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1) >
그레이스 박사는 마이애미로 향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비행기에 타자마자 가방을 자신의 옆자리에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원래대로라면 스즈키, 그가 앉아 있었어야 할 1B 좌석은 마이애미 국제공항으로 가는 내내 비어있을 예정이었다.
그레이스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앤 챔버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 어린년이 감히 자신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개 같은 년.
그레이스는 어떻게 그 년에게 이 원한을 갚아 줄지를 고민했다. 사람을 써서 죽여 버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싸구려 동정심에 취해서 마구 날뛰어? 어디 미국으로 돌아오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어머. 박사님.”
그레이스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 자신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조심하라고 말했던 승무원이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무사하셨네요. 다행입니다. 박사님. 걱정했어요.”
이 년도?
승무원 옷을 입고 가식적으로 웃고 있는 이 년도 범죄조직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닐까? 나를 노리고 이 곳에 올 때부터 준비된 것이 아닐까?
그레이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승무원을 노려보았다.
승무원은 자신의 인사에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레이스 박사의 눈빛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위스키.”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네?”
“당장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그리고 담요도! 당장!”
그레이스 박사가 소리 질렀다.
아직 탑승 중인 이코노미 석 승객들이 갑작스런 큰 소리에 놀라 웅성대며 비즈니스 석을 돌아보았다. 갤리를 점검하던 객실 매니저도 그레이스 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져와! 당장 가져와!”
그레이스가 다시 소리 질렀다.
“박사님...”
승무원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항공사 방침에 따라 이륙 전에는 주류가 제공되지....”
“가져와! 가져오라고! 니년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니년까지 감히!”
그레이스는 더 크게 소리쳤다. 베네수엘라에서 느꼈던 좌절, 공포, 스즈키와 앤 챔버 두 연놈들과 도밍게즈로부터 당했던 굴욕 등을 모두 담아 소리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레이스 박사님?”
50대의 객실 매니저가 그레이스 박사에게 다가와 물었다.
“위스키 가져오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손님.” 매니저가 말했다.
“손님은 지금 항공연방법 규정을 위반하고 계십니다. 객실 승무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시, 객실 안전 책임자인 저희들은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법적 조치? 어쩔 건데? 감히 날 어쩔 건데?”
“이륙 전 승객의 언행이 안전 운항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저희 승무원은 절차에 따라 승객을 하기(下機)시키거나 공항 경찰에 인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길 원하시는 건가요?”
객실 매니저의 말에 그레이스는 깜짝 놀랐다. 비행기에서 내려야 한다고? 다시 베네수엘라로 들어가야 한다고?
“또한 향후 저희 항공사의 노플라이리스트(탑승금지명단)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방금 기세 좋게 소리 지르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그럼 안전한 비행되시길.”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잔뜩 화난 얼굴로 그레이스를 노려보고 있는 승무원의 등을 토닥이며 객실 뒤 쪽으로 데리고 갔다.
복도를 마주하고 반대편 1K에 앉아 있던 아고스토는 좌석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레이스를 보면서, 그녀가 며칠 사이에 할머니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마이애미 국제공항 외진 곳에 위치한 사무실에 감금된 그레이스는 이제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가 넘어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감금된 지도 벌써 대여섯 시간이 지났다.
비행기가 마이애미 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그레이스는 음료도, 식사도 거부한 채, 그저 담요를 뒤집어쓰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린 그녀를 맞이한 것은 마이애미 공항 경찰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이끌려 공항 터미널의 한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대여섯 시간을을 감금당한 것이다.
그녀는 짐을 빼앗겼고,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그래서 변호사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당황했고, 분노했고, 지금은 분노할 에너지마저 소모한 채로 그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똑똑
그녀에게 싸구려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생수 한 병을 건네주기 위해 공항 경찰이 찾아온 이후 3시간 만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허락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많이 기다리셨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레이스가 아는 사람이었다. 매리 캐서린 캔디 미 국무부 국제기구전담국 차관보. 그녀에게 앤 챔버의 지시에 따르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줄 알았었다. 더 이상 화낼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차관보의 얼굴을 보자, 미칠 듯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당장 차관보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게 무슨 짓이죠?”
그레이스는 그런 충동을 참아내며 캔디 차관보에게 말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어투로.
“그러게요. 참 이게 무슨 짓인지.”
그러나 차관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그레이스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그레이스는 시선을 계속 차관보에게 유지했다. 서류봉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오래 기다리셨고, 많이 힘드실 테니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캔디 차관보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봉투를 조금 더 그레이스 앞으로 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레이스는 차관보를 노려볼 뿐이었다.
차관보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칸소 주 웨스트 헬레나에 있는 필립스 커뮤니티 칼리지 오브 더 유니버시티 오브 아칸소(Phillips Community College of the University of Arkansas)에 부설 심리학 연구 기관이 있어요. 박사님께서 앞으로 근무하시게 될 곳이죠.”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에요.”
“말 그대로 시골 커뮤니티 칼리지에 처박혀 있어라?” “표현이 격하시네요.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잠시 머리를 식히시라는 이야기죠.”
“....”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한 4~5년? 잠시 공기 좋은 곳에서 취미생활도 하시면서....”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레이스가 몸을 일으키고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도대체 뭔데? 앤 챔버 그년이 뭔데? 대통령 딸이라도 되는 건가? 그년이 뭔데 감히 헌법에 보장된 자유권을 가진 미국 시민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거지? 지금 이것도 불법 구금이야! 고소하겠어. 당신도, 국무부도, 그 어린년도, 아메리칸 에어라인도. 전부 고소
할거야! 여기서 나가면 당장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바로 소장을 쓸 거야!”
차관보는 자신에게 격하게 소리치는 그레이스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자고로 아는 것만큼 볼 수 있는 법이다.
