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8) >
4일차
까티아 농장(Planta Catia)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카르텔 조직원 중 유일한 생존자의 눈이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으로 향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한규호는 지체 없이 지하 계단으로 몸을 움직였다.
지하에 베르나가 있으면 한규호는 그 기척을 느껴서 일행 중 가장 먼저 베르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위치를 파악하면 도밍게즈의 부대원들이 지하에 있는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수색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오발이나 도탄에 의한 의도치 않는 피해도 방지할 수 있다.
계단을 내려서자 복도를 중심으로 양측에 작은 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감각을 최대한 확대했다. 곧 그의 청각에, 오른쪽에서 세 번째 방에서 나오는 미약한 숨소리가 잡혔다.
그 소리를 내는 사람 이외에 감각에 걸리는 누구도 없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한규호는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는 빠르게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규호가 움직이는 것을 나중에 눈치채고 지하로 뒤따라 온 도밍게즈는 한규호가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총기를 집어 넣는 것을 보았다.
군생활의 전부를 전투부대에서 복무해온 도밍게즈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안전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만약 그의 부하들이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도밍게즈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 남자는 달랐다.
말도 되지 않는 저 남자, 스즈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전혀 도밍게즈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밍게즈는 들고 있는 MP5를 들어 지향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 바로 뒤를 대위와 앤 챔버가 자세를 낮춘 자세로 따랐다.
문에 다가간 한규호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숨소리가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문에 걸려있는 녹슨 자물쇠를 잡고 힘주어 비틀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자물쇠는 녹이 슬어 곳곳의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자물쇠 대신 문에 달려 있는 걸쇠가 가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뜯어져 나갔다.
걸쇠를 뜯어버린 한규호가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빛이라고는 복도에 걸린 미등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오렌지빛이 전부인 어두운 방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빠르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두 무릎을 꼭 껴안고 옆으로 누워 있는 아이의 목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차가웠다.
사람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손가락에 닿은 아이의 목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차가웠다.
한규호는 아이를 안으들으려던 생각을 멈추고, 그녀의 목에 손을 댄 채 호흡을 체크했다.
분명히 미약한 숨소리를 듣고 찾아왔음에도 살아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이의 몸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손가락에 느리고 미약하지만, 확실한 박동이 느껴졌다. 아이의 생존을 확인하고 있는 그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
한규호는 앤 챔버가 급박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팔을 뻗어 그녀가 아이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자제시켰다.
앤 챔버를 멈춰 세운 후에야 한규호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베르나였다.
몇 시간 전, 호텔에서 보았던, 두 손으로 초코바를 들고 오물오물 먹던 베르나가 맞았다.
그러나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아이처럼 느껴졌다. 온 몸을 둥글게 말고, 최대한 자신을 지키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몸을 최대한 움츠린 자세로 한규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눈은 동공이 풀린 채 초점 없이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귀한 손님을 만나기 위해, 가장 깔끔한 옷으로 골라 입었을 베르나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서 땀에 젖어있었다.
낮은 체온, 풀린 동공, 잔뜩 움츠린 자세, 다량의 식은땀.
전장에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급성스트레스 장애의 징후였다.
외부 스트레스로 인해 스스로를 외부의 자극에서 차단하는 급성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을 별다른 조치 없이 방치하면 정신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긴다.
흔히 말하는 중증 PTSD가 그것이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냥 재우고, 탈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베르나를 이대로 재우게 되면, 베르나의 잠재의식은 잠들어 있는 동안 스트레스의 원인을 반복해서 그녀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급성스트레스 장애의 경우 최대한 빠른 대처가 필요했다. 최대한 빨리 전문의료기관으로 환자를 후송해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지금 이 곳을 벗어나, 도착할 헬기를 기다려서 타고, 전문병원으로 후송하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때까지 베르나의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까.
차선책도 있다. 최대한 빠르게 내부에 고립되어 있는 의식을 외부로 끌어내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에서 안전하다고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한규호라고 해도 이 분야는 그의 영역 밖이었다.
“베르나!”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앤 챔버가 짧게 내뱉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베르나의 모습은 참혹했다.
“괜찮은 건가?”
앤 챔버와 같이 들어온 도밍게즈가 물었다.
“아니. 의식을 되찾아 와야 해.”
한규호는 대답하면서 베르나와 눈을 맞추려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눈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풀려있는 베르나의 동공은 여전히 한규호의 눈이 아닌 한규호의 뒤에 있는 어두운 빈 공간을 보는 듯 했다.
“베르나. 베르나? 내 말 들리니?”
한규호가 베르나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그 의식을 끌어내기 위해 말을 걸었다. 지금으로서 한규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베르나의 시선에는, 동공에는,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베르나. 베르나.”
한규호는 계속 아이에게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렀다.
그 모습을 보던 앤 챔버가 다가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주무르기 위해 베르나의 손을 잡은 앤 챔버는 순간 느껴지는 차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잡은 손을 놓을 뻔 했다.
놓을 뻔한 손을 다시 잡은 앤 챔버는 두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베르나의 손을 타고 자신에게 전해져오는 한기에 가슴이 시려왔다.
