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2) >
8시간을 비행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완은 시애틀이 당분간 자신의 새 거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집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화려한 저택의 화려한 문이 열리자 한 중년 여성이 미소로 완을 반갑게 맞이했다.
자신을 맞이하는 중년 여성에게 완은 가볍게 인사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완은 자신을 인도하며 거실로 들어서는 집주인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서 배어 나오는 친숙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인 중년 여성은 완을 거실로 안내했고, 완이 소파에 앉자 직접 차를 내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중년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편안한 여행이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데려오시느라 이분이 더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완은 옆에 앉은 트레이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시애틀 외곽 머다이나 위치한 저택의 주인인 신시아 챔버(Cynthia Chamber)는 완의 말에 눈길을 트레이시에게로 돌렸다.
CIA 내에서 기프티드를 전담하는 두 사람이기에 트레이시와는 이미 구면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신시아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드세요. 차가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신시아가 두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완과 트레이시는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한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신시아가 물었다.
“저는 차를 잘 몰라서······. 하지만 향이 신비롭네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신시아는 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양에서 온 그녀의 감상이 듣고 싶었다.
“해로즈(Harrods)는 오랜만이네요.”
신시아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손님이 해로즈산 홍차를 알아챘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차 맛을 아시는 분이 계시니 앞으로의 티타임이 기대 되네요.”
완은 그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찻잔으로 즐길 수 있는 티타임이라면 호사스럽지만 거절할 수는 없겠는데요.”
“다기(茶器)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손님은 귀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죠.”
신시아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다. 왠지 자신이 가장 여기서 뒤떨어지는 품격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손님으로 있게 되나요?”
완이 물었다.
“네. 손님으로 계시게 됩니다.”
신시아가 답했다.
“이런 고급스러운 집에서 손님이라니, 부담스러운데요.”
그렇게 말하는 완의 표정에서 부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내 집처럼······은 어렵겠지만. 아, 그리고 손님과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어요. 지금은 잠시 여행을 떠났지만. 아무튼 제 딸아이와도 사이좋게 지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착한 아이니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신시아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따님이 절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손님과 티타임을 몇 번 가져 보면 불편함은 사라질 거예요. 그나저나 계속 손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네요.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신시아 챔버에요. 그냥 신시아라고 부르시면 되요.”
그 말에 완은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챔버 부인. 저는······.”
트레이시는 그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녀가 MSS의 요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녀의 이름은 몰랐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그저 한규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과, 이제는 가치가 없어진 중국 내 비밀 요원, 아니 배신자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저는······ 규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규······?”
“네, 규. 용맹(Brave)하다는 의미인데, 여자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죠?”
“그러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용맹하다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데요.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성별에 따라 이름을 한정하는 것은 고루한 생각이네요. 환영해요, 미스 규. 챔버가에 오신 것을요.”
트레이시는 규라는 이름이 한규호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을 규라고 불러 달라는 전직 MSS 요원의 미소를 보면서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
요.)
***
수많은 취재진들이 카라카스 외곽 부촌에 한 저택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생방송을 준비하는 기자들은 초초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들고 입을 풀거나 리허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흥분해 있었다. 최근 3주 동안 일어난 일들이 그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베네수엘라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연방 정부 앞에서 발생한 저격 사건이었다.
기자들은 그 저격 사건이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은 알지 못했다. 그저 흔한 정치 암투라고 생각했다.
차량 습격도 그저 흔한 차량 강도 사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 사건이 계속되었다.
카라카스-라 과이라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교통사고와 차량 화재 사건, 라 과이라항 정문 앞에 있는 푸에르토 카르텔 본부에서 발생한 의문의 총격 사건 그리고 그리고 까티오 농장에서 발견된 여성부장관의 시신.
짧은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각각의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결합이 무엇인지도 채 파악하기 전에 베네수엘라 전역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베네수엘라의 심장 카라카스와 그 주변 지역을 지배하는 범죄 카르텔의 멸망. 라 과이라 항만을 지배하던 푸에르토가 시체로 발견됐다. 거기에 조직에 간부들이 다수 사망했다는 소문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방위군 등 정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 충격이 다 가시기 전에 더블 티와 그 부하들이 폭사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삼두사 중 마지막 머리라는 엘 오로는 모습을 감췄다. 엘 오로의 회사들은 갑작스럽게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 믿을 수 없는 소문이 있었다.
라 만차 네그라.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삼두사를 지옥으로 끌고 갔다는 라 만차 네그라의 전설이 시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언론들은 당연히 허무맹랑한 그 소문을 무시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히어로가 범죄 조직을 처단한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언론인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라 만차 네그라는 방위군의 비밀 작전이 민중들의 시각에 왜곡된 허구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전히 그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저기 온다!”
모여 있던 기자 중 한명이 소리쳤다.
