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29화 (130/386)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 >

2006년 11월 15일.

국광해운(주).

서울 종로구 당주동.

김광용 중령은 상황판 앞에 앉아서 서류철을 넘기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저희가 북한 핵실험과 관련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한 것은 올해 2월이었습니다. 북한의 외화 세탁을 담당하던 방코델타아시아가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를 청산한 시점입니다. 청산 과정에서 대포동 2호 발사와 핵실험 관련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김광용 중령의 말에 이철원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국장의 기억으로 2월 16일에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anco Delta Asia)가 북한과의 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그 상황에서 약간의 틈이 생겨났고, 그 틈에서 정보가 흘러 나왔다.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대한 정보였다.

김광용 중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이철원 국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국정원과 정보사는 각각 별개의 기관이었고, 국정원 국장은 그의 상관이 아니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북 공작의 최상위 티어는 국정원이었고, 정보사는 국정원이 사용하는 카드 중 하나였으니 그로서는 불만이 있다고 해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번 브리핑도 정보사에서 내려온 지시였다.

“7월 5일 대포동 2호 7기 발사 실험을 진행하면서 정보의 신뢰성이 확인되었고, 핵실험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를 즉각 진행시켰습니다. 중국과 북한 내 협력자들에 대한 연락망을 재점검하고, 정보 취합 과정에서 복수 검증할 수 있는 프로토콜을 가동시켰으며, 백신(정

보사 직할 공작 팀을 지칭하는 은어)에 대한 실전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정보검증 프로토콜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1차장 김훈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지 않았다.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진행된 정식 명칭 ‘1차 핵실험’이 발발하고 저희 정보 검증에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희가 당초 예상한 지역은 연평이었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지도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페이지를 넘겼다. 위성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백무선 백암역 기준 47.1km 양강도 백암군에 위치한 역입니다. 1면 2선 섬식구조로 백무선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협궤 노선이었습니다. 백무선의 경우 혜산선과 연결되는 백암역, 대택역까지는 표준궤료 개궤가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부터는 45년 이전 궤관을 그

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삼사면 상단역과 삼사역이 수몰되면서 백무선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003년 위성 감시 중에 북계 수역에서 개궤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발견했고, 이후 연평역까지 표준궤로 개궤가 이루어진 것을 파악했습니다. 다음 장입니

다.”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평역 위성사진입니다. 첫 번째 사진이 2001년 위성사진이고, 두 번째 사진이 2003년 사진입니다. 보시다시피 민가 하나 없던 연평역에 상당수의 구조물이 건조된 것이 파악되었습니다. 그 외에 정보들을 취합해 우리는 연평역이 새로운 핵실험 관련 장소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했습니다. 다음 페이지 보시죠.”

다음 페이지에는 또 다른 위성사진이 있었다.

“함경북도 길주군 백두산청년선 재덕역 위성사진입니다.”

두 사람도 익히 알고 있는 지형이었다. 이번 1차 핵실험이 진행된 장소였으니까.

“인근에 화성 수용소가 있습니다. 수용소 건물과의 거리는 25km. 경계와의 최단거리는 2.5km에 불과합니다. 승강장은 1면 5선으로 주기적으로 관리가 되어 왔기에 저희 감시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습니다만, 수용소가 인근에 있는 관계로 감시 대상에서는 후순위에 밀

려 있었습니다. 핵실험 장소의 좌표는 41.2763, 129.0878이고, 재덕역과의 거리는 16.89km입니다. 다음 페이지입니다.”

다시 페이지가 넘어갔다.

“화성 수용소에 수용된 인력을 동원해 핵실험장 시설을 만들었다고 가정했을 때, 핵 원료 등 핵실험 재료 운반은 철도를 이용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같은 판단에 따라 철송이 가능한 후보 지역을 선정하고 후보군을 하나씩 제외함으로써 핵연료 보관 및 가공 장

소로 백금산역이 있는 백금산 폐광을 가장 높은 후보군으로 선정했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연평역과 백금산 역을 비교한 위성사진이 있습니다. 분석 팀에서는 연평역 인근 시설물이나 표준 역 개궤 등이 일종의 위장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면에 백금산역 주변에는

오히려 시설물에 대한 정리가 진행되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 남아있던 관리동을 허물고, 그 잔해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마치 일부러 보라는 듯.”

이철원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에서도 위성을 통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분석 팀에서는 연평역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위장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개궤나 시설 등 공사 규모가 작지 않다는 것이 그 근거였습니다. 여기에 휴민트(협력자들이 보내온 정보) 취합 과정에서 모순이 발견됐습니다. 이에 따라 본사에서는 직접 백신을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즉각 거제와 진도를 가동했습니다.”

***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남북 양국은 서로의 땅에 수많은 무장 병력을 침투시켰다.

특히 각각 내부 정리가 끝난 1960년대에는 간첩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공작원들이 서로의 땅을 밟았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3년 10월 열린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군사 정변 세력은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 차는 1.5%, 표차는 고작 15만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 2년에 걸친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간 동안 정권 장악의 기반을 다졌다고 판단했는데, 민심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공화당 정부는 어렵게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낸다.