앤 챔버는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베르나의 손을 감싼 자신의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러자 이물감이 그녀의 손 안에서 느껴졌다.
주먹 쥔 아이의 조그마한 손에 무언가가 있는 듯 했다. 앤 챔버는 아이의 꽉 쥔 손을 펴보았다. 자신이 끼워 주었던 묵주 반지가 보였다.
한규호는 베르나의 의식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계속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계속 아이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정신에 영구적인 손상이 가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녀를 재우고 데려나가야 할 수도 있다고 한규호는 생각했다.
“베르나. 베르나. 대답해 보렴. 베르나.” 한규호의 나직한 부름에도, 그녀를 흔드는 자극에도, 베르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확대되어 있는 동공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결정을 내렸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우선 재우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규호는 잠들어 있는 시간 동안 베르나의 정신이 가능한 한 덜 상처입기를 빌면서 그녀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내기를 불어 넣어, 베르나를 재우기 위해서.
그의 행동을 멈춘 것은 앤 챔버의 목소리였다.
“Dios te salve Maria, llena eres de gracia,(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앤 챔버는 반지를 끼지 않은 오른쪽 둘째 손가락을 잡아서, 반지를 낀 손에 대었다. 정확히 묵주 반지에 나와있는 돌기로 베르나의 손가락을 이끌었다.
“el senor es contigo, bendita tu eres entre todas las mujeres,(주께서 함께 계시니 연인 중에 복되시며)”
앤 챔버는 나직히 성모송을 읊는 입술을 천천히 베르나의 귀로 가까이 가져갔다.
“y bendito es el fruto de tu vientre, Jesus.(태중에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작게, 베르나가 놀라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확실하게, 베르나의 귀와 마음에 닿도록 확실하게 기도했다.
“Santa Maria, madre de Dios,(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어릴 적, 잠이 오지 않거나 무서운 악몽에 울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럴 때마다 큰 언니는 자신을 품에 안고, 손가락에 있는 묵주반지를 만지면서 성모송을 읊어 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성모님 같아 마음이 편안해져서 다시 잠들 수 있었다.
“ruega por nosotros pecadores, ahora y en la hora de nuestra muerte.(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힐베르타가 자다 깨어나서 울음을 터트리면, 라나 아마도르였던 자신은 힐베르타를 품에 안고, 성모송을 들려주었다. 그러면 힐베르타도 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다 잠들곤 했었다.
“Amen.(아멘)”
기도가 끝나자 앤 챔버는 베르나의 손가락이 닿아있는 묵주반지의 돌기를 살짝 돌렸다.
한규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묵주반지에는 10개의 돌기가 있고, 기도를 한 번 마칠 때마다 그 돌기를 움직여 수를 체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앤 챔버가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아니,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급박해 베르나를 재워서 들고 빠르게 빠져 나가려던 한규호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Dios te salve Maria, llena eres de gracia, el senor es contigo, bendita tu eres entre todas las mujeres,.....”
두 번째 기도가 끝나고 반지의 두 번째 돌기가 돌아가고 곧 세 번째 기도가 시작되었다.
한규호는 한 번만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간이 없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세 번째 아멘이 나오면 베르나를 재울 생각이었다.
그 순간 한규호는 아이가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움찔
순간 베르나의 입술이 미약하지만 분명히 움직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한규호는 볼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도 없던 베르나가 작은, 아주 작은 반응을 보였다.
앤 챔버가 그 모습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번째 기도가 시작되었다.
한규호는 제지하지 못했다.
“Dios te salve Maria, llena eres de gracia,(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앤은 그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베르나의 입술 움직임이 자신의 기도와 동조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 자신이 큰 언니를 따라 성모송을 외우던 것처럼. “el senor es contigo, bendita tu eres entre todas las mujeres,(주께서 함께 계시니 연인 중에 복되시며)”
입술의 움직임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울고 있던 힐베르타가 자신의 품에 안겨서 그랬던 것처럼, 같이 기도하려고 입술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y bendito es el fruto de tu vientre, Jesus.(태중에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그리고 마침내 베르나의 작은 입에서 들릴 듯 말듯한 소리가 들려나왔다.
“Santa Maria, madre de Dios,(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한규호는 앤 챔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열려있던 베르나의 동공이 조금씩 초점을 찾으면서 닫히는 것도 보았다.
묵주반지의 네 번째 돌기가 돌고, 다섯 번째 기도에 들어가자 드문드문 들리던 베르나의 작은 기도소리는 이제 끊김 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평소의 눈으로, 7살 아이의 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규호의 품에 안긴 베르나는 입으로는 계속 성모송을 외우면서, 이제는 완전히 평상시로 돌아온 눈으로 한규호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앤 챔버를, 자신에게 선물을 주었던 언니를 바라보았다.
베르나의 눈에 감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곧 터져 나오는 눈물이 그 감정을 덮었다.
베르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이제야 7살 아이의 얼굴로 돌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괜찮아.”
앤 챔버는 두 팔로 베르나를 안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괜찮아. 언니가 있으니까 이제 괜찮아.”
한참을 괜찮다고 아이를 달래는 앤 챔버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