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3) >
7일차
북부창고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까레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머리가 너무 아파 자신이 정신을 차린 건지, 꿈인 건지, 죽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 드는 생각이라고는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갈증이 얼마나 심한지, 몸속 세포 말단까지 바싹 마른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는군.”
까레라의 귀에 누군가가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레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려 머리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 고통이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님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양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관자놀이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고통이 기존의 고통을 상쇄시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까레라는 몇 초간 더 관자놀이를 문지른 다음 조금 괜찮아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앞에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까레라도 익히 알고 있는 제 5방위군의 도밍게즈 소령이었다.
까레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만나고 싶지도, 만나서도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런 도밍게즈 소령이 그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까레라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런.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셨나 보군. 여기 기자님께 물 한 잔 가져다 드려라.”
도밍게즈가 말하자 누군가가 다가와 물 한 컵을 내밀었다. 까레라는 그 물 컵을 받아 황급히 들이켰다. 너무 황급히 들이키느라 물 일부가 기도로 들어갔고, 까레라는 심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까레라는 온 몸을 비틀며 헛기침을 하면서도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이 몸을 비웃다니.
“괜찮나?”
기침이 잦아들자 도밍게즈 소령이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까레라는 숨을 고르면서 생각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기자야.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 되었다고 해도, 정규군인 방위군이 기자를 어쩔 수는 없어.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 나는 기자야.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치켜들고 소령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령?”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아 등받이에 팔을 괴고 그를 바라보던 소령의 얼굴에 반응이 나타났다.
“방위군이, 민간인을, 그것도 언론인을 이렇게 함부로 잡아다가 구금하는 행동이 용납될 것 같소? 불법 행위임을 모르고 있소?”
말과 글.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무기였다.
도밍게즈는 그 말에 잠시 놀란 눈으로 까레라를 바라보다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풀면서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불법 구금이라니. 그런 무서운 단어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지금, 여기,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불법으로 구금하고 있는 것 아니오?”
까레라는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도밍게즈의 말을 잽싸게 끊으며 말했다.
“허어. 참 오해하면 곤란한데.” “오해? 뭐가 오해란 말이오! 설명하시오! 소령!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방위군에 의해 언론인이 불법 구금당했다는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면, 그냥 옷 벗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오!”
“끝나지 않는다라. 이건 진짜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냐고? 언론인을 불법 체포하고 고문한 걸 그냥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하나? 엉? 당신은 단순히 리포르테24 편집인 한 명을 체포한 것이 아니야! 베네수엘라 언론인 모두를 체포한 것이고, 나아가 전 세계 언론인 모두를 체포한 것과 다름이 없어! 국제신문편
집자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 IPI),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eres, RSF)가 모두 당신을 질타할 거야. 국제사회가 여기에 주목할 거야!”
까레라는 도밍게즈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이겼다. 자고로 싸움은 기세다. 그리고 자신이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도밍게즈의 저 고민하는 두 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도밍게즈는 고민하고 있었다.
죽여 버릴까?
더블 티처럼 그냥 죽여 버린 다음 어디 아무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릴까?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쓰레기를 죽을 때까지 패고, 다시 치료해서 그 다음에 패죽여 버릴까?
도밍게즈는 까레라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발자국 뒤에 선 한규호는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스페인어로 하는 대화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어도 까레라 저 자식이 도밍게즈의 속을 긁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도밍게즈가 열 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휴우.”
도밍게즈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까레라 기자.”
“말해 봐! 설명해 봐!”
까레라가 다시 소리 질렀다. 한규호는 도밍게즈의 발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좀 닥치고 쳐들어 이 새끼야.”
뒤에 서 있던 톨레도 상사가 다가와 까레라에게 으르렁거렸다.
까레라는 움찔했다. 그가 그토록 노력해 만들어놓은 기세가 한순간에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러지 말게. 상사. 놀래시잖냐.”
도밍게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톨레도 상사는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여전히 까레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쓰레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까레라 기자. 진정하시고.”
도밍게즈가 다시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
까레라는 겁먹은 표정으로 톨레도 상사를 흘낏 보고는 바닥으로 눈을 깔았다.
“오해하면 곤란한 게, 까레라 기자를 여기로 데려온 것은 우리가 아니야.”
그 말에 까레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게 외치려다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톨레도 상사를 보고 벌린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본 도밍게즈가 살짝 비웃은 후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듣고 있으니 좋군. 기자가 너무 만취한 상태로 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보고, 내 친구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야. 카라카스의 밤거리는 위험하니까요. 안 그런가 친구?”
친구? 친구라는 단어가 갑자기 왜 나왔지?
까레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도밍게즈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 곳에 서 있는 남자는 까레라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메리어트 호텔에서 본, 자신에게 꺼지라고 말했던, 그레이스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진 동양인 남자였다.
