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14화 (115/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1) >

4일차

북부창고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털썩.

스즈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도밍게즈는 두 팔을 풀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집어 드는 남자의 얼굴을, 무표정한, 조금은 피곤한, 어쩌면 후련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남자의 얼굴을 도밍게즈는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24시간 동안 해낸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면 믿어 줄까? 세상 진지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저 남자가 미니밴 3대를 날려버리고 카르텔 하나를 박살내고, 또 다른 카르텔 한 가운데 들어가 여자애를 구해왔다는 것을 이야기면 믿어줄까?

저렇게 만족스러운 얼굴로 담배연기를 하늘로 뿜어내는 저 남자가 정신을 잃은 아이를 아빠처럼 품에 안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등을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왜 안 갔나?”

도밍게즈도 담뱃갑을 집어 들며 물었다.

“응?”

“왜 같이 돌아가지 않았냐고.”

도밍게즈는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문 얼굴을 한규호 쪽으로 내밀었다.

한규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얼굴에 한 번 씩 웃어 주고는 책상 위에 있던 라이터를 집어 불을 붙여 주었다.

“까바차?”

“뭐?”

“저번에 그랬잖아. 진짜배기 베네수엘라 음식인 까바차인지 까빠차인지를 대접해 주겠다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먹으러 또 올 것 같지는 않아서. 온 김에 먹고 갈까 하고.”

도밍게즈가 피식 웃었다.

“까차빠야. 까바차가 아니라.”

“그래. 그거. 까차빠나 까바차나. 뭐 대충 알아들으면 된 거지.”

“알아듣기는 개뿔.”

도밍게즈가 투덜거렸다.

한규호는 다시 한 번 씩 웃고는 고개를 돌려 우두커니 곁에 서있는 대위를 보며 말했다.

“대위님도 피시겠소?”

도밍게즈는 그제야 대위가 아직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위는 아마도 처음 들어온 자세 그대로 거기에 서있었을 것이다.

고지식한 녀석.

도밍게즈는 속으로 생각하며 대위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한 대 피겠나?”

“아닙니다.”

대위가 서 있는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아니. 한 대 피우지.” 도밍게즈가 다시 권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위의 갑작스런 질문에 도밍게즈는 담뱃갑을 내려놓으며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규호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위를 바라보았다.

“뭔가?”

도밍게즈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왜 저를 밀쳐 내셨습니까?”

대위의 질문을 도밍게즈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지? 저 자식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수류탄.”

앞에 있던 한규호가 말했다.

그제야 도밍게즈는 대위가 묻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도밍게즈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류탄이 굴러 떨어진다. 저게 터지면 사람들이 죽는다. 여러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가 수류탄을 덮친다.

이런 사고의 과정을 거쳐 몸을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에, 대위가 그 상황에 대해서 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뭐? 갑자기 왜 그런 질문....”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대위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도밍게즈는 놀랐다. 사관학교 후배라고는 해도 연차가 많이 났다. 그렇기에 대위는 도밍게즈에게 절대로 이런 불손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10년 동안 말이다.

“도밍게즈라는 남자를 보필할 대위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밍게즈라는 남자를 대신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대위는 부하를 혼내는 매서운 눈빛으로, 도밍게즈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가 보겠습니다.”

대위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례를 붙이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대위가 나가고 방문이 닫힐 때까지 도밍게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한 얼굴로 대위가 나간 문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담뱃재가 무게에 못 이겨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저 자식이.....”

그 모습을 보면서 한규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은 부하군.”

도밍게즈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담배를 나눠 핀 두 사람은 둘 다 수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잠들 수는 없었다. 느긋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서 이제 뭐 할까 논의할 여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네가 움직이는 것을 원치 않아. 베네수엘라의 문제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손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도밍게즈가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이해해.”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남은 이유가 있겠지. 원하는 것이 뭔가? 톨레도 상사의 탈상을 도와준 것도 있고,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돕도록 하지.”

도밍게즈가 말했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베르나가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서 잡아온 놈 있었지?”

한규호가 시리오를 언급했다.

도밍게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을 잡아올 때, 과하게 손을 썼지.”

“과하게라면?”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자들은 전부 처리했어.”

도밍게즈는 한규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시리오 그놈만을 잡아올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청소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공포라고 할까? 그런 인상을 남겨주고 싶었어. 푸에르토 사무실에서는 뭐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많이 처리했고.”

“몇 명이었나?”

“정확히는 모르겠군. 한 열 대여섯 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도밍게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친구가 말하면 꼭 진짜 같단 말이지.

“빚을 졌는데 갚지 않고 가는게 석연치도 않고.”

한규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면서 몰려오는 역겨움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몇 시간이나 잠을 못 잤지? 어제 새벽에 일어났던가?

아무리 체력적으로 대단한 그라도 24시간 동안 수면을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연달아 담배를 피우는 것은 불쾌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담배를 원하고 있었다. 마음이 원하는데 육체의 불쾌감쯤은 감수해야 한다.

“자네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 나는 빠지도록 하지. 가만히 있도록 하지. 뭐 그냥 단순한 변덕이 생겼을 뿐이니까. 꼭 하고 싶다 그런 것은 아니야. 하지만 채무는 갚고 다니는 성격이라. 빚이 있는데 그냥 가면 버릇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도밍게즈는 인상을 쓰며 담배를 피우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려는 것일까? 이 바보 같은 친구는 왜 자신에게 하나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하려는 것일까?