“아고스토 이사는 말이죠.”
차관보가 입을 열었다.
“아마 한 반 년 정도 컨트리클럽(연방 교도소)에 들어갈 거예요. 이민법과 고용노동법 위반 그리고 세금 탈루 뭐 이런 자잘한 것들이죠.”
그레이스는 선 자세 그대로 차관보의 입을 보고 있었다.
“아고스토 이사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알겠죠. 반 년 정도 교도소에서 머리를 식히면서, 아 내가 뭔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구나. 그리고 지금처럼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입을 닫고 살아야겠구나. 선량한 미국시민으로서 세금도 잘 납부하고, 불법 이
민 브로커 짓도 그만두고, 직원들 시급도 잘 주고. 베네수엘라니, 앤 챔버니 그런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레이스가 침을 삼켰다. 협박이다.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다.
“다행스럽게도 박사님은 오렌지색 옷을 입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박사님은 똑똑한 분이시니까. 저도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헬레나 웨스트는 그렇게 작지는 않은 마을 같더군요. 그러니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거기서 박사님이 조용히 계셔 주시고 그리고 앞으
로도 조용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신다면, 아마 더 좋은 연구소로 옮기실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더 이상 강의는 힘들겠지만.”
“헛소리하지 마! 연방정부가 시민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기자들에게 알리겠어! CNN에 당신 이름이 나오게 해주지!”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불합리함을.
“그레이스 박사.”
차관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얻고 싶은 게 뭐였지? 뭐였기에 7살 여자아이의 증언을 따온 거지?”
그레이스는 흠칫 놀랐다.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아이의 목숨과 바꿔 얻고 싶은 것이 뭐였지?”
차관보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CNN? 제보해 봐. 당신의 권리가 억압당했다고, 정부가 당신을 불법적으로 감금했고, 뭐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 보라고. 다 까보자고. 당신이 베네수엘라에서 저지른 그 추악한 인터뷰도 까고.”
“나는 인터뷰에 관여하지 않았어!”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그레이스는 인터뷰 도중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반응하는 것은 모두 아고스토에게 시켰다.
차관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는 어플을 실행시켰다.
녹음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도와주세요. 이사님.)
그레이스 자신의 목소리였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줍니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안 돌아가면?)
(이사님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레이스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저도, 그리고 아고스토 이사님도 실패를 짊어지고 돌아가게 되요. 저야 학계에 있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고스토 이사님은 큰일을.... 앞으로 의회에 진출하셔서 미국 내 라티노 커뮤니티를 위해 큰일을 하실 분이신데, 이대로 돌아가
면 경력에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어요.)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밖에는 우리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갱스터들이 가득한데. 더군다나 베네수엘라 정부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이렇게 호텔에 감금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럼이 예정대로 진행됐으면. 포럼 결과를 가지고 뉴욕에서 발표할 생각이었어요. 유엔 인권위원회에 상정하고, 나중에 본회의장에서 발표할 계획이었어요. 이미 유엔과 이야기가 다 끝나있었어요. 바티칸에서도 지지성명을 내기로 되어 있었죠. 어떤 의미인지 아시
죠?)
“그만.”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런데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포럼은 이미 취소되어버렸는데.)
(이사님. 베네수엘라에 인맥이 있으시죠? 인터뷰. 인터뷰 하나만 하면 되요.)
“그만!”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인터뷰?)
(네. 이사님 인맥을 동원해서, 인터뷰 대상 하나를 찾아주세요. 가족 중 누군가가 인신매매 당했거나, 적어도 실종된 사람을. 엄마들은 안 돼요. 너무 감정적이 되니까. 어린아이, 기왕이면 여자애가 좋아요. 그런 아이를 한명 찾아주세요. 그리고 여기에서, 안전한 이 호
텔에서 인터뷰하고 영상으로 찍는 거예요.)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멈춰! 제발 멈춰줘!”
그레이스는 소리치며 책상위에 있던 핸드폰을 잡아채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차관보의 손이 먼저 그레이스의 손을 쳐냈다.
“그만. 제발.... 제발 그만...”
그레이스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흐느끼듯 말했다. 그러나 차관보는 멈출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촬영한 인터뷰는 유엔 본회의에서 상영될 거예요. 본 회의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그 영상이 상영되면 그곳에 모인 모든 유엔대사들이, 유엔 직원들이, 미국 정치인들이, 신문과 방송국에서 온 기자들이 작은 소녀가 사라져버린 언니들의 이야기를 담담하
게 말하는 영상을 볼 거예요. 그리고 영상이 끝나면 다시 본 회의장에 불이 켜지겠죠? 불이 켜지면 스크린을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발언대로 향할 거예요. 유엔대사, 직원, 정치인들, 로비스트, 언론, 카메라 모두가 발언대의, 거기에 서 있는 ‘우리’를 볼 거예요. 남미의
여성과 아동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베네수엘라를 다녀온 미-베네수엘라 협력재단의 펠릭스 아고스토 이사와 저를 말이죠.)
차관보는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재생을 멈추었다.
“제발... 제발... 그만... 멈춰 줘...”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차관보는 그런 그녀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녹음이 공개되면.”
차관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면서 말했다.
“박사님은 실해당할 거예요. 라티노 커뮤니티가 당신을 살려두지 않는다는데 제 모든 재산을 걸어도 좋아요. 그러니 조용히 시골에 처박혀 있으세요. 학자로써 당신은 이제 죽었어요. 그저 숨이라도 쉬면서 살고라도 싶으면, 귀는 열고 입은 닫으세요.”
차관보는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차관보는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자업 자득이다. 그녀가 운이 없기도 했지만, 그녀의 인생을 끝낸 것은 그녀 자신이다.
차관보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 INTERMISSION : 텔레노벨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