외부의 적, 북한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후반,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1960년대 군사 만능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걸고 김광협, 최광 등 군부 세력을 숙청함으로써 최고 지위를 공고히 했다.

내부 정리가 끝난 그들은 또 다른 적대 세력, 인민들이 미워할 적대 세력이 필요했고, 김일성의 손가락은 남쪽을 향했다.

1960년대 남북은 휴전선을 중심으로 한 군사 대립은 물론, 후방에 공작원들을 파견했었다.

조선노동당 산하 소위 3호 청사, 통일전선부와 작전부, 대외연락부는 소위 말하는 ‘위장 간첩’을 양성하고 파견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무부 산하 정찰총국은 소위 ‘무장 공비’라고 불리는 무장 공작원을 양성했다.

간첩이 정보 수집 및 혼란 야기가 주 임무였다면, 정찰 총국의 무장 공작원은 시설 폭파, 주요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1968년 북한은 공식적으로 120명, 비공식적으로 5백 명 이상의 공작원을 울진과 삼척을 통해 남쪽에 침투시켰다.

같은 시기에 남측에서도 육군정보대(MIU)와 육군첩보대(AIU), 해군정보부대(NIU), 해병대 첩보대(MIU), 공군20특무전대(AISU), 중앙정보국 산하 특수 침투 팀 등에서 대북 공작원을 꾸준히 양성하고 북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양국의 대립은 1970년대 들어서며 한풀 꺾인다.

1970년 세계를 긴장시키던 미국-소련의 냉전 체제가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냉전의 냉기가 한풀 꺾이게 된 것.

여기에 남과 북, 양 집권당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67년 열린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윤보선과 붙은 박정희는 지난 선거에서 겨우 떨쳐 낼 수 있었던 윤보선을 득표율 10.5%, 득표수 116만 표 차이로 따돌리고 박정희와 공화당 천하를 지켜 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1년 개최된 7대 선거에서 신민당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른 김대중에게 95만 표 차이까지 따라 붙으며 겨우 3선을 이뤄 낸 박정희 정권은 지금과 같은 갈등 구도가 더 이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북한 김일성 체제도 마찬가지였다.

일당이 국가를 지배하고, 김일성이 당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공고히 했지만 북한 경제는 점점 악회되어 갔고, 특히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면서, 중-소-북의 공산주의 혈맹 체제가 사실상 해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

이에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구조를 지켜 내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두 지도자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낸다. 1972년 7월 4일 발표된 남북공동선언이 그것이었다.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이 남북 공동으로 발표되면서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가 한반도에 넘실거렸다.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은 오히려 분단 체제를 가속화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맞게 통일을 준비해 갈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유신헌법체제로,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은 주체사상을 헙법에 규범화하고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는 사회주의 헌법 체제로 나아가게 된 것,

양 국 지도자는 각각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자주, 그리고 무력 지양이라는 두 원칙에 따라 양국은 표면적으로 서로에 대한 무력도발을 줄여 나간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서로 경쟁하듯 파견하였던 공작원 침투를 점차 줄여 나가게 된 것이다.

대표적 사건이 소위 실미도 사건이다.

1968년 4월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창설된 684 부대는 69년 평양 침투를 목표로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대기가 길어지고 결국 평양침투는 무기한 연기된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남북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구상 선언을 발표하면서 684부대는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최정예 부대에서 이제는 필요 없어진 혹이 되어 버린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한다. 그로부터 11일 후인 8월 23일, 684부대원은 기간요원을 살해 후 서울로 진격하다 폭사한다.

소위 실미도 사건과 7.4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북파 공작원 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에 들어간다.

각 군종별로 나뉘어 있는 북파공작원 양성 및 운용 기관들에 대한 점검과 권한 축소, 그리고 통합 절차에 들어가게 된 것.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1990년, 남한에서 대북 공작 작전을 총괄하는 국군정보사령부(Defence Intelligence Command), 소위 정보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72년부터, 비공식적으로는 1994년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미수복 지역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인원을 직접 투입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인, 조선족, 중국인, 탈북자 등 소위 협력자로 불리는 정보원들을 포섭했다.

인간정보(HUMINT)가 대북 공작의 주요 전술이 된 것이다, 정보사는 휴민트를 관리하는 체제로 변경됐다.

무수단 대포동 미사일 기지와 길주청년역에서 동천역까지 이어지는 비밀 선로의 사진을 찍어 온 것도 이들 협력자들이었다.

정보사는 단동과 길림 등에 위장 회사를 만들고, 협력자를 포섭하고, 그들에게 카메라와 달러를 쥐여 주던 시기의 이야기였다.

그런 정보사에서 다시 미수복 지역(북한)에서 직접 활동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시기는 1998년이었다.

구소련의 스커드 미사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북한 측 명칭 백두산, 미국 명칭 대포동 1호가 태평양에 떨어진 그 순간, 정보사는 민간 협력자가 수집하는 정보만으로는 북한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30여 년 만에 다시 미수복 지역에서 직접 활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하다면 폭파와 암살, 후방 교란을 수행할 수 있는 무장 병력을 양성한다.

거제, 진도 중도, 한산의 네 개 팀이 만들어진 것이 1999년이었다.

< 작전명령 06-11 : 철도복합운송선하증권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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