까레라는 다시 도밍게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그렇다면 당신들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까레라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우리는 그저 친구한테 놀러 왔을 뿐이야. 놀러왔다가 저 친구가 구해온 당신을 만나게 된 거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도밍게즈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까레라는 우선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밍게즈를 만났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 그러면.... 저... 저는 그냥 가도 되지 않을까요?”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떻게 감히 언론인에게 가라 말라 그런 말을 하겠어? 감히 기자님에게 말야. 모셔다 드릴까?”
도밍게즈가 말했다.
“아니요! 아.. 아닙니다.”
까레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방위군의 차를 타고 방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간다? 자기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막 의자에서 일어서는 까레라에게 도밍게즈가 말했다.
“네.. 네?”
까레라가 일어서다 멈춘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했다.
“기왕 이렇게 만난 거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도밍게즈가 앉은 자세 그대로 까레라를 보면서 말했다.
“구...궁금한 거...라면...”
“뭐. 별건 아니고, 더블 티가 어디 있는지 그거 알려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모릅니다!”
까레라가 즉답했다.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설마 내가 더블 티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린 것을 벌써 알았을까?
“아. 모르는구나. 모르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정보 고마워.”
“저... 정보?”
“덕분에 더블 티를 목을 죌 수 있겠어. 보도 자료에도 꼭 써줄게. 리포르테24의 까레라 편집장님께서 제공해주신 정보입니다. 이렇게.”
“무...무슨 저...정보,,,,를?”
“까티아 농장.”
“까...까티아?”
“그래. 거기. 장관 시체 거기 있다고 알려준 것 말이야. 겸손할 것 없어. 중요한 정보니까.”
“자... 장관?”
“여성부 장관 거기에 묻었다고 ‘당신’이 알려줬잖아. 우리 ‘방위군’에게.”
까레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블 티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럼을 퍼마셨던 것은 생각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 기억이 없다.
정말 술을 미친 듯 퍼마시다가 언제나처럼 여자가 필요해서 나갔던가? 나갔다가 우연히 쓰러진 자신을 저 동양인이 발견한 것인가? 그래서 만취한 자신이 막 떠벌렸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까티아 농장, 그래 그곳이 더블 티가 자주 들르는 장소 중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관의 시체에 관해선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거짓말이다. 지금 소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함정이다. 함정에 빠졌다.
“기자님 가신다. 모셔다 드려라.”
도밍게즈가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 손목을 까레라가 잽싸게 잡았다.
“.... 뭐지?”
“소...소령.”
“소령?”
그를 아직까지 노려보고 있던 톨레도 상사가 말했다.
“아... 아니. 소령님. 도밍게즈 소령님!”
까레라가 빠르게 말했다.
이 손을 놓치면 나는 죽는다. 절대로 죽는다.
도밍게즈는 까레라의 비굴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 새끼는 태어날 때부터 개자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정말 정말 모릅니다! 애초에 더블 티 그 새끼는 지 부하들도 믿지 못해서 까바예로 몇몇을 제외하면 아예 자신에 대해서 알게 두질 않는단 말입니다. 까바예로 놈들은 본부 같은 것도 없는 거 아시잖습니까! 정말 모릅니다. 저는! 진짜 왜 안 믿어주십니까?”
까레라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쳐가면서 소리쳤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신의 가슴을 열어 마음을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블 티 그 새끼가 민중을 지배하는 법 잘 아시잖습니까. 단순히 공포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카리스마, 그 빈민촌의 가난뱅이들을 휘어잡은 카리스마까지 있는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거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진짜, 정말, 모릅니다. 저 같은 게 어떻게 알
겠습니까! 제발, 제발 좀 믿어주세요! 제발 좀!”
그러나 까레라의 진실어린 외침은 그의 앞에 서 있는 톨레도 상사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가.”
“네?”
“아는 거 없으면 꺼지라고.”
“상사님!”
“왜? 무서워? 더블 티가 니 모가지 딸까봐 두려워? 걱정 할 필요 없어. 걱정 마.”
상사는 그렇게 말하고 뚜벅뚜벅 걸어가 책상위에 놓여있던 물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까레라에게 가져와 그의 눈앞에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더블 티 그 새끼가 민중을 지배하는 법 잘 아시잖습니까. 단순히 공포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카리스마, 그 빈민촌의 가난뱅이들을 휘어잡은 카리스마까지 있는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거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진짜, 정말, 모릅니다. 저 같은 게 어떻게 알
겠습니까!)
조금 전 까레라 자신이 소리쳤던 내용이 그대로 흘러 나왔다.
“더블 티 그 개새끼에게는 니가 말 안했다고, 우리 의리 있는 까레라 기자가 절대로 거처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해줄게. 원하면 복사도 해주고. 필요해? 복사 해줄까?”
까레라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