그냥 비행기를 타고 떠났으면 되었을 것을, 쓸데없이 남아서 아이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그 짓을 했을까?

7살 여자아이, 아이의 친모조차도 포기하고 떠난 아이를,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아이들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자라다 거리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구하려고 그 고생을 자처한 것일까?

도밍게즈도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그 역시도 인상을 쓰며 담배 연기를 억지로 집어 삼켰다.

“더블 티는 안 돼. 그 자식은 내 꺼.... 우리 꺼야.”

도밍게즈가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한규호는 빚이 있었다. 받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러나 도밍게즈가 가진 채권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오후에 부대로 다시 복귀할 거야. 내가 복귀 명령을 내릴 거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귀해서 영내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으면 되나?”

한규호가 물었다. 다시 메리어트 호텔로 갈 수는 없으니까.

“머물 곳을 마련해 주지.”

“도와줄 사람은?”

한규호가 물었다.

“대부님이 도와 줄 거야.”

도밍게즈가 말하는 대부님이라면 시리오의 거처를 알아온 백발의 노(老)기자다.

“까레라라고 했던가? 그 자식도 보고 싶은데.”

한규호는 아고스토가 접촉해 베르나를 데려온 전 엘 나씨오날지(紙) 기자의 이름을 올렸다.

“대부님이 기뻐하시겠군.”

도밍게즈는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

6일차

산 호세 어린이 병원(Hospital San Jose De Dio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유일한 어린이 전문 병원이자, 경제 위기의 베네수엘라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몇 개 안 되는 병원 중 하나인 산 호세 어린이 병원 6층 특별 병실은 지는 태양이 보여주는 마지막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창가에 서서 한규호는 석양을 보고 있었다.

도밍게즈가 마련해준 거처는 카라카스의 어린이 병원, 특별 병실이었다. 4일째 되는 날 도밍게즈는 부대에 복귀하면서 한규호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산 호세 어린이 병원이 계속 병원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유니세프에서 이 병원에 대한 지원을 계속 하고 있기도 했지만, 이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재단이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인 도밍게즈 가문

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의 이름을 베네수엘라 독립전쟁 영웅인 호세 데 도밍게즈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한규호는 이 병원 특실에서 이틀 동안 휴식을 취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잔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지만, 이틀 동안 어디도 나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창문을 바라보던 한규호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다가오는 누군가가 아직 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한규호가 기다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뭘 보나?”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창가에 서 있는 한규호를 보며 물었다.

한규호는 몸을 돌렸다.

“어르신이 하도 안 오셔서 언제 오시나 보고 있었습니다.”

한규호가 문을 열고 들어선 노인에게, 베네수엘라에서, 그리고 남미에서 종잇값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신문 중 하나인 엘 나씨오날(El Nacional)의 전 편집인인 랄프 코랄(Ralph Corral) 기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허튼 소리.”

노기자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며칠이나 됐다고.”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모습에서 김형원이 떠올랐다. 한규호는 노기자의 퉁명스러움이 싫지 않았다.

“그나저나 무슨 짓을 한 건가?” 노인이 한규호를 보면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한규호의 얼굴을 보고 노기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난리가 났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항구에서는 무슨 죽음의 천사가 내려왔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푸에르토 카르텔의 악행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주님께서 사신을 내려 보내 카르텔 놈들을 다 죽여 버렸다는 소문이 바르가스 주 전체에 퍼졌더군.”

한규호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내 데스크의 그 아가씨, 그리고 청소직원까지 세 사람 정도만 한규호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뭐 보았다고 해도 제대로 기억도 못하겠지. 총질을 하면서 들어갔으니.

손목이 날아간 놈도 있었다. 과다출혈로 죽지 않았다면 건물 안에서 한규호를 만난 조직원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겠지. 카르텔 본부가 날아가고, 보스가 납치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신이었다느니, 악귀였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 더군다나 묘사는 제각각인데, 한 명이었다는 진술은 공통적이니까.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고, 믿을 수 없

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된 거지.”

노기자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고, 카바예로 카르텔의 성지 같은 까티아에서도 까바예로 한명이 죽었어. 옘병할 놈들이 후보군이니 뭐니 하는 미래의 개새끼들과 함께. 밤에 총격과 폭발음에 놀란 사람들이 나왔을 때는 조직원들의 시체 밖에 없었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던 노기자는 벽에 붙은, 어린아이가 금연 표시를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는 왜 하필 여기야 하며 투덜투덜 거리며 다시 담배를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라 만차 네그라(La Mancha Negra).”

노기자가 말했다.

“네?”

한규호가 물었다.

“그 범죄자 새끼들이 자네를 그렇게 부른다는군. 라 만차 네그라(La Mancha Negra).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기들을 죽여 대는데,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부터 나왔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데, 카르텔 놈들이 죽어나가니까.

그래서 라 만차 네그라라고 부른다는군. 미친 새끼들 센스하고는.”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침대 위에 던졌다.

“자. 라 만차 네그라. 여기 자네가 원하던 것이 있네. 전직 엘 나씨오날의 부패 기자 까레라 그 개자식이 숨어 있는 장소지.”

한규호는 그 봉투를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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