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2) >
6일차
산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몇몇 구역을 제외하고 병원의 모든 불이 꺼지는 밤 10시. 한규호는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특정 코드를 입력해야만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 어린이 병원은 아마 도밍게즈 가문의 일종의 안전가옥(Safety House) 같았다. 한규호가 머무는 병실은 병원에서도 몇몇 사람들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보안설비가 완비되어 있었다.
지금 그가 타는 엘리베이터만 해도 그랬다. 오직 이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6층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지하 4층에 있는 숨겨진 문을 통과해야 했다.
몇 시간 전 찾아왔던 노기자도 그 복잡한 방법으로 6층에 들어왔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에게 건방지게 말하던 대위였다.
도밍게즈의 부하 중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자신을 그저 앵글(angle)이라고 부르라던 대위가 한규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대위는 한규호가 나타나자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를 며칠 전 보았던 캠리로 인도했다. 캠리로 가기 위해 보안장치가 되어 있는 문을 3개나 지나야 했다.
한규호는 조수석에 앉아 주소가 적힌 종이를 대위에게 내밀었다. 대위는 시동을 걸기 전 그 종이를 뚫어져라 본 다음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어떤 곳이오?”
한규호가 물었다.
“더블 티가 지배하는 바리오 남서부 외곽에 있는 엘 훈키토(El Junquito)지역입니다. 빈민층과 중산층이 섞여 사는 지역이고, 얼마 전 폭도들에 의한 폭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30분 정도 걸립니다.”
종이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씹어 삼킨 대위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더블 티도 거기 있을 것 같소?”
한규호가 물었다.
“돈을 걸어야 한다면 없다는데 걸겠습니다. 몇몇 카바예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새끼니까요. 그런 새끼가 까레라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차량은 어둠이 내린 남 카라카스로 나왔다. 그나마 부촌인 이 지역은 카라카스 내에서도 아직 치안이 유지되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도 시속 20km로 저속 운전한다면 어디선가 날아올 총알이 운전석 창문에 박힐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흠.”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한규호는 가설을 세웠다.
까레라라는 그 쓰레기를 찾아달라고 도밍게즈에게 부탁을 했고, 도밍게즈가 그의 대부에게 그 부탁을 전달했다.
더블 티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허락 없이 움직였다는 이유로 한 소녀를 납치하고, 그 소녀의 담임선생이라던 여교사를 살해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소개한 까레라는 당연히 살아 있을 수 없었다. 까레라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거기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까레라가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살아있지 못할 인물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니까.
까레라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요청했는데,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저 알아보겠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 한규호가 까레라였다면 살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까?
베르나와 여교사를 더블 티에게 팔아먹은 놈이 까레라였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뭐라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블 티에게 밀고한 놈이 그 자식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더블 티는 까레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연금해두고 있는 것일까?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다. 거기 까레라가 있다면 데려오면 그만이다.
까레라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나, 분노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까레라 그 자식이 바리오 어딘가에 두더지처럼 숨어있는 더블 티를 찾을 단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푸에르토는 어떻게 했소?”
한규호가 물었다. 조금 전 찾아온 노기자가 푸에르토가 죽었다고 말했다. 아마 한규호가 데려온 그날, 오래전 잃은 아이를 기억하는 아버지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한규호가 궁금한 것은 무법자가 아닌 정규군인 그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였다.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장을 끄집어낸 다음 고속도로 표지판에 걸어두고, 그 자식의 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대위는 정면을 주시하면서 말했다.
“써놓고 싶었지만... 시신은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기 쉬운 곳에 두고 왔습니다.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이 발견해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말이죠. 저희는 나라의 녹을 먹는 방위군이니까요.”
“그것도 나라의 녹을 먹는 방위군이 할 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휴가 중이었으니까요.”
“일리 있군.”
한규호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전직 엘 나씨오날 기자이자 현 리포르테24 편집장인 살바도르 까레라는 엘 훈키토(El Junquito)의 한 자동차 정비소에서 잔뜩 술에 취해 있었다.
며칠 전 그는 호텔에서 축객령을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인과 방위군의 도밍게즈가 그에게 꺼지라고 말했다.
문제는 자신의 편에 서 주었어야 할 그레이스 박사가 그들을 제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레이스 박사가 더 강한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꺼지라고 말한 그 원숭이를 그레이스 박사가 제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레이스 박사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신에게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약속한 그레이스보다 꺼지라고 말한 원숭이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호텔을 나오는 까레라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X됐다. 완전히 X됐다.
