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7) >
10일차
Arenera MINATACA 채석장 서쪽 1.6km 야산 중턱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VB는 스키마스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러진 손목과 탈구된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물론 대검을 피한 인간 같지 않은 몸놀림과 손목을 잡아챈 비현실적인 움직임도 현실로 와 닿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으으으읍”
입을 막힌 VB는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온몸으로 퍼져가는 통증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답해. 발현조건이 뭐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
이건 뭔 개소릴까? 어지간한 질문에는 전부 다 답해줄 수 있는 마음자세가 되었지만, 지금 그가 하는 개소리에는 어떠한 답도 해줄 수 없었다.
씨발. 입이라도 열어줘야 말을 할 거 아니야!
VB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전혀 모른다는 눈치군.”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남자가 귀에 그렇게 속삭였다.
VB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속삭임이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손으로 막혀 있던 입이 열렸다. 그가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낸 것이다.
VB는 욕을 할까? 아니면 간청을 할까 고민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고민 끝에, 그는 간청을 하기로 결정했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지긋지긋한 콜롬비아 내전에서도 살아남은 그였다. 그런 그가 외딴 베네수엘라에서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살...”
그러나 VB는 첫 음절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주먹이 되고, 그 주먹이 그의 턱을 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VB는 간청하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대답해. 발현조건이 뭐지?”
한규호는 자신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남자의 눈빛을 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가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자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고, 자신의 질문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눈치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담겨진 긍정의 기운을 읽었다.
한규호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낸 다음 그대로 주먹을 쥐고 턱을 쳐 버렸다. 언제나처럼 효율적인 한방이었다.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한규호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실망감이 들었다.
그냥 처리할 것을 괜히 번거로운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생각을 바꿨다.
아니다. 미국 놈들이 말하는 기프티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앞으로는 계속 반복해야 할 행동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반복해서 확인해야 한다. 기프티드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백금산의 개자식에게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다. 한규호는 실망스러운 기분을 뒤로 하고 남자가 조준하고 있던 저격 소총을 살펴보았다.
오르시스 T-5000(ОРСИС Т-5000)이었다. 러시아에서 만든 것치고는 특이하게 .338 Lapua Magnum 탄환을 사용하는 유효사거리 1500m의 저격소총이었다.
한규호는 다시 정신을 잃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의 애꾸눈처럼 Kar98k 같은 말도 안 되는 총을 쓰지는 않는군. T-5000이라면 1.5km까지 저격이 가능하긴 하니까.
정말 아닌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엎드려 사격 자세를 취한 다음 총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10배율 P88-4 조준경으로 채석장 여기저기에 몸을 숨기고 있는 더블 티의 광신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 조금 도와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엄폐하고 있는 카바예로 조직원들을 찾기 위해 총구를 움직였다.
***
“멍청한 새끼들!”
도밍게즈는 분노하고 있었다.
박격포 화력지원 요청이 거부당했다. 방송국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 재산인 채석장에 박격포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내부에 민간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포격으로 민간인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씨발! 개 같은 늙은이들 같으니!”
도밍게즈가 다시 소리쳤다. 상부의 늙은이들이 이번 작전의 전권을 그에게 주겠다고 해놓고선, 이런 식으로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방위군의 병력이 우세하다고 해도, 무작정 돌격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쓸데없는 피해만을 만들 뿐이었다. 적들은 더블 티에 대한 신앙으로 똘똘 뭉친 광신도들이었으니 전세가 불리하다고 사기가 꺾이거나 투항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가 더블 티라면,
예정된 패배 상황에서 전투를 벌여야 한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더블 티는 미친놈이니까 항복하는 대신, 최대한 많은 목숨을 저승길 동무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채석장에서의 전투는 일종의 시가전 성격이 강했다. 채석장, 설비, 내부의 건물, 이곳저곳 뚫려 있는 시추용 터널 등등. 결국 보병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미군 야전 교범에 따르면 시가전에서 아군의 사상률을 20%로 잡고 있다. 10명 중 2명이 죽거나 전투 불
능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화력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화력지원이 불가하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병력수송장갑차(APC)를 앞세워서 조금씩 전진하는 방법뿐인데, 이 방법 또한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IED(급조 사제 폭발물)를 길목 여기저기에 묻어두었다면?
IED의 효과는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저들이 숨어 있는 곳은 채석장이었다. 민간 지역 중 가장 다이너마이트가 많이 사용되는 장소였다.
IED가 있을 만한 곳을 박격포로 청소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였는데, 늙은이들의 걱정이 젊은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도밍게즈는 결정을 내렸다.
“시나리오 3으로 진행한다. APC가 선두로 돌입한다. 방식은 시그마.”
