에서 할 수 있는 담력 시험이라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철길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 그런 놀이를 하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씩 그 두근거림에 취해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위험의 강도를 높이지. 그리고 누군가가 피를 보기 전까지 절대로 그 짓을 멈추지 않고.”

한규호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 베테랑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

안 상사가 한규호의 직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냈다.

“네.”

“나도 그렇군.”

불안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군.”

한규호는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그런 말을.

괜찮습니다.

별일 없을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상사님답지 않게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부 다 죽여 버리면 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할 수가 없었다.

군 생활의 대부분을 특수부대에서, 괴물 중에 괴물만이 모인다는 정보사 침투팀에서 베테랑으로 복무한 안성종 상사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안성종 상사가 다시 말했다.

금기(禁忌). 현장에서는 금기시되는 행동과 말이 있다.

‘이 작전이 끝나면’, ‘이 전쟁이 끝나면’으로 시작되는 모든 말들이 여기에 속했다.

전장에서 경례를 하지 않는 것. 금기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이고, 습관이고, 법칙이었다.

지금 진도 팀의 괴물 중의 괴물이 그 금기를 범하려 하고 있었다.

“……올라가지. 먼저 올라가.”

한규호는 안성종 상사가 참아 냈음에 감사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번 작전이 끝나면 안 상사의 이번 행동에 대해서 보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안 상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번 작전이 진도 팀원으로서 안성종 상사의 마지막 작전이 될 것이다.

“먼저 올라가시죠. 뒤를 지키겠습니다.”

한규호가 지향 사격 자세로 총구를 철길 쪽으로 겨누며 말했다.

안 상사는 한규호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펠줄을 하강기에 걸었다.

등반 도중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하강기에 걸린 레펠용 로프가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이었다.

안 상사는 레펠 줄을 걸고 두 손으로 절벽에 드문드문 나 있는 돌기를 잡았다.

그렇게 두어 발 올라간 안 상사가 다시 한규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리는 것이 있나?”

“없습니다.”

한규호는 여전히 전방을 향해 지향 사격 자세를 취한 상태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러웠다.

“그런가.”

안 상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절벽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한규호는 다시 한번 안 상사를 은퇴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어서 와, 실베스타 스텔론.”

한규호가 절벽을 다 오르자 저격 지점에서 위장포를 뒤짚어쓰고 있던 박종연 중사가 말했다.

“실베스타 스텔론?”

한규호가 레펠용 로프를 끌어 올리며 되물었다.

“클리프 행어.”

박종연 중사가 말했다.

한규호는 피식 웃었다.

실베스타 스텔론 이름을 들었다고 나온 지 10년이나 지난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절벽을 기어올랐다고 해도 말이다.

“센스가 그게 뭡니까?”

살짝 고개를 좌우로 흔든 한규호는 로프를 끌어 올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한규호는 로프를 다 끌어 올렸지만 결속을 풀지는 않았다.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또 다른 탈출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한규호는 적당한 곳에 로프를 놔두고 위장포를 덮은 다음 자신의 매복지로 가서 위장포를 뒤집어썼다.

저격을 담당하는 박종연 중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엎드린 세 사람은 앞으로 40시간 동안 자신들이 감시하는 철길로 몇 대의 열차가 통과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남아 있는 임무의 전부였다.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니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작전을 하는지 알게 되었고, 주요 임무 중 하나인 철로 상황 파악을 별 어려움 없이 끝냈다.

이제 남아 있는 임무는 누구도 접근하기 힘든, 안전한 이곳에서, 그저 철길을 지켜보다 집에 가면 되는 것뿐이었다.

계속된 행군에 피로가 조금 쌓였을 만한 시점에 이동하지 않고 대기한다는 것도 체력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한규호는 슬쩍 안상종 상사를 돌아보았다.

위장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규호는 신경 끄기로 마음 먹었다.

이대로 작전이 잘 끝나고 복귀한 후에 오늘 있었던 상황을 보고하면 된다. 그러면 본부에서 알아서 판단을 할 것이다. 판단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만약 작전 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니. 작전 중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다. 저 괴물은 진도5니까.

애초에 그런 가정은 필요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래. 혹시라도,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진도2라든가.

합류 후에는 진도0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한규호가 고민할 부분이 아니었다.

한규호는 그저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전투 명상을 즐기면서, 혹시 올지도 모를 기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었다.

***

2006년 11월 20일.

함경북도 단전군 백금산역.

백금산역 동쪽 0.3km.

백금산역 3백 m 지점까지 접근해 백금산역의 정찰을 마친 진도0 이규철 대위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이번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작전이 북한 내의 핵 개발 동향과 핵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한 의도로 계획되었고, 그런 의도 아래 진도 팀이 핵실험 관련 시설 중 한 곳으로 의심되는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을 이규철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의 눈으로 백금산역의 실체를 파악했다.

정보사와 국정원, 그리고 미국에서 찾던 장소 중 하나가 맞다는 것을 방금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여기가 그곳이었다.

백금산역을 덮고 있는 커다란 위장 천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자정이 지난 시간임에도 백금산역에는 수많은 사람과 장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규철이 그곳을 정찰하는 30분가량, 1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백금산역과 폐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경계하는 군인들, 짐을 진 인부들, 그리고 무언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지시를 하고 있는 간부들 까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노출을 피해 어둡게 켜 놓은 조명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동 경로 위에 위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위장 천이라고 불러야 할 거대한 천들이 사람들의 이동 경로에 맞춰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었다.