아무리 희망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증인보호프로그램은커녕, 미국으로 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원숭이의 감정 없는 눈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바로 더블 티를 찾아갔다. 그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조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더블 티, 아니, 더블 티님을 만나고 싶다고,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말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조직원이 바로 차를 몰고 와 그를 더블 티님에게 안내했다.
우람한 체격에, 대머리까지 문신으로 덮여있는 더블 티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처럼 위축된 적은 없었다.
그저 동네 깡패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거물의 카리스마를 몸에 둘둘 감고 있는 더블 티 앞에서, 까레라는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얼마나 쓸모 있는 인재인지를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더블 티가, 아니, 더블 티님이 그에게 물었다.
“보호를 원하는가?”
티노 토르가 대학을 졸업하고 빈민운동을 막 시작한 햇병아리 사회운동가였던 시기에, 까레라는 이미 엘 나씨오날의 중견 기자 중 한명이었다.
현실도 모르고 날뛰다 높은 분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까레라는 병신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거물이 되어버린 더블 티에게 무릎을 꿇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보호를 원합니다. 더블 티님.”
자신의 말에 자신의 새로운 군주께서 어떤 표정을 보였는지 까레라는 알지 못했다. 머리를 땅에 쳐 박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보호인지, 감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비소에 럼(Rum :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주)은 가득했으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까레라는 비워있는 잔에 럼을 따랐다. 2016년 스페인 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Ron Pampero가 빈 잔에 채워졌다. 2년간 오크나무에서 숙성된 프리미엄 럼이 지금 그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제만 해도 그를 보호하는, 어쩌면 감시하는, 다른 조직원들이 있어 같이 잔을 들었는데, 어제 그들은 꼼짝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그 혼자 잔을 채우고 있었다.
사탕수수 함유량이 80%가 넘는 프리미엄급이라고 해도 럼은 럼이었다. 그에게는 내일 아침 지옥 같은 두통이 예약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잔을 채웠다. 그래야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한 병을 다 비운 그는 다시 술 저장고로 사용하는 자재창고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새 술병을 하나 더 꺼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씨발. 어디 갔다 온 거야? 하도 안와서 다들 뒈진 줄 알았잖아. 어서 와서 한잔씩 마시자고.”
까레라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잔뜩 취한 상태에, 술병까지 흔들었기에 까레라의 눈은 지금 막 들어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말없이 그에게 걸어와 그가 잡고 있던 술병을 잡을 때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email protected]”
다가온 사람이 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들어 보는 언어였다.
그리고 그의 턱에 충격이 작렬했고, 그의 뇌는 그 충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
한규호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자신에게 술병을 흔들며 뭐라고 하는 까레라를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스페인어를 알지 못해도, 잔뜩 꼬부라진 그의 혀에서 그가 이미 만취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규호는 조금은 허탈한 기분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 장소로 들어오기 전 대위와 더블 티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 내기를 걸었다. 더블 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블 티가 있다에 술 한병을 베팅했는데 더블 티는 없었다. 더블 티가 신뢰한다는 카바예로는
커녕 새끼 조직원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잔뜩 취한 까레라 뿐이었다.
한규호는 그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까레가가 잡고 있던 술병을 잡았다.
“술은 해결 됐네.”
한국말로 중얼거리고는 까레라의 턱을 후려 쳤다.
그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몸을 잠식한 알콜 때문인지, 까레라는 깔끔하게 정신을 잃었다.
한규호는 쓰러진 그를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 까레라가 건네준 술 한 병을 들고 다시 들어온 문으로 걸어 나갔다.
***
대위는 차에서 권총을 장전하며, 정비소 문으로 들어가는 스즈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직원들이 있을지도 모를 곳에 그 혼자 들어가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지원팀을 부를 시간은 없더라도, 적어도 자신이라도 따라 갔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에 무언가가 짊어져 있었다. 사람이었다.
1분도 안 지나서?
정말 그는 요즘 소문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산타 무에르테(Santa Muerte : 가톨릭 신앙과 메소아메리카 전통신앙이 결합해 만들어진 민간신앙)의 화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대위는 자신의 두 눈으로 새삼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다가온 스즈키가 차 뒷문을 열고 자신이 메고 온 남자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뒷문을 닫고 조수석 문을 연 스즈키는 의자에 앉으며 대위에게 병 하나를 건넸다.
“더블 티는 없더군. 당신이 이겼소.”
대위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건네진 술병을 받았다.
엉겁결에 한규호가 건네준 술병을 받은 대위는 술병의 상표를 보고 놀란 눈으로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들어간 지 1분도 안 되어서 까레라와 디플로마띠코 레세르바 엑스쿨루씨바(Diplomatico Reserva Exclusiva) 한 병을 들고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