시그마(Σ), 그리스어로 S를 의미하는 시그마의 코드는 Safety And Slow.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작전이다.
“IED를 확인해가며 전진한다. 대전차 화기가 보이면 APC로 바로 철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보병들은 적 앞에 몸을 노출하지 않는다.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아. 저 새끼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니까, 우리 애들의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도밍게즈를 항상 따르는 대위를 비롯하여 이번 작전에 참가한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
산 중턱에서 10배율 스코프를 통해 전장을 보고 있던 한규호는 APC가 채석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본격적으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규호는 다시 총구를 채석장 쪽으로 돌렸다. 조직원들은 APC가 접근하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APC가 사격거리에 들
어오자, 채석장 쪽에서 먼저 사격을 시작했다.
구형 M113이 사격을 받자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천천히 계속 전진했다.
조직원들이 가진 총들은 일반적인 돌격소총들이었다. AK, AR-15 등을 사용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더블 티의 조직원들이 9mm 기관단총이 아니라 5.56mm, 7.62mm 탄환을 사용하는 돌격소총을 쏘고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 같은 전투에도 대비를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채석장에서 사격이 시작되자, 방위군 진지 쪽에서도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워낙 거리가 멀고, 서로 최대한 은폐된 상황이어서 서로가 발사하는 총알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서로 눈먼 총알을 쏘고 있었다.
한규호는 스코프를 움직이며 채석장을 살펴보면서 얼마 전 까티아 농장에서 보았던 수류탄을 떠올렸다. 수류탄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 작은 물건은 전적으로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더블 티가 어떻게 수류탄을 마련했는지는 몰라도 수류탄을 준
비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RPG-7 이라든가.
1958년부터 900만대 이상 만들어진 RPG-7 정도는 저 미친놈들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 라이선스 생산한 노린코 69형만 해도 중동에서 알라의 요술봉으로 애용되고 있으니까.
한규호는 스코프로 채석장을 죽 훑었다. RPG-7을 가지고 있다면 APC에 사용하려 할 것이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후폭풍을 피할 수 있도록 발사 장소는 제한된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건물 옥상 난간에 숨어 탄두를 발사체에 결합하는 조직원의 모습이 스코프에 잡혔다.
전혀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소총을 APC에 난사하고 있는 이유는 시선을 돌리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한규호는 더블 티가 많은 준비를 했음을 알았다. 군주론을 읽는다는 그 미친놈은 정말로 나라를 세울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한규호는 발사관을 결합한 RPG-7을 들고 몸을 낮추고 있는 조직원을 겨냥했다. 아마도 기관총 사격이나 저격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재고 있는 의도 같았다. 준비가 끝나면 빠르게 몸을 일으켜 난간에서 몸을 노출하고 재빨리 발사한 다음 다시 몸을 숨기려는 의도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일 테지.
한규호는 결심했다.
1.5km의 거리라면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적어도 1.5초는 걸린다. RPG-7을 들고 사격을 준비하는 저 사수가 탄두를 발사하려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확인하고 사격을 하면 늦다.
그렇게 생각한 한규호는 숨을 잠시 고르고, 우선 첫 발을 지금 목표의 머리가 있는 곳을 향해 쏘았다. 그리고 목표가 일어났을 때, 그의 머리가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두 번째 탄환을 발사했다.
***
방위군 저격수는 채석장 건물 옥상을 감시하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발사하는 총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는데, 유독 옥상만이 조용했다.
방위군 저격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할당된 구역을 살펴볼 뿐이었다. 누군가 나타나면 쏜다. 그게 그의 임무였다.
그런 그의 조준경에 드디어 움직임이 잡혔다. 옥상 난간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올라왔다. 저격수는 그 머리를 향해 재빨리 조준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상반신이 완전히 난간 위로 올라왔을 때, 그때 그의 손에, 정확히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
었다.
RPG-7. 대전차 로켓이었다.
저격수는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지금 방아쇠를 당긴다 하더라도, RPG-7의 발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늦어도 쏘기는 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방위군 저격수는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총구에서 화염이 막 터져나가려는 그 순간에, 초점이 흐려지는 스코프 너머로, 옥상에서 RPG를 들고 있던 조직원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총이 발사되고, 반동이 사라진 다음 그는 다시 스코프로 옥상을 확인했다.
없었다. RPG도, RPG를 든 조직원도, RPG가 발사되었을 시 발생하는 후폭풍도, 후폭풍에 의해 날아오르는 먼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방위군 저격수는 당황했다. 잘못 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쏜 총알이 그를 처리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다음 절차를 수행했다.
바로 옆에 둔 무전기를 들고 빠르게 외쳤다.
“RPG! RPG! 옥상에 대전차 화기 발견! 반복한다! RPG! RPG! 옥상에 대전차 화기!”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