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08화 (109/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5) >

3일차

1880-75, Calle 5 de Julio 시리오 저택

엘 암파로(El Amparo),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죽여 버릴까.

한규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베르나에 대한 정보였다. 베르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내기 전까지 이 짐승은 살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죽는다. 이 짐승은 절대로 죽는다. 그가 죽이든, 다른 이가 죽이든, 이 짐승은 절대로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한다.

한규호는 들이 쉰 숨을 천천히 내뱉은 다음 쓰러져 있는 남자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지 않으면 격양된 기분에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그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를 어깨에 얹은 후 한규호는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몸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그 상처들을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예전의 한규호라면 그냥 떠났을 것이었다.

한규호는 많은 지옥을 헤쳐 왔고, 고통 받는 아이, 여성, 노인 등도 수없이 보아왔다. 지금 정신을 잃고 있는 이 아이도 그가 지나쳐온 수많은 약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규호는 지옥에서 누군가를 구해준다고 해서 그 지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전에 그는 그 장소를, 그 사람들을 지나쳐 왔었다.

이 소녀를 두고 가면 다음 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CIA 요원 에녹을 구출할 때, 경계를 서던 소년병을 기절시켰었다. 그 소년병은 살아남았을까?

경계에 실패한 소년병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규호는 자신이 소말리아의 소년병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질감을 느꼈다.

과거를, 그것도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를 떠올리다니.

한규호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백금산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백금산은 과거였지만, 현재이며, 또한 미래였기에, 백금산을 떠올리는 것을 과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과거를, 그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년병을 떠올렸다. 베네수엘라의 소녀를 보면서 소말리아의 소년병을 떠올렸다.

한규호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참나.... 사람이 변하면.....”

한규호는 중얼거리며 한규호는 짊어진 시리오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침대 시트를 걷어낸 다음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소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베르나를 구해야 되겠다고 그 스스로 결정했다.

앤 챔버의 요청, 기프티드라는 비밀, 그리고 완의 전화. 이런 것들이 영향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최종 결정은 한규호가 한 것이다. 베르나를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한규호 그 자신의 의지였다.

한규호는 시리오는 우악스럽게, 소녀는 조심스럽게 양어깨에 얹었다.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 쪽으로 발을 옮겼다.

***

3일차

꼴레지오 엘 비베로(Colegio El Vivero)

엘 암파로(El Amparo),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운전석에 앉아있는 대위는 초조한 기분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안의 유일한 불빛인 LED 시계는 23시 45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짙은 어둠에 눈이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럼에도 칠흑 같은 어둠은 여전히 주변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뒷자리에 앉아 있던 톨레도 상사가 대위에게 물었다.

“...... 기다려보자고.”

대위가 말했다.

톨레도 상사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은 가득했다. 베네수엘라에 처음 와 봤다는 동양인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바리오로 혼자 잠입했다.

베네수엘라인인 그조차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그 곳에 동양인이 혼자 들어가 이 구역의 관리자를 잡아오겠다는 것을 믿고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푸에르토를 잡아왔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도밍게즈 소령이 그 동양인이 푸에르토를 잡아왔다고 말했다.

푸에르토를 잡아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떻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적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기적은 두 번 찾아오지 않는다.

“쉿.”

앞자리에 앉은 대위가 말했다.

톨레도는 재빨리 자신에 손에 든 권총을 들어올렸다.

권총 끝에 달린 소음기에 LED 시계의 붉은 빛이 흐릿하게 비쳤다.

만약 누군가 다가온다면, 그리고 다가오는 자가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톨레도가 그 자를 향해 총을 쏠 것이다. 그 사이에 대위는 재빠르게 시동을 걸고 빠져 나간다.

상황이 발생하면 동양인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 처음의 약속이었다.

기다릴 수 없다. 권총이 발사되면 그 총소리가 온 바리오를 울릴 것이다.

소음기를 달았다고 해도 일반 9mm 탄환의 권총 발사 소음은 125dB 정도의, 천둥소리만큼 큰 소음이다. 영화에서처럼 푸슉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음속 탄을 사용해야 그나마 영화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톨레도가 들고 있는 권총에는 일반 9mm 풀메탈자켓 탄환이 들어있으니, 소음기에 큰 기대를 걸 수는 없었다.

대위가 왼손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톨레도는 들어올렸던 총구를 돌려 그쪽으로 겨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형태가 가까워지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톨레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형태가 차 바로 앞까지 다가와 식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누군가가, 무언가를 양어깨에 짊어진 동양인임을 알 수 있었다.

***

한규호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상사를 보았다.

평상시라면 전혀 문제될 것 없었지만, 두 사람을 어깨에 짊어진 지금 상태에서는 조금 곤란했다.

옆구리에 총을 맞은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또 총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총을 겨눈 상사가 긴장하지 않았으면, 조금만 더 침착했으면, 베테랑이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차량으로 다가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베테랑이었고, 한규호가 차에 완전히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인지시킬 때 까지 그는 섣불리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트렁크.”

운전석으로 다가간 한규호는 대위에게 짧게 말했다.

언제든지 시동을 걸기 위해서 오른손에 자동차 키를 잡고 있던 대위는 빠르게 트렁크를 열었다.

