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3) >
리무진 한 대가 텍사스 주, 오스틴버그스톰국제공항(Austin-Bergstrom International Airport) 비즈니스 전용기 터미널 입구를 통과했다.
몇몇 차량만이 공항에 들어갈 때 보안 절차를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그 리무진도 그런 차량 중 하나였다. 미 연방항공국에 등록된 비즈니스 전용기 보유자들에게만 공항에서 제공하는 특권이었다.
리무진은 공항 차량 유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여 추력 1만 6천1백 파운드의 롤스로이스 BR725 터보팬 엔진 시동이 걸린 비즈니스 전용 제트기, 걸프스트림 G650 바로 앞에 부드럽게 멈추었다.
전용기 앞에 대기하고 있던 남성 승무원이 다가가 리무진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투피스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리무진에서 내렸다.
직원은 다른 문을 열기 위해 반대편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 문은 승무원이 다가오기 전에 열렸고, 열린 문으로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내렸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프스트림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타자, 걸프스트림은 문을 닫고 이륙 준비에 들어갔다.
“부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마실 것을 준비해 드릴까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기내 승무원이 중년 여성,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경영감사 부사장인 신시아 챔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앤, 뭐 좀 마실래?”
신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딸에게 물었다.
“저도 괜찮아요.”
앤 챔버가 말했다.
그 말에 신시아 챔버 전용기 소속 승무원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호출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비행기 뒤쪽 갤리로 가서 문을 닫았다.
객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비행기가 유도로를 타고 활주로 쪽으로 이동을 시작할 때까지 앤은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신시아가 말했다.
앤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양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베네수엘라에서 베르나와 함께 헬기를 탄 앤은 퀴라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CIA의 전용기로 갈아탄 뒤,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스틴에 도착해 앰뷸런스와 함께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시아 챔버를 보았을 때, 앤은 오스틴으로 온 것이 양어머니 신시아의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시아, 앤, 그리고 베르나 세 사람은 바로 앰뷸런스를 타고 오스틴 외곽에 위치한 한 병원으로 향했다.
택사스 주립대학교 의과대학 부설 아동정신의학센터.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아동 전문 신경정신의료기관이라 했다.
앤은 그 곳에 베르나를 두고 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 작은 아이를 곁에서 지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시아는 앤이 이곳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신시아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알죠?”
앤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 날카로운 말에 신시아는 잠시 말없이 그녀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두 번째니까.” “······.”
“앤 네가 미국에 왔을 때 치료를 받은 곳도 여기였으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앤은 그 말에 어릴 적, 어딘가에 입원해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곳이 오스틴이었던 것일까? 믿어도 될까?
“아동 신경 정신 분야 임상 시험에서는 가장 많은 연구 실적이 나오는 곳이고, 무엇보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의사가 가장 많은 곳이 여기 텍사스니까.”
“베르나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가 끝나면 그 때 집으로 데려갈 거야.”
신시아가 말했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어린 여자아이를 치료하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야. 충격을 받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도 처음이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앤은 말없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가 유도로를 따라 활주로로 향해 가고 있었다.
CIA에서 베르나를 신경 쓰고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르나가 기프티드가 아니라면 애써 그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치가 없었다.
베르나에게서 꼭 가치를 찾자면 그 작은 아이를 기프티드인 앤이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녀의 양어머니가, CIA 요원이 신경을 써 주었을 것이라고 앤은 생각했다.
그래서 앤은 평소처럼 고맙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신시아가 말했다.
앤은 입을 다물었다.
“사과해야 하지 않겠니?”
신시아가 다시 말했다.
“뭐를요.”
앤 챔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신시아는 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에게 언제까지 그런 태도를 보일꺼니?”
“······.”
“계속 말 안 할 건가 보구나. 다른 건 다 참아도 이번에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어. 엄마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내가 기프티드가 아니었으면!”
앤이 신시아의 말을 잘랐다.
“······.”
신시아는 말없이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내가 기프티드니까, 그래서 엄마 흉내를 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앤이 다시 말했다.
날카롭게, 충분히 상처가 되도록.
신시아는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앤 챔버에게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앤도 그 눈을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담긴 감정이 보였다. 신시아의 손바닥이 앤의 뺨을 때렸다.
“아프니?”
신시아가 물었다.
앤은 그저 놀란 눈으로 그녀의 양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아프니?”
신시아가 다시 물었다.
“······.”
(이륙합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신시아는 여전히 앤 앞에 서서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장님. 이륙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기장의 멘트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러나 신시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계속 같은 눈으로 그녀의 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마음보다 지금 맞은 그 뺨이 더 아플 거라고 생각하니?”
