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3) >
2006년 11월 15일.
국광해운(주).
서울 종로구 당주동.
“현재 작전 팀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창가에 서 있던 엄주현 이사가 상황판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김광용 사장은 서류철을 엄주현 이사에게 넘기고는 책상 위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고서 엄주현이 서 있던 창가로 걸어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최인석은 담배 불을 붙이는 김광용 사장의 모습을 보고 강력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김광용 사장은 담뱃갑을 최인석을 향해 던졌다.
“우선 연평역을 담당한 거제 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거제 팀은 포스트 마이크, 중국 길림 연변 조선족 자치구 허룽(和
니다. 국경까지는······.”
“나도 담배 좀 주지.”
이철원 국장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최인석을 향해 말했다.
최인석은 김광용을 한번 바라본 후 이철원에게 걸어가 담뱃갑을 건네 주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던져 줬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백금산부터 이야기해 보지.”
이철원 국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는 말했다.
그러면서 담뱃갑을 앞에 앉은 김훈에게 건넸다.
김훈은 담뱃갑을 받아들었지만 담배를 꺼내지는 않았다.
엄주현은 자신이 발표를 시작하자 갑자기 너구리굴이 된 상황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자신만 소외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테이블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들 정도의 배짱은 없었다.
그는 티 나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9페이지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갔다.
“백금산역을 향하고 있는 진도 팀입니다. 포스트 골프, 함경북도 목진리 남측 해변을 통해 오늘 진입했습니다. 잠수정을 이용해 해변으로 접근, 기암동 뒷산에서 작전이 시작됩니다. 백금산역 기점 이동 거리는 77km입니다. 우선 진도0 이규철 대위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엄주현이 말했다.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에 대위 계급장을 단 모자가 얹혀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1977년생, 현재 서른 살입니다. 학사 35기로 2000년에 임관했습니다. 기혼이고, 아들이 한명 있습니다. 가족들은 분당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사?”
그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김훈 1차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학사 장교, 정식 명칭 학사사관제도(Korea Army Officer Candidate School, KAOCS).
미국의 OCS 제도를 본 따 1980년에 창설된 학사장교제도는 ROTC와 달리 대학 재학 기간 동안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장교 양성 교육 기간은 장교 임용 과정 중 가장 짧은 16주에 불과했다.
고작 네 달의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기 때문에 학사장교들은 군인으로서의 소명을 가진 군 간부라기보다 그저 위관급 풀 인력으로 대우받았다.
물론 학사 장교 출신 중 일부 장기 복무자들의 경우 장성으로 진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학사장교들은 36개월의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면 대부분이 바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학사 장교 출신이 침투 팀 팀장을 맡고 있다고?
그런 의문을 담은 질문이었다.
“임관 후 3사단 1X연대 수색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했습니다. 2001년 발생한 철원 충돌 당시 소대장이 그입니다.”
철원 충돌.
2001년 5월 5월, 철원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북측에서 누군가가 철책을 넘어 귀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민초에서 발사한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당시 GP 내 경계 중이던 3사단 수색대가 북한군을 제압하고 귀순병을 구해 왔다.
대대적으로 홍보하고도 남을 공적이었지만 기밀로 봉인된 이유는 귀순자의 신분 때문이었다.
귀순자는 단순한 탈북자가 아니었다.
조선노동당 내 서열 20위권 안에 있는 중앙당 정치위원의 차남이었고, 백두 혈통이라고 불리는 북한 내 최고 권력 집단의 차기 후계자 중 한 명과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핵심 세력 중 핵심 인물이었다.
“2001년 철원 충돌 이후 그를 회사에서 직접 관리했습니다. 입사 이후 교육을 진행했고, 진도 팀에 배치했습니다. 진도0이 된 것은 2003년 3월입니다.”
***
2006년 11월 18일.
함경북도 화대군 까치산.
백금산역 동쪽 65km 지점.
진도0 이규철 대위는 계곡을 통해 은밀하게 까치산을 올라가면서 일정을 계산하고 있었다.
앞으로 2일 후가 삭(朔)이었다.
12시간 이상 달빛이 없는 삭을 전후한 일주일이 야간 작전을 펼치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월출 전, 포스트에 도착하면 최종 목적지인 백금산까지 거리는 55km 안쪽으로 들어온다.
2일의 행군, 1일 동안의 정찰, 그리고 3일 동안 철수한다는 작전 계획 수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계산이 섰다.
아무런 변수가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핵 관련 작전에서 변수가 없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재 진도 팀 내에서 이번 침투가 작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얼마 전 시행된 북한 핵실험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팀원들도 조만간 알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팀장인 그가 유일했다.
동해로 침투, 야간으로 백금산역 인근으로 이동, 백금산 폐광 인근에 배치된 인원과 시설을 파악한다.
24시간 동안, 특히 백금산역을 연결하는 금골선의 철로 상황을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열차 이동을 육안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였다.
이규철이 진도팀장이 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차례 북한땅을 밟았다. 단순한 침투훈련으로, 또는 실전 훈련으로, 또는 작전으로.
그리고 팀과 함께, 또는 팀을 이끌고 무사히 복귀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고 마음을 다 잡았다.
이규철이 학사 장교를 선택한 이유는 사실 대수롭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처럼 1학년이나 2학년을 마치고 일반 사병으로 입대할 생각이었던 그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생각 외로 그와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대학 간판만을 보고 점수에 맞춰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2학년까지 4학기를 공부하고 나서 공부를 중단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학부 과정을 마치고, 학사를 취득하고, 학사 장교로 군복무를 대신하고, 간부로 군복무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철학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기 위해 군복무를 수단으로 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다.