여러 개의 기둥과 밧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위장 천은 토지와 같은 황토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위성 정찰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위장 천 아래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도, 숨겨져 있는 차량과 장비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평에서 바라보는 육안 정찰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백금산역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저 위성사진처럼 쓸쓸한 폐광의 모습이었다면 진도 팀은 계획대로 이곳에서 48시간을 대기한 다음 진도5 안성종 상사의 팀과 합류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이규철은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임무는 철수와 보고였다.

고작 30분의 불과했지만 백금산역 주변 경계상태는 다른 지역의 경계 상태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 북한군의 모습은 못 먹고 못 입어 군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먹고 살기 위해 둔전병처럼 농사를 짓는 7군단 병력이 아니었다.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날카로운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이곳에 계속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이규철은 천천히 몸을 뒤로 빼내면서 감각은 날카롭게 세워 경계를 계속 했다. 그러면서 빠르게 머릿속으로 분석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백금산역에 대한 정찰을 시작했을 때,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북한군 야전 교범에 따르면 북한군은 진지를 구축할 때, 진지 본부를 중심으로 2백 m를 핵심 경계 구역으로 설정했다, 1.25km 길이의 원 모양의 경계 지대에 열다섯 개 경계 초소를 설치했다.

그렇게 설치하면 진지를 중심으로 대략 80m마다 초소가 하나씩 설치된다.

그렇게 설치된 초소를 기점으로 3백 m가 북한군의 경계 구역이었다. 진지 본부를 중심으로 반경 5백 m가 북한군의 경계 구역이었다.

정식 야전 교범에 따르면 말이다.

문제는 지금 이곳은 핵 시설이었고, 핵 시설 같은 최중요 시설에 대한 경계는 교범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더 많은 경계 병력, 더 세밀한 경계 상태를 유지했으면 유지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진도 팀에게 있어서 철수는 침투보다 위험했다. 야시경의 활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규철은 최소한 백금산역을 기점으로 1km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금산역에 3백 m까지 접근했고, 50m를 빠져나왔다. 남은 거리는 650m,

아무리 달이 없는 삭(朔)이라고 해도, 밤이 길어지는 11월이라고 해도, 어둠이 그들을 완벽하게 지켜 주지는 못한다.

이규철 대위는 진도2 윤재운 중사와 진도4 정의성 중사에게 손짓으로 지시했다.

HLC(Hathcock Low Crawl)로, 650m.

손짓을 이해한 두 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HLC 준비에 들어갔다.

이규철의 수화(手話)는 HLC를, 그리고 HLC로 도달해야 하는 거리를 의미했다.

헤스콕 낮은 포복, 일명 HLC는 전설적인 저격수인 카를로스 노만 헤스콕 주니어(Carlos Norman Hathcock Jr.)에게서 영감을 받아 개발된 포복 전술이었다.

베트콩들로부터 ‘Long Tr?ng’, 일명 ‘죽음의 하얀 깃털’이라고 불렸던 헤스콕은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군 경계 병력이 가득한 적 진지까지 1.5km의 거리를 4일 동안 포복으로 접근해 적 장교를 사살하는 전설을 남긴 해병대 저격수였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모든 저격수들의 교과서이자 신화였다.

베트남전이 끝난 후 미국 국방성은 헤스콕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연구의 포커스는 헤스콕의 저격 능력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아흔세 명, 비공식적으로 3백 명을 저격하고, M2 중기관총으로 2.3km라는 한동안 그 누구도 깨지 못했던 저격 거리를 기록한 그의 저격 실력이 아니라, 1.5km를 4일에 걸쳐 포복할 수 있었던 그의 포복에 맞춰져 있었다.

1.5km.

산책하는 걸음으로 22분밖에 걸리지 않는 그 거리를 4일 동안 이동하면서 들키지 않았던 그의 은밀한 포복은 저격수뿐만 아니라 은밀성을 요구하는 침투 부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헤스콕의 경험, 그리고 21세기 군사과학이 접목해 만들어진 HLC는 포복을 단순한 보병 기술에서 특수부대의 예술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복이라는 행동은 2족 보행을 하는 인간에게는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었다.

신체의 대부분을 땅에 붙인 상태로 움직이는 포복 자세는 일반적인 보행은 물론, 조깅보다 동일 시간 대비 체력 소모가 많았다.

여기에 무릎과 발끝, 그리고 팔꿈치의 마찰을 이용해야 하는 만큼 장시간의 포복은 시전자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

HLC는 그런 모든 사항을 고려해 체력 소모와 신체의 열상(裂傷)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포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된 포복 전술이었다.

진도 팀을 포함한 정보사 직할 침투 팀은 훈련, 지겹도록 반복 훈련을 통해서 HLC를 몸에 익혔다.

그리고 그 지겹던 훈련의 성과가 지금 나오고 있었다.

진도4 정의성 상사가 맨 앞에, 이규철 대위는 최후미를 지키는 대형으로, 그들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은폐 상태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소리를 지우고, 지형지물에서 그다음 지형지물로 자연에 녹아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DEVGRU(미국 해군특수전개발단) 교범에 따르면 HLC를 시전할 때 한 번 팔을 움직여 전진하는 거리는 0.3피트, 약 9cm였다.

650m를 나아가기 위해서는 7천2백 번이 넘는 포복을 해야 했다.

그 셋은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동쪽으로 나아갔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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