앤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양어머니의 눈에 담긴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깊은 슬픔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이 슬픔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이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신시아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맸다.
그제서야 비행기는 빠르게 활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 떠올랐다.
앤은 손을 올려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찌검을 당했다. 그리고 그 손찌검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 앤이 영어를 완벽하게 말하지 못하던 그 시절에.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엉덩이를 맞은 날이 있었다.
왜였지? 무엇 때문이었지?
앤은 기억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어설픈 영어, 어색한 발음, 그리고 피부색이 다른 엄마 때문에.
그날 자신도 모르게 엄마에게 소리쳤었다. 내 친엄마도 아니면서 걱정하는 척하지 말라고.
그날 처음으로 엄마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았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앤이 그 사실을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 누군가에게 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앤 챔버는 다른 이름을, 다른 양부모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앤은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왜 알리지 않았지?
눈.
자신을 바라보던 눈에 담겨 있던 슬픔 때문에.
오래전, 그리고 조금 전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그 슬픈 눈빛 때문에. 그래서 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활주로를 떠난 직후 계속 고도를 높인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이르자 안전벨트 사인이 꺼졌다.
시끄럽던 엔진 소음이 줄어들었다.
앤은 옆자리에 앉은 자신의 양어머니를 힐긋 보았다.
여전히 그 슬픈 눈으로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 슬픈 눈을 보고 앤이 말했다.
“미안해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단 한 번도.”
신시아가 입을 열었다.
“너를 내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신시아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앤은 고개를 숙였다. 양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너를 입양한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너를 키운 것은 내 선택이었어. 미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앤 챔버가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 살 수 있도록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내 선택이었어. 그리고 난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해 보지 않았어.”
“······.”
“너를 만난 그날 이후로, 오스틴 병원에서 너를 만난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너의 엄마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이 이상한 삶에서 가장 잘한 유일한 선택이었어.”
신시아가 말했다.
앤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직 가족만이 가지는 유대감으로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때려서 미안하구나.”
“미안······해요.”
“그래.”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두 사람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좀더 시간이 흘러 승무원이 서빙한 음료수를 마신 다음이었다.
“기억을 전부 떠올렸니?”
신시아가 물었다.
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하지는 않았어. 내가 아는 한.”
신시아가 말했다.
앤은 병원에서 기억을 지웠는지,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이 힐베르타를 죽게 만들었다는 기억을.
그러나 CIA가 그 사실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거기에 그녀의 양어머니가 관여하지 않았을까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린 후 베네수엘라를 떠날 때까지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했었다.
“엄마 얼굴이 기억나니?”
신시아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단 한 번도 이야기되지 않았던 주제였다.
앤은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느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얼굴은 흐릿하다.
오히려 큰언니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기억났다. 자신을 품에 안고, 성모송을 들려주던 큰 언니의 얼굴은 선명했다.
“네가 미국에 온 후.”
신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 왔단다.”
앤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양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사랑하는 두 딸을 잃은 아마도르 부인은 충격을 받았고, 그대로 병석에 누우셨지.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주변에서는 이러다 애 엄마마저 죽겠다고 이대로 둘 수 없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 치료를 할 돈도 없었고.”
앤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루 사이에 사랑하는 두 딸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우리는 가톨릭 복지재단을 통해 아마도르 부인을 미국으로 데려왔어. 심리 치료가 필요했고, 미국은 심리 치료가 잘 발달되어 있으니까. 핑계 대기에 좋았어.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마도르 가문의 장녀도 미국 땅을 밟았지. 서류 작업이 있긴 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는 않았고.”
앤의 눈이 커졌다.
“아마도르 부인과 그 장녀는 현재 샌디에고에 살고 있어. 아마도르 부인은 요즘도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두 딸을 위해 촛불을 켜고 계시지. 장녀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USCIS(미국 이민국)에서 젊은 남미 청년들에 대한 정착을 돕는 일을 하고 있고.”
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언젠가 이야기해 줘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늦게 알려 줘서 미안하구나.”
앤은 고개를 저었다. 그 힘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만나러 가지는 못할 거야. 만나면 그들은 더 이상 지금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테니까.”
신시아의 말에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가혹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구나.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나러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게 가장······ 미안하구나.”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앤의 말에 신시아가 앤을 바라보았다.
“나를 맡게 된 이후······ 엄마도 가족을 못 보게 된 것 아닌가요?”
그 말이 신시아는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슬픈 이야기 아니니? 가족을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는 게?”
그 목소리에 옅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