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09화 (110/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6) >

4일차

까티아 농장(Planta Catia)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서 카라카스의 까티아 바리오 외곽에 위치한 까티아 농장의 한 방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더블 티의 기사 중 한 명인 아라도르 벨라즈퀘즈(Arador Velazquez)는 몸을 일으켰다.

손목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였다. 전날 새벽 6시에 일어났으니 열 아홉 시간 동안 연속으로 깨어 있었다.

오늘은 그에게도 피곤한 날이었다. 아니, 따지자면 요 며칠 동안 그에게는 계속 피곤한 날이었다.

이틀 전, 살바도르 발데즈 바렐라 여성부 장관을 젊은 정부(情婦)의 집에서 납치해온 것도 그였다. 땅을 파서 장관의 시신을 묻는 것은 부하들을 시켰지만 장관의 목숨을 거두고, 그 시신을 하나하나 해체한 것도 그였다.

어제 암파로에서 방위군과 교전을 벌이고, 미국 놈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학교 선생과 꼬마 아이를 데려온 것도 그였다.

잡아온 선생의 머리를 자른 것도, 자른 머리를 아이에게 들게 하고 사진을 찍은 것도 그였다.

아니, 그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카바예로들을 거느린 군주 티노 토르였다.

보스인 티노 토르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가 죽으라고 한다면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렇기에 아라도르는 그의 손발이 되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아라도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냉장고로 걸어가 물병을 꺼내 들고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자 위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6명의 조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미래의 기사 후보생들이었다.

카바예로 카르텔은 다른 카르텔과는 달랐다. 다른 카르텔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좋은 차, 여자, 좋은 집 등등.

그러나 카바예로 카르텔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었다.

최종적으로 보스의 곁을 지키는 카바예로가 되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집이 없었고, 차가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도, 지켜야 할 가족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카바예로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보스 티노 토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곧 그들의 것이었다. 티노 토르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카바예로와 모든 것을 공유했다.

티노 토르가 카바예로와 공유하지 않는 유일한 한 가지는 그가 성경처럼 들고 다니는 다 해진 책 한 권뿐이었다.

아직까지 티노 토르와 카바예로들은 단지 서 카라카스 일부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은 그 영역을 베네수엘라 전부로 확대할 것이다. 그는 왕이 될 남자이니까.

여기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카바예로 후보생들은 향후 개국할 티노 토르 왕국의 재목이 될 이들이다.

물론 이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아라도르는 소파에 앉았다. 그가 소파에 앉았음에도 후보생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앉으라고 하기 전까지 후보생들은 계속 서 있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지시가 있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시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해선 안됐다.

그것은 카바예로인 아라도르도 마찬가지였다. 티노 토르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데려오고 여교사를 살해했다.

그 이후에 내려온 지시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대기하고 있었다. 불만은 없었다. 손발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뇌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할 뿐이었다.

티노 토르의 손발인 아라도르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절대로 카바예로가 될 수 없다.

***

4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자신에게 배정된 공간에서 시리오의 심문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베르나가 카티아라는 이름의 농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심문실을 나왔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어서 빨리 베르나를 구하러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도밍게즈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규호는 이해하고 있었다.

도밍게즈는 전사한 전우들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에 대해서 한규호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한규호는 도밍게즈가 시리오라는 짐승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앤 챔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규호는 그녀가 자신이 구출한 아이의 곁에 머무르다가 온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에 우락부락한 아저씨들만이 아닌 여성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인 위안은 되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렸어요.”

앤 챔버가 한규호 앞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군.”

“베르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냈나요?”

“짐작가는 곳만.”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앤 챔버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 조바심이 느껴졌다.

한규호는 그녀의 조바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유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유괴된 아동의 75%가 유괴 후 3시간 이내에 살해된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대응해야 한다.

베르나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긴 했다. 일반적인 금전을 노린 유괴가 아니라, 범죄 집단에 의한 납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간에 베르나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앤 챔버는 어서 빨리 그녀를 구하러 가고 싶었다.

“도밍게즈 소령이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출발할 거야.”

한규호가 말했다.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 둘 필요가 있어.”

앤 챔버는 그 말에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입술을 앙다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가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한규호가 말했다. 앤 챔버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그래. 지금은 살아있다는 생각만 하자.

“저 놈이 말한 곳에 베르나가 없다면 그 다음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할 거야. 시리오라는 저 짐승도 그렇고, 푸에르토의 실종도 내일, 아니지. 오늘 해가 뜨면 알려지겠지. 푸에르토 카르텔에서 생각이 있다면 최대한 그 사실을 숨기고 내부 결속을 우선시해야겠지만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그 사실들이 알려지면 더블 티인지 뭔지 하는 그놈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겠지. 총을 들고 뛰어 나오든가,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몸을 사리든가.” 앤 챔버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뛰어나와 주면 고맙겠지만, 숨어버리면 다시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 숨으면서 주변도 정리할 테고.”