굶어 죽기 딱 좋다고, 철학 박사 학위는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라. 굶어 죽을 생각이냐? 철학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는 19세기에 끝이 났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스피노자를 떠올렸다.
종교가 지배하던 17세기에 정신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던 기독교적 유일신을 부정한 철학자.
그래서 부유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포기하고, 평생을 작은 하숙집에서 렌즈를 갂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대륙 합리론의 아버지 바뤼흐 스피노자,
44세의 젊은 나이에, 렌즈를 깎다가 흡입한 유리 가루로 인해 발생한 폐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스피노자를 떠올리며 이규철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졌다.
베르그송이 말했다. ‘모든 철학자에게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
그 말처럼 이규철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스피노자가 있었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든 2000년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밀레니엄을 맞이했고, 대학을 졸업했고, 군대에 입대했으며, 그리고 결혼을 했다.
2001년을 맞이하기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에게 과외를 받던 제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평생 돈 벌 일 없을 것이라고, 남의 집 귀한 딸 데려와 고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결혼을 한 것이다.
대학 시절 그가 가르쳤던 옛 제자. 막 스무 살이 된 정지혜와 2000년 12월 그는 결혼식을 치렀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3사단, 3사단에서도 가장 오래되었다는 1X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이었던 그에게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허락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신혼여행은커녕, 대부분의 시간을 만날 수도 없는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규철은 행복했다. 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 행복의 와중에 그 사건이 터졌다.
***
2006년 11월 15일.
국광해운(주).
서울 종로구 당주동.
엄주현 이사는 브리핑을 계속 이어 나갔다.
“다음은 진도1 윤재운 중사입니다. 80년생, 스물일곱 살입니다. 1999년 특전부사관으로 입대했고 9공수여단에서 근무했습니다. 입사는 2002년. 한산 팀을 거쳐 2003년부터 진도 팀에 배속됐습니다. 초기 직책은 진도3이었고, 이후 진도1로 임무 변경되었습니다. 특기
는 정보, 진도 팀에서 무전과 전술 전자 장비를 담당합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이철원 국장은 페이지를 넘겼다.
“진도2 박종연 중사입니다. 79년생 29세입니다. 1999년 공군 일반병으로 입대하고, 2000년에 하사로 전환했습니다. SART 대원 교육받던 중 저희에 눈에 띄었습니다. 특기는 TCCC(Tactical Combat Casualty Care, 전투 의무), 진도 팀에서는 저격을 담당합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SART 출신인데 저격?”
다시 김훈이 물었다.
SART.
공정통제부대(CCT)와 더불어 공군에서 운영하는 대표적인 특수부대. 공군공중기동정찰사령부 산하 제6탐색구조비행전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적진에 추락한 공군 조종사를 구출하는 임무이기에 응급 의무, 해상 구조, 산악 구조 등의 훈련을 받는다.
물론 적진 한가운데 들어가 파일럿을 구출해야 하는 임무인 만큼 고공 강하나 잠수 등의 침투, 생존, 회피 훈련을 받기도 하지만.
“구출 작전에서는 TCCC, 침투 및 정찰 작전에서는 저격을 담당합니다.”
일반적으로 특기 하나를 특화하는 현재 특수부대원 육성 방침과는 맞지 않았다.
상이한 각각의 임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뛰어난 인재라는 이야기였다.
“다음은 진도3 한규호 중사입니다. 1982년생, 25세입니다. 2002년 특수정보부사관으로 입대했습니다. 2000년부터 백신(북파침투 팀) 인원 보충을 위해 모집한 예비후보군 출신으로, 중사 승진 전까지 저희가 따로 관리했습니다. 2003년 중사 승진 이후 진도 팀에 배치
했고. 특기는 정찰, 임무는 정찰입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백신예비후보군, 정보사령부가 새롭게 북한침투부대를 만들고, 거기에 지속적인 인력 보충을 위해 모집한 부사관들을 말했다. 애초에 모집 단계부터 일반 부사관들과 구분되는 특수정보부사관 중에서도 따로 분류하고 관리하는 집단이었다.
“예비후보군?”
이철원 국장이 한규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다른 팀원들과 비교하면 특수대원답지 않은, 보기에 따라 아직 어리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드는 얼굴을 가진 한규호는 다른 팀원들과 달리 군 경력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예비후보군에서 다른 부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백신에 배치된 경우가 얼마나 되지?”
김훈 1차장이 그의 상관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에 대해 물었다.
“한규호가 유일합니다.”
엄주현이 답했다.
실제로 북한에 들어가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백신 구성원 대부분은 HID, UDU, UDT, SSU, CCT, SART 등등 괴물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부대원들 중에서도 특출한 능력을 갖춘 대원을 정보사에서 직접 선별했다.
BEST로는 부족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BEST OF THE BEST였으니까.
진도 팀장인 이규철도 특별한 케이스라면 특별한 케이스였다. 특수부대가 아닌 일반 야전 부대 출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군 경력이 있었다. 철원 충돌을 해결했다는 성과도 있었다. 검증도 마쳤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백신예비후보군 애송이가 타 부대 경험이 없이 바로 백신에 배치되었다? 그것도 중사를 달자마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김훈은 서류철에서 눈을 때고 엄주현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으로,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한규호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특별함을 위기 감지 능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위기 감지 능력?”
“쉽게 말해 위험이 찾아오기 전 그것을 알아채는 육감(六感, Sixth Sense)을 말합니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