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07화 (108/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4) >

3일차

1880-75, Calle 5 de Julio 시리오 저택

엘 암파로(El Amparo),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집을 둘러보고 입수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복기하면서 정리했다.

1층 거실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 둘이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영상이 나오고 있는 티비를 정신을 놓고 보고 있다.

그들의 연배와 행색 등을 보아 지역 두목 급은 아니다. 시리오의 부하일 가능성이 높다.

시리오는 1층에 있을까?

그렇다면 저들이 저렇게 정신 놓고 티비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리오는 1층에 없는 듯하다.

그럼 2층은?

잠들어 있는 중년 여성은 시리오와 관계가 있겠지. 화려한 방의 상태와 나이를 봐서 시리오의 모친이나 친척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2층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괴롭히는 자가 시리오일 것이다. 2층에 남자는 그 한 명 뿐이다.

어떻게 할까?  2층으로 바로 들어가 시리오를 재운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재운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들쳐 매고 빠져나올까?

가능하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깔끔한 방법이기는 하다.

그런데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마음이 내키는, 마음이 원하는 다른 방법이 떠올랐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한 후 마음을 정했다.

한규호가 군대에서 그의 상관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유용한 것은 정확한 분석을 통해 냉철하게 판단한 후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규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마치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사뿐하게 다시 1층으로 내려온 한규호는 빠르게 움직여 뒷마당으로 향했다.

뒷마당에는 사와후지社의 디젤 발전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한규호는 조용히 다가가 컨트롤 패널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때 묻은 사용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신품 같지는 않았다.

한규호는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발전기의 전원 레버를 내렸다.

1만 달러가 넘는 대용량 디젤 발전기가 푸쉭 소리를 내더니 조금씩 진동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진동이 완전히 잦아들기 전에, 저택의 모든 불이 꺼졌다.

한규호는 빠르게 몸을 숨겨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한규호의 예상처럼 반응은 티비를 보고 있던 놈들이 있는 거실에서 시작됐다. 티비 소리가 사라지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플래시 라이트가 거실에서 흘러 나왔다.

거실에서 흘러나온 불빛은 예상대로 발전기 쪽으로 향했다.

플래시를 든 남자가 스페인어로 투덜거리면 발전기를 한번 걷어 찬 다음에 패널 쪽으로 플래시를 비추었다.

한규호가 신속하고 은밀하게 그의 배후로 다가갔다. 그리고 패널에 반사된 빛이 한규호를 비추기 전, 그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의 등 뒤에 섰다.

이어서 오른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그의 턱을 잡은 다음, 왼다리를 그의 양다리 사이로 밀어 넣고 씨름의 안다리를 걸 듯 고정시켰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꺾어 버렸다.

한쪽 다리가 한규호에 의해 고정된 남자는 머리가 불가능한 각도까지 뒤로 꺾이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자연스럽게 혀가 공기의 흐름을 막아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소리는 그저 짧은 호흡 소리에 불과했다.

바로 뒤에 붙어 있는 한규호에게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한규호가 시도한 기술은 미 육군 전투 교범 근접전 전투기술교범(US. Army Combative), 보초 처리(Sentry removal) 7-7번 기술인 ‘헬멧을 활용한 목 부러트리기(Neck Break with Sentry Helmet), 일명 ’화이바 꺾기‘의 변형이었다.

한규호는 오랜만에 그 기술을 사용해 보초 한명을 절명시켰다.

한규호는 천천히 그를, 이제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남자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떨어트린 플래시를 집어 들었다.

플래시를 끈 후 허리춤에 챙겨 넣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서자 티비를 보고 있던 다른 한 명이 어둠 속에서 여전히 소파에 앉아 무언가 툴툴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그의 뒤로 다가가 오른팔로 그의 목을 감싸 리어 네이키드 초크(Rear naked choke)를 걸었고, 그 상태로 그를 들어올렸다.

목을 죄는 팔의 근육이 정확히 사내의 경동맥을 압박했다. 목을 잡힌 남자는 저항하기 위해 두 팔을 버둥거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의 팔에는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한규호의 팔에 매달린 지 3초도 지나지 않아 마치 교수대에 매달린 것처럼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한규호는 자신의 팔에 실리는 남자의 체중을 느끼고 그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음을 알았다.