앤 챔버는 한규호가 말하는 주변 정리가 베르나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밍게즈와 말해봐야겠지만, 해가 뜨기 직전, 4시 반 정도 작전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작전이 끝나면, 거기에 베르나가 있든 없든,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라고.”

“준비...라면?”

“전화해서 헬기를 준비하라고 해. 아까 보니까 근처에 있는 것 같던데.”

앤 챔버는 말없이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 곳에 베르나가 없다면, 그렇다면 포기한다는 의미일까?

“베르나 없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나?”

“......”

“어릴 적 동생을 죽인 군인들의 사지를 뜯어버렸다고 했지. 다시 할 수 있겠나?”

한규호는 앤 챔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각오가 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아. 복수는 할 수 있을테니.”

앤 챔버는 한규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만약 오늘 밤 가야할 그 곳에서 베르나를 찾지 못하면, 다시 단서를 찾아야 해. 알 만한 사람을 물색하고, 잡아와서 심문해야 하지. 오늘처럼 빠르게 진행할 수는 없어.”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알고 있다. 오늘의 진행상황은 한규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내일도 한규호가 있겠지만, 이번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양어머니든 누구에게든 전화를 걸어. 자고 있지는 않겠지. 자고 있다면 깨우고. 베르나가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은 여기에서 차로 20분 거리야. 해 뜰 때 즈음까지 도착할 수 있게 요청하라고. 장소는 도밍게즈가 말해줄 테니 우선 출발하라고 말해.”

한규호의 말에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

새벽 4시가 지난 시간, 까티아 농장은 어둠과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전조등을 끈 15인승 밴 하나가 천천히 까티아 농장 근처 골목길에 멈춰 서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저기입니다.”

운전석에 있던 부하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차량이 멈춘 곳에서 한 150미터 떨어진 곳에 불이 켜진 농장 건물이 보였다. 어둠속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는 한규호의 눈에는 옆으로 넓게 늘어선 2층 건물도 보였다.

까티아 농장(Planta Catia).

시리오의 말에 의하면 더블 티가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장소로 쓰는 곳이었다. 사람을 납치하면 그곳에서 분류한다. 죽일지 살릴지, 죽인다면 어떻게 죽일지 등등.

시리오에 따르면 이틀 전에 납치한 바렐라 장관이 이곳에서 죽었고, 토막 나서 묻혔다고 했다. 베르나도 납치하자마자 이곳으로 데려 갔다고 했다.

베르나가 아직 이곳에 있는지, 살아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규호는 농장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번에 베르나를 찾지 못하면 앞으로 남은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한다.

철컥

뒷자리에 앉아있던 도밍게즈의 부대원들이 각각 손에 든 mp5 기관단총에 총알을 장전했다.

“가자.” 뒷문 가장 가까운데 앉아 있던 대위가 위장용 복면을 쓰고선 부하들에게 말했다.

밴의 문이 열리고 도밍게즈의 부하들이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신속하게 건물로 향했다.

“우리도 가지.”

보조석에 앉아 있던 도밍게즈가 말했다. 앤 챔버와 한규호도 열린 문을 통해 차에서 내렸다.

부하들이 어둠속으로 몸을 감춘 길을 따라서 세 사람은 몸을 낮추고 걸었다. 선두에는 도밍게즈가 MP5을 들고, 맨 후미에는 한규호가 도밍게즈의 베레타를 들고 가운데 앤 챔버를 보호하는 형태로 농장을 향해 걸었다.

한규호는 앤 챔버가 가진 능력이 그녀를 보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앤 챔버를 가운데 세웠다.

세 사람은 그렇게 어둠속을 걸어 농장 건물로 걸어갔다.

돌입은 도밍게즈의 방위군이 앞장서기로 했다. 도밍게즈는 한규호에게 양해를 구했고, 한규호가 이해해 주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규호는 도밍게즈의 제안이 자신이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우를 잃은 군인이 자기의 구역에서 남에게 복수를 맡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규호는 그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건물로 거의 다 다가가자, 건물 입구 주위에 몰려 있는 도밍게즈의 부하들이 보였다.

도밍게즈가 다가가자 대위가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도밍게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위가 주변에 있던 부하들에게 순서를 지정해 주었다.

밴을 타고 온 15명 중 운전자와 도밍게즈, 앤 챔버, 그리고 한규호를 제외한 11명의 부대원이 건물에 들어가는 순번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앤 챔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대위가 케블러 장갑을 낀 손가락을 3개 폈다.

3개의 손가락이 두 개, 그리고 한 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주먹이 쥐어지자 1순번의 병사가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뛰어들면서 외쳤다.

“bajar al suelo.(바닥에 엎드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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