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06화 (107/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3) >

3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방을 나온 한규호와 앤 챔버는 도밍게즈의 부하의 안내를 받아 창고 안의 다른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도밍게즈를 포함해 세 사람이 방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도밍게즈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안경을 쓴 노인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한규호는 체크무늬 셔츠 차림의 근육질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톨레도 상사라고 했던가. 그들을 마중 나온 도밍게즈의 부하들 중 한 명이었고, 도밍게즈는 그를 지목하여 푸에르토를 맡겼다.

남자가 입은 셔츠 여기저기 검붉게 마치 염색이 된 것처럼 피가 묻어 있었다.

체크무늬를 입은 남자는 두 사람을 보고 도밍게즈에게 귓속말을 했다. 뭔가를 묻는 듯 했다. 귓속말을 들은 도밍게즈가 한규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왔다.

걸어온 남자가 한규호 두 걸음 앞에 서더니 부동자세를 취한 다음 문 앞에 서 있던 한규호에게 경례를 올렸다. 남자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는 것으로 남자의 경례에 답했다.

체크무늬를 입은 남자는 팔을 내린 다음 한규호를 지나쳐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한규호는 잠시 멀어져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들어오고 문이 닫힌 다음 도밍게즈가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딸을 잃은 아비가 오늘 탈상(脫喪)을 했네. 그를 대신해 고맙다는 말을 하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소개하지. 엘 나쇼날(El Nacional)의 전 편집인이신 랄프 코랄(Ralph Corral) 기자시네.”

도밍게즈가 말하자, 방 한쪽에 앉아 있던 안경을 쓴 백발의 남자가 앉은 그대로 손을 들어 보였다.

“까레라인가 그 자식도 엘 나쇼날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규호가 그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고스토가 데려온 기자, 까레라를 말한 것이다.

“그 개새끼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우렁찬 소리가 영어로 터져 나왔다.

“까레라 그 자식이 정치인, 카르텔, 사기꾼, 포주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받을 수 있는 건 크든 작든 다 받고 다녔어. 얼마나 질 나쁜 놈이었는지 100여 년 역사의 엘 나쇼날의 신뢰도가 휘청거릴 정도였지! 그 개새끼가 엮였다고 해서 내가 온 거야.”

노인 같지 않은 기세였다.

“랄프는.... 믿을 만한 분이야. 나인 좀 드셨지만 보다시피 몸도 건강하고 마음은 더 건강하지. 아이를, 베르나를 찾으려면 이 분의 도움이 필요해. 바리오와 카르텔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니까.”

도밍게즈가 말했다.

한규호는 랄프 코랄이라는 노인의 눈을 바라봤다. 지내온 세월이 담긴 그의 눈에 기분 나쁘지 않은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실례했군요.”

한규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럼 실례했지! 어디 댈 게 없어서 그 개새끼 이름을 꺼내!”

그가 다시 소리쳤다.

“대부님. 이해하시죠. 까레라 그 새끼가 하는 짓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도밍게즈가 그를 달랬다.

대부라고 불린 노인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하면서 한참을 더 투덜거린 다음 입을 닫았다.

한규호는 그의 투덜거림이 마음에 들었다.

“알아낸 것을 말해주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도밍게즈가 말했다.

그의 셔츠 여기저기에도 검붉은 얼룩이 묻어있는 것이 앤 챔버의 눈에 보였다.

“우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우리를 습격한 놈들은 푸에르토 새끼들이 맞았어.”

푸에르토는 대규모 카르텔의 수장답지 않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고통을 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도련님 같은 성장배경에 효율적인 심문이 더해지자 푸에르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빨리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토해냈다.

엘 오로가 자신을 부추겼고, 그래서 삼두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일을 벌였다고 자백했고, 또한 더블 티가 전화를 해왔고 그와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묻지도 않은 사촌동생 살비아노의 시신을 수습하고 하는 과정들까지도 자세하게 술술 불었다고 말했

다.

“베르나에 대해서는 모르더군.”

도밍게즈가 말했다.

“확실한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앤이 다급히 물었다.

“확실합니다. 아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전부 말했으니까.”

푸에르토는 모든 것을 다 말했다.

바르가스와 카라카스에 위치한 비밀 은신처부터 통장 비밀번호, 비상시에 쓰려고 금괴를 은닉해놓은 장소는 물론 엘 오로와 더블 티에 관해서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전부 다 털어놓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가 아이에 대해서만 비밀을 숨기거나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도밍게즈의 판단이었다.

한규호도 거기에 동의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아이겠지만, 푸에르토에게는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떻게 찾지?”

