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18화 (119/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5) >

7일차

산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가 있는 산 호세 병원 6층 특별 병실을 어제처럼 마지막 석양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한규호는 침대에 누워 두 팔로 머리를 괴고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텔레노벨라가 방송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계속 싸우다가 웃고, 화해하고 키스하다 다시 싸우고 울고를 반복했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한규호였지만, 그가 스페인어를 알아듣는다 해도 절대로 텔레노벨라라고 하는 장르에 빠져들지 않을 것

같았다.

한규호의 눈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서용석. 이곳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한규호는 확신했다. 도밍게즈가 이야기한 남자는 서용석이다.

이마부터 턱까지 칼자국이 선명하고, 왼쪽 귀가 날아간 북한 특수부대 소속 남자가 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정확히는 백금산에서 그가 호위하던 그 개자식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개자식이 북한에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고, 설사 있다 해도 그를 찾으러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서용석. 그에게도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용석의 정찰대와 한규호의 진도팀은 서로 국경을 넘어 다니며 상대방의 목을 따고 다녔고, 무엇보다 서용석 그 자식도 백금산의 그 일에 대해서 채무가 있었다. 물론 그도 한규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왼쪽 귀를 날려버린 것이 한규호 그 자신이니까.

서로가 군인이었고, 명령에 따라 서로의 목숨을 노렸는데, 군복을 벗었다고 해서 웃으며 손을 맞잡고 옛일을 회고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한규호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 개자식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면 서용석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용서할지는 나중 문제이지만.

그리고 지금 능력을 얻은 한규호는 그가 용서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그를 만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정보를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베네수엘라에 오길 잘 했군.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시의 부탁으로 미국 작전을 하나 해주었다. 미국 놈들이 한규호를 파악하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그래서 한규호의 실체가 드러나 버렸지만, 한규호도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었다.

언젠가는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다만 생각보다 그 시간이 빨라졌을 뿐이었다. 앤 챔버라는 사람도 변수로 작용한다.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한규호에게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이 될 것은 없다.

무엇보다 서용석. 그 늙은이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도밍게즈의 말처럼 그 늙은 호랑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조국을 버렸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다.

용병, 아니면 독립요원. 한규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그 자식을 만나러 북한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식이 북한에 있지 않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가보기는 가봐야 되겠군.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미국을 이용해야지 이용당할 생각은 그에게 없었다. 어쩌면 지리한 밀고 당기는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요하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할 것이다. 앤 챔버의 목에 칼을 들이밀 필요가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CIA 국장이든, 미국 대통령이든 필요하다면 그는 이용할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다.

텔레비젼 화면이 바뀌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텔레노벨라 대신 긴급 속보화면이 흘러나왔다.

한규호는 시계를 보았다. 도밍게즈가 알려준 그 시간이었다.

“능력 있군. 도밍게즈 가문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군.”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한규호에게도 익숙한 건물이 비춰지고 있었다.

까티아 농장이었다.

***

7일차

S.A CCS 보험 본사 건물(Seguros S.A CC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서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져 있는 S.A CCS 보험사 본사 건물 17층 자신의 집무실에 있는 오르테스 마르코스 마리레즈(Orestes Marcos Ramirez), 일명 엘 오로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가 이 시간에 텔레비전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이 시간에 주로 방송되는 텔레노벨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정오에 그의 정보망에 재미있는 소식이 잡혔다.

더블 티의 구역인 까티아 농장에 장관의 시체가 묻혀 있고, 오늘 저녁에 방위군이 그 곳을 급습한다는 정보였다. 오후 7시 45분에 급습이 시작되면 카라카스 대부분의 방송국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뉴스를 방송한다는 정보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정보대로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긴급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까티아 농장에 나가 있는 기자가 급박한 목소리로 리포팅을 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까티아 농장에 대한 압수 수색은 단순히 실종된 여성부 바렐라 장관의 시신을 찾기 위한 목적은 아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티노 토르, 일명 더블 티라고 불리는 카바예로 카르텔의 수괴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특히 카바예로 카르텔이 그동안 수익사업으로 진행했던 미성년자 인신매매를 뿌리 뽑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전해왔습니다. 현재 까티아 농장에서는 제 5방위군과 검경 합동 조사팀, 과학수사대가 함께 압수수색 및 장관 시신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엘 오로는 도밍게즈를 떠올렸다. 더블 티의 부하들이 아이를 보호하는 제 5방위군과 교전을 벌인 것은 이미 그의 정보망을 통해 아는 바였다. 도밍게즈가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화면이 바뀌었다. 뉴스 캐스터는 이런 저런 쓸데없는 말을 한 다음 긴급하게 입수했다는 영상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모녀가 화면에 나왔다. 딸을 안고 있는 엄마는 더블 티가 지배하는 암파로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얼마 전 더블 티에 의해서 아들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제공된 장비를 빌미로 딸을 납치당할 뻔 했다고 울면서 말했다.

더블 티가 바리오를 보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리오의 주민들을 소유물로, 가축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더 많은 아들들이 죽어 나가고, 더 많은 딸들이 팔려나가게 된다고, 더 이상 이대로 참고 있으면 안 된다고 울면서 호소했다.

화면이 바뀌고, 자신을 카바예로 카르텔 조직원의 전 조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 오로는 모르는 남자였다. 도밍게즈가 거짓 조직원을 내세웠거나, 아니면 엘 오로가 모를 정도로 하급 조직원 같았다.