목을 감고 있던 오른팔을 풀어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 뒤에 둔 왼손에 순간적으로 힘을 줘서 강하게 옆으로 밀었다.

뿌각

목뼈가 부러질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그의 목에서 들렸다.

한규호는 소리나지 않게 천천히 그 시체를 내려 놓았다.

다음 목적지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던 방이었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고른 호흡으로 보아 여전히 잠들어 있다.

방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니 허름한 침대에 주름 많은 여자가 보였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 같았다.

살며시 다가가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약하게 기를 불어넣었다.

기가 들어가자 여성의 몸이 잠시 움찔 하더니 곧 계속 잠을 이어갔다.

적어도 반나절은 깨지 않고 푹 잘 것이다.

남은 건 1층의 마지막 방, 누군가가 정사를 나누고 있던 방이다.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은 불이 꺼진 것도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하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규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여자의 엉덩이를 잡고 후배위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는 절정 직전인 듯 두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위로 하얀 가루가 보였다.

한규호는 주저 없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 남자의 턱을 후려쳤다. 한참 집중해서 허리를 놀리던 남자는 무방비상태로 턱에 주먹을 허용했다.

남자의 몸이 여자의 엉덩이에서 떨어지며 침대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있던 여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생식행위가 주는 쾌락에 취한 것인지 아니만 다른 무언가에 취한 것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규호는 여자 뒷목의 혈을 짚어 여자를 혼절시켰다. 여자는 정신을 잃어버렸음에도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여전히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자세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한규호는 침대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 남자를 살펴보았다.

제대로 들어간 펀치 한방에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진 남자는 거의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의 두 팔과 다리가 전기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잔뜩 성난 상태로 커져 있는 그의 남근이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무심하게 물건을 쳐다보곤 거의 정신을 잃은 남자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린 후 말했다.

“시리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듯 했다. 하늘로 부자연스럽게 뻗은 두 팔을 벌벌 떨면서 입에는 하얀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약기운과 최고조를 앞둔 정사의 쾌락, 한규호에게 턱을 맞아 일어난 뇌진탕이 뒤섞여 그의 신경을 마구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규호는 그가 시리오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허름한 방, 허름한 침대, 그저 최소의 기능만을 갖춘 방,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몸, 조악한 문신 등이 그가 한 지역의 관리자가 되기엔 부족한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쯧.”

한규호는 혀를 찬 후 그의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강한 타격, 그리고 강한 기가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곧 그의 동공이 풀렸고 벌벌 떨던 몸의 진동도 멈췄다.

한규호는 죽어버린 한 남자와 민망한 자세로 정신을 잃은 한 여자를 두고 방을 나왔다.

일단 1층에서 그가 목표한 바는 다 달성했다.

조금 전, 2층 테라스에서 고민하던 한규호는 판단을 내렸다. 1층에 있는 조직원들을 전부 다 처리하기로.

시리오를 데리고 갈 때 발각될까 두려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규호는 발각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발각되더라도 탈출할 능력이 있었다.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1층 조직원들을 전부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다.

공포.

그가 이곳 베네수엘라에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있는 동안 그는 조직원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생각이었다.

조직원이면 죽는다. 카르텔에 관계되어 있다면 죽는다. 그런 공포를 심어 줄 생각이었다.

“부기맨은 싫은데.”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

시리오는 손을 탁탁 털고, 가죽장갑을 벗어들었다.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여자, 아니 아직 여자라 하기 이른 소녀는 이제 울 힘도 없는지 바닥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었다.

시리오는 눈앞의 여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등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등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리오는 그 등을 보고 충동을 느꼈다. 다시 장갑을 끼고, 다시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더블 티의 명을 받아 암파로를 관리하는 시리오는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그의 어릴 적 친구의 집을 찾아가, 친구의 남동생인 파비아노의 어깨를 직접 두드려주며 총을 쥐어 주었다.

시리오가 그 번거로운 짓을 하게 된 이유는 그의 보스를 흉내 내보고 싶어서였다.

그의 보스, 서부 바리오를 지배하는 더블 티가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 카바예로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그가 가진 카리스마와 지배력 덕분이었다.