그 말에 저택 앞을 가득 매운 카메라들의 렌즈가 그쪽으로 향했다. 기자들은 생중계 리포트를 위해 자세를 잡았고, 카메라 보조는 조명을 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도밍게즈가 탄 군용차량은 저택에 접근할수록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다.
결국 저택까지 도달하지 못한 차량은 정문 10여 m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앞문이 열리고 대위가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도밍게즈와 더불어 최근 시민들 사이에서 얼굴이 알려진 대위는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내렸다.
곧이어 뒷문이 열리고 도밍게즈가 내렸다.
의회에 의해 부패감찰특별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도밍게즈는 체포 영장이 든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가 내리자 플래쉬가 더 많이 터졌다. 셔터 소리도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중령님!”
기자 하나가 빠르게 도밍게즈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다른 기자들도 빠르게 도밍게즈에게 접근했다.
당초 약속했던 취재 라인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도밍게즈 중령님! 크리스탈 카스티요 산타나 차관이 장관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도밍게즈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더블 티가 폭사하면서 카바렐라 카르텔은 한때 서부 카라카스를 지배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흩어졌다.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방위군에 제보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중 더블 티가 은신처로 사용하던 몇몇 장소가 밝혀졌고, 그 장소에서 더블 티와 차관이 대화를 나눈 녹음 파일이 발견되었다.
아주 더러운 대화를 담고 있는 녹음 파일이었다.
“중령님, 차관과 더블 티가 내연 관계에 있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다른 기자가 취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외쳤다.
도밍게즈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벌레들.
더블 티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벌레들이, 더블 티가 죽자 진실을 파헤치는 참 언론인 행세를 하고 있다.
도밍게즈의 눈에는 그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벌레들처럼 보였다.
“중령님, 라 만차 네그라에 대한 방위군의 공식 입장을 말씀 해 주십시오!”
다른 기자가 물었다.
그 질문에 도밍게즈는 발걸음을 멈추고 질문한 기자를 돌아보았다.
기자는 도밍게즈가 자신을 돌아보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치열한 보도 전쟁에서 그가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중령님, 현재도 전직 카르텔 조직원들이 시신으로 발견되는 등 사적 제재를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라 만차 네그라라고, 정의의 이름으로 카르텔을 정화했다고 발표하는 괴집단이 벌써 다섯 개가 넘었습니다. 시민들은 카르텔 조직원들이 죗값을 받는 것에 대해서
통쾌하다는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 범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령님, 소위 푸에르토 카르텔을 전멸시켰다는 라 만차 네그라가 방위군의 일원입니까? 방위군 비밀 작전 중 하나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도밍게즈는 속으로 웃었다.
인간 같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라 만차 네그라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생각 외로 머리가 좋고 이상한 농담을 가끔 한다고 설명하면 기자들이 믿어 줄까?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아이를 구하고, 카르텔 하나를 날려 버리고, 그럴 필요 없음에도 자청해서 청소까지 하고 다니는 멍청이라고 설명하면 기자들이 믿어 줄까?
무엇보다 담배를 공공재처럼 생각하는 아주 기본이 안 된 인간이라고 설명하면 기자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공식 브리핑은 오후에 특별 수사본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질문은 그때 받겠습니다.”
대위가 도밍게즈와 기자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틈을 만든 대위는 기자들을 해치며 저택 정문으로 다가갔다. 도밍게즈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한번 터져 나갔다.
저택 앞에 다가간 대위가 초인종을 눌렀다.
저택의 문이 열리고 저택의 주인이 모습을 보였다.
빈민 구제 정책으로 바리오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여자가 불법 자금으로 구입한 차명 부동산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리스탈 카스티요 산타나. 당신을 여성부 바렐라 장관 살해 및 시체 유기 공모, 반부패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문 앞에선 대위가 외쳤다.
전직 여성부 차관이었던 산타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플래시가 터졌기에, 그녀는 최대한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계단을 내려왔다.
문으로 다가가자 도밍게즈 중령이 끼고 있던 서류 봉투에서 체포 영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산타나는 체포 영장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의 이름과 혐의가 거기에 적혀 있었다.
영장 발부 판사의 이름이 낯익었다. 그녀와 저녁 식사를 몇 번 했던 기억이 있었다.
영장을 확인한 산타나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군 둘이 그녀에게 다가가 앙옆에서 팔짱을 꼈다.
원래대로라면 수갑을 채워야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수갑만은 피해달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개 같은 년아!”
기자들 뒤에 서 있던 군중에서 남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내 딸을 돌려내!” 중년 여성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카메라가 재빨리 소리 지른 중년 여성을 잡았다.
“내 딸을 돌려줘! 살아 있는지 확인만 해 줘!”
중년 여성은 오열하며 소리쳤다.
“바리오의 어머니 같은 소리 하네! 바리오의 포주 년아!”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매웠다.
산타나 전 차관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민중을 기반으로 언젠가는 베네수엘라의 여성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언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꿈처럼, 어서 빨리 깨야 하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