그 남자는 자신이 카바예로 카르텔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인신매매 작업을 지휘했다고 설명했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게 상당히 자세하게 증언했다. 엘 오로가 보기에도 아주 그럴싸해 보였다.

엘 오로는 조금 더 화면을 보다가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껐다.

더블 티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공포와 카리스마였다. 공포와 카리스마로 지역을 지배하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그렇기에 더블 티가 숨으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민중이 그를 지키니까. 더블 티의 공포와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주민들이 그를 감쌀 것이다.

엘 오로도 더블 티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지금은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한다면 빠른 시간 안에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도 모르고 있었다.

방위군도 모를 것이다. 방위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대를 동원해 주민들을 압박해 더블 티가 숨어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다. 그러면 민심은 방위군을 등지고, 더블 티를 더 깊은 곳에 숨길 것이다. 그를 감쌀 것이다.

그런데 도밍게즈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민심이 그를 지킨다면 민심과 격리시킨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고지식한 군인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생각할 수 있다고 해도 아주 짧은 시간에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누가 있을까? 엘 오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밍게즈, 그저 가문의 후광을 입은 단순한 군인인 줄 알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 오로는 도밍게즈 가문의 4남을 자신의 리스트에 올렸다. 포섭하거나, 아니면 죽여야 할 대상들이 올라 있는 살생부 리스트에.

***

7일차

산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술잔을 들어 빛을 비춰 보았다. 잔에 담긴 호박색의 액체가 잔을 타고 찰랑거렸다. 그는 가볍게 잔을 돌려 파문을 만들었다. 잔에 담긴 액체가 만들어낸 파문에 병실 조명의 빛이 쪼개졌다 합쳐졌다 하며 다양한 색을 만들고 지웠다.

한규호는 잔을 입으로 가져와 가볍게 한 모금 머금었다.

도밍게즈가 디플로마티꼬를 따라주면서 벨벳처럼 부드러운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입에 넣어보니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복합적인 달콤한 향이 목을 타고 위장으로 넘어갔다. 위스키와는 다른 짜릿함이 그 뒤를 따랐다.

“괜찮군.”

한규호가 말했다.

“괜찮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밍게즈가 말했다.

“럼은 처음이십니까?”

도밍게즈 옆에 앉은 대위가 물었다.

“뭐, 럼이라고 해도 말리부 정도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그런 쓰레기와 비교하면 안 되지. 베네수엘라의 럼은 세계 최고니까.”

“쓰레긴 줄 몰랐군.”

“싸구려 사탕수수에 공업용 알콜을 부은 다음, 인공적으로 코코넛 향을 첨가한 그런 술은 쓰레기라는 말도 아깝습니다.”

대위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리큐어 중 하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규호는 그저 웃었다. 그리곤 자신의 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움과 강렬함,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한데 뒤섞여 그의 영혼을 적시는 느낌이 들었다.

“제보가 좀 왔나?”

한규호가 물었다.

“뉴스가 나오자마자 방송국 전화기에 불이 났다는군.”

“그래?”

의외였다. 그렇게 빨리?

“빨리 뉴스 따위는 집어 치우고 텔레노벨라를 계속 방영하지 않으면 방송국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시청자 의견이 대다수였고, 개중에 몇몇 전화는 더블 티를 잡지 못하는 검경과 방위군에 대한 욕설이었고, 아주 극소수의 제보전화도 왔다고는 하더군.”

“그렇다면 다행이군. 극소수라도. 어떻게 움직일 건가?”

“바로 움직일 수는 없지. 확인을 안 할 수도 없고. 겨우 민심을 떼 놓았는데, 다시 민심이 돌아가도록 할 수는 없지. 검찰과 경찰에도 일체의 움직임을 멈추어달라고 요청해 놓았어.”

“그런가. 현명하군.”

“아무튼 며칠은 기다려봐야지. 기다리다 보면 제보 전화도 방향성을 보일 거고, 많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더블 티 그 새끼가 있겠지.”

“그 새끼가 있을 겁니다.”

대위가 한규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내가 부탁한 것은?”

한규호는 대위로부터 술병을 건네받아 대위와 도밍게즈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우선 외교부와 국방부 쪽에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해놓았네. 알다시피 워낙 미친놈들이라 별로 기록을 남긴 게 없을 거야. 그래도 뭔가 나오는 대로 알려달라고 부탁은 해 놓았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용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어제, 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이었다. 한규호의 부탁에 의해 도밍게즈가 서용석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고 해도, 무언가를 알아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도밍게즈는 몇 시간 전 까티아 농장에 가서 장관 시체를 꺼내고 온 참이었으니, 그가 서용석과 관련해 움직일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한규호는 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혹시라도 내가 이곳을 떠난 다음에 알게 되는 게 있으면 이리로 알려주게.”

도밍게즈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영어로 된 회사명과 +82로 시작하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타에충..... 트레이드 앤 로지스틱스?”

“태청이라고 읽으면 되네. 태청 트레이드 앤 로지스틱스. 직통 번호니까 미스터 형원 킴에게 베네수엘라의 친구가 전할 소식이 있다고 말해주면 될 꺼야.”

“흠. 발음이 어렵군. 타에청, 흉원 킴.”

“태청, 형원 김.”

도밍게즈는 잘 모르겠다는 듯 쪽지를 옆에 있는 대위에게 넘겼다.

“태청 트레이드 앤 로지스틱스, 형원 킴. 기억했습니다.”

쪽지를 받으며 대위가 한규호에게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두 사람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밍게즈 자네에게는 아까운 부하야.”

“내가 어때서!”

도밍게즈가 발끈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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