시리오도 자신만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가지고 싶었다. 더블 티처럼 자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나갈 기사들을, 아니 종자들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총을 쥐어주고 나가서 싸우다 뒈져라 하는 대신, 어깨를 두드려주며, 예전 친구 이야기를 꺼내고,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너의 미래다 같은 역겹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것이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그런데 그 멍청한 총알받이가 바로 다음날 차에 깔려 죽어버렸다. 아니, 총을 맞고 죽었던가? 아무튼 죽어버렸다.

쓸모없는 새끼.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저 짜증이 날 뿐.

하도 오래 전에 죽어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친구를 입에 올리며 연극까지 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 그 멍청한 자식 때문에 짜증이 났다.

아직 시켜볼 게 많았는데, 여기저기 쓸 만한 일이 많았는데.

시리오는 짜증을 내다가 그 멍청이의 막내 동생을 떠올렸다.

그랬지. 그 멍청이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눈에 띄는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

12살인가? 13살인가?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 그 계집애가 나이답지 않게 아주 예쁘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리오는 그 아이를 불러서 오빠가 가져간 오토바이와 MAC-11 기관단총의 비용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눈앞에서 벌벌 떨면서 말을 더듬는 파비아노의 막내 여동생의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또 다른 시험대상이다.

더블 티의 지배력의 원천은 두 가지다. 카리스마와 공포.

이제는 공포를 시험할 차례였다.

시리오는 파비아노의 막내 여동생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아이의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의 명령에 따르는 노예로 만들기 위해 가죽장갑을 양손에 꼈다.

자고로 폭력과 고통만큼 공포를 생산하는 것은 없었으니까.

시리오는 발전기가 꺼지고 에어컨이 작동을 멈춘 것도, 누군가 2층으로 올라오는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한 소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집중해 있었다.

시리오가 약하게 오르내리는 등을 보고, 공포를 선사하려 다시 가죽장갑을 끼는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강한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시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며 한쪽 팔로 얼굴을 가렸다.

“뭐야 씨팔!”

시리오가 소리쳤다. 그러나 플래시의 강한 빛 때문에, 2층에 올라온 멍청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시리오?”

플래시를 든 누군가가, 아니, 남자가 어색한 발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히 더블 티의 명령을 받들어 암파로를 지배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친 새끼. 너 뭐야?”

그 순간 플래시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고 느꼈다.

그리고 턱으로 느껴진 충격이 채 온몸으로 퍼지기도 전에, 그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연 한규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도 보았다. 벽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LCD텔레비전, 1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한 침대, 노출된 상반신을 덮고 있는 공들인 문신이 그가 1

층에 있던 놈들보다는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규호는 플래시를 꺼내 전원을 켰다.

밝은 빛이 가죽장갑을 끼던 남자의 얼굴을 덮쳤다.

갑작스런 빛에 놀란 남자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알 수 없는 말로 내뱉었다.

“시리오?”

한규호가 물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역시 알 수 없는 스페인어였다.

한규호는 기대하던 yes나 si라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가 시리오라고 판단하고 1층에서처럼 몸을 날려 그의 턱을 후려쳤다.

시리오로 추정되는 남자는 턱을 맞고 순간적으로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곧이어 재빠르게 여자를 기절시키려 손을 뻗던 한규호는 흠칫했다. 조용히 움직이던 손은 여자에게 닿기 직전 멈추었다.

약하게 움직이고 있는 등이, 너무나도 작고 가녀렸다. 그리고 그 등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한규호는 멈췄던 손을 다시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녀의 목뒤를 짚었다. 안쓰럽게 흔들리던 그녀의 등의 떨림이 멈췄다.

한규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편한 자세를 만들었다. 혹시나 베르나가 아닐까 잠시 생각했지만, 베르나보다 더 큰 소녀의 얼굴은 역시 베르나가 아니었다.

한규호는 시리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한규호의 한 방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죽여 버릴까.

이 짐승을 다시 깨워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만든 다음, 인간의 통각이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신경이 다 타버릴 정도의 고통을 준 다음에 죽여 버릴까.

한규호는 그런 충동을 느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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