한규호는 오른쪽에 매고 있던 시리오를 던져 넣고 트렁크를 닫았다.

그리고는 뒷문을 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톨레도에게 침대 시트에 둘둘 쌓인 소녀를 건네주었다.

톨레도는 한규호가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 손에 권총을 든 채로 그것을 받으려 했다.

“총 내려놓고.”

한규호가 말했다.

톨레도는 한규호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둠 때문에 그의 시선이 자신의 총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지도 못했다.

“총 내려놔.”

앞자리에 앉은 대위가 말했다.

그제야 톨레도는 재빨리 안전장치를 걸고 권총을 의자와 허벅지 사이에 끼운 후 두 팔을 벌려 한규호가 건네준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하얀 천에 둘둘 쌓인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규호는 아이를 건네고는 뒷문을 닫은 다음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출발합니다.”

대위는 스즈키가 상사에게 건넨 것이 무언지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시동을 걸었다.

***

4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 일행이 도밍게즈 부대가 은신처로 사용하는 북부 창고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자정을 훌쩍 지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잠들지 않고 있었다.

차량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간 앤 챔버는 조수석에서 미스터 한이 특유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리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기프티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녀를 감싸들던 걱정이, 차에서 내리는 무심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사라졌다.

부대원들이 차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대위의 지시를 듣고는 막 열린 트렁크에서 남자 하나를 꺼냈다.

부대원들이 남자를 채 꺼내기도 전에 뒷문이 열렸고, 하얀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앤은 그 남자가 미스터 한에게 경례를 한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 무언가를 들고 내리자마자, 빠르면서도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창고로 다가오며 작게 외쳤다.

“의무병!”

그러자 병사 하나가 재빨리 그에게 뛰어갔다.

남자는 뛰어오는 병사에게 어떠한 지시도 없이 빠르게 앤 챔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도와주시오. 빨리!”

앤은 갑작스럽게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본능적으로 그 체크무늬 남자를 따라 뛰었다.

그리고 흰 천에 싸인 무언가가 여자, 그것도 나이 어린 소녀라는 것을 확인했다.

베르나일까? 앤 챔버는 가슴이 철렁했다.

톨레도 상사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소녀를 감싼 천이 살짝 흘러내렸고, 얼굴이 드러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앤 챔버는 베르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표현하는 대신 발끝에 힘을 주어 톨레도 상사를 따라갔다.  차에서 내린 한규호는 뛰어가는 앤 챔버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트렁크에서 꺼낸 한 마리 짐승에게 눈을 돌렸다.

***

다행스럽게도 그 짐승은 시리오가 맞았다.

냉수 세례를 받고 깨어난 짐승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당황했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저항했고, 그의 왼발 엄지발가락이 망치에 의해 짓이겨지고 나서야 자신이 시리오라는 것을 인정했다.

도밍게즈는 의자에 묶여있는 시리오에게 다가가 베르나의 사진을 내밀었다. 공항에서 한규호가 보았던 그 사진이었다.

“어디 있지?”

시리오는 눈을 들어 그 사진을 보았다.

그러나 시리오는 답을 주저했다.

도밍게즈는 시리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부하에게 눈빛을 보냈다.

망치를 들고 있던 그가 시리오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을 찍었다.

짐승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북부 창고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부하는 그 울부짖음이 멈추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움직였고, 둘째발가락과 셋째발가락에 다시 한 번 망치가 내리쳐졌다.

한규호는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무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부대원을 잃었고 그걸 행한 놈을 이렇게 대면했다면 지금 망치를 잡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망치가 다시 올라갔다.

“까티아! 까티아에 있습니다!”

시리오가 소리쳤다.

망치가 멈췄다.

“까티아?”

“까티아! 로... 로스 마갈라네스(Los Magallanes) 북쪽에 있는 거기! 거기! 까티아 농장(Planta Catia)! 거기. 거기에 있어요!”

시리오가 소리쳤다.

도밍게즈가 다시 부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다시 망치가 공기를 갈랐다.

시리오는 약지와 소지발가락이 짓뭉개지는 고통에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망치를 든 부하는 다른 쪽 발, 아직 엄지발가락만 뭉개진 왼쪽 발의 발목을 잡았다.

“맞습니다! 카티아!! 거기입니다! 거기!”

“난 너무 쉽게 부는 놈은 믿지 않는데.”

도밍게즈가 시리오에게 작게 속삭이고는 다시 고개를 부하 쪽으로 돌렸다.

시리오의 왼발 둘째 발가락이 다시 짓이겨졌다.

신경말단이 몰려 있는 발가락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자 시리오는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체액을 질질 흘리며 소리쳤다.

“맞! 맞습니드아아아아아악!”

“너 같은 조무래기가 알 수 있다고 난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지.”

도밍게즈가 다시 말하며 시리오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맞습니다아아악!. 제발. 제..제발....”

시리오가 침과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도밍게즈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날 납득시켜봐.”

도밍게즈가 한 발짝 물러나자, 망치를 잡은 부하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얼마 전에!”

시리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장관을! 장관을! 묻었습니다! 제가 직접! 거기에서! 시체가. 그 시체가 어디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시리오의 말에 도밍게즈의 눈이 커졌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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