한규호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힌규호와 앤 챔버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베르나. 그 작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푸에르토의 비자금 같은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푸에르토를 잡으러 가면서도 생각해봤는데, 푸에르토의 짓이 아니라면 아이를 납치한 것은 더블 티일거야.”

도밍게즈가 말했다.

“이유가 있나?”

한규호가 물었다.

“아이는 서부 바리오 중 암파로(Amparo) 출신이라고 했고, 거기는 더블 티의 구역이니까. 잘린 머리를 기억하나? 아이가 들고 있던?”

도밍게즈의 말에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앤 챔버는 눈을 감았다. 그 끔찍한 사진이 다시 떠올랐다.

“인터뷰하기 전에 자기가 담임이라고 10만 달러 내라고 하던 그 여선생의 머리 같더군.” 도밍게즈가 랄프를 쳐다보면서 말하자 랄프가 확인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규호는 머릿속으로 그 사진을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는 눈물이 범벅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베르나의 얼굴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랄프 코랄이 입을 열었다.

“지역 주민들을 자신의 백성처럼 생각하는 그 미친놈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외부인을 만난 백성은 그놈에겐 반역자나 마찬가지고, 반역자는 응당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 그 새끼가 항상 들고 다니는 책이 뭔지 아나? 군주론이야.

그것도 이탈리아 원어로 쓰인 군주론. 하, 21세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신봉하는 놈이 있다니 믿어지나? 그 병신 같은 책을 항상 끼고 다니면서 500년 전 사상을 성경처럼 읽고 다니는 놈이니까 자신의 백성에게 일벌백계한다고 저 지랄을 하는 거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에르토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은 확인됐고. 그렇다면 엘 오로도 아닐 거야. 그 금융 마피아 새끼는 셋 중에서 가장 음흉하긴 하지만, 이런 짓을 할 스타일은 아냐.”

도밍게즈가 말했다.

“다른..... 용의자들도 있지 않을까요?”

앤 챔버가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시간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죠. 베르나가 호텔을 떠난 시각은 12시 좀 넘어서입니다. 저희가 명령받은 철수 시한이 정오였는데 조금 더 늦게 철수했죠. 철수하면서 같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으니 큰 오차는 없을 겁니다. 제 기억으로 아이가 짐을 가지러 자신의 집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부하들을 딸려 보낸 시간이 한 시 조금 전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태울 밴을 준비한다고 아이에 관해선 대위에게 맡겨 놓았었으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이 호텔에서 출발한 시간은 3시 20분에서 30분 사이일겁니다. 저는 더 일찍 가 있었지만 15분까지 차관을 기다렸다 들어갔으니까 그 정도가 맞을 겁니다.”

앤 챔버는 차관을 떠올렸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이 생각났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공항에 도착해서 보안구역 안으로 들어간 이후, 사진을 받은 것이 탑승 몇 분 전이었으니, 납치를 하고, 어딘가에 감금을 하고, 담임선생의 목을 자르고, 사진을 찍고, 인화해서 보안구역 안으로 반입을 시키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납치는 여

러분들이 호텔에서 나오기 전에 진행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는 정보력과 실행력,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력을 동시에 갖춘 자들이 납치를 실행했다는 말이다.

도밍게즈의 말을 랄프 코랄이 받았다.

“아무리 나라가 망가졌어도 공항 보안구역은 아직까지 최고 레벨의 보안지역이야. 거기에 사진을 밀어 넣을 정도의 힘을 가진 놈들은 삼두사 놈들밖에 없어.”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밍게즈와 노기자의 분석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찾죠?”

앤 챔버가 노인에게 물었다.

“암파로라고 했지?”

노인이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예. 암파로입니다.”

도밍게즈가 답했다.

“암파로에서 아이 하나를 데려오는 건 그놈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군인들이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데려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지. 군인, 그것도 5방위군과 전쟁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도밍게즈의 이빨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소령도 짐작하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방위군이 보호하고 있는데도 싸움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미리 계획하고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야. 아니라면 아무리 자기 구역이라고 해도 군복을 보자마자 미친 짓을 멈추었겠지, 아마 더블 티 그 개자식이 직접 키우는 까바예로(기

사) 놈들이 직접 움직였을꺼야. 그리고 암파로를 관리하는 더블 티의 작은 개새끼도 관여를 했을 테고.”

“누군지 압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그래. 아까 소령의 전화를 받고, 대충 이야기를 들은 다음 여기 오면서 알아봤지. 시리오(Sirio)라는 이름의 개새끼가 그 지역을 관리한다는군,”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접은 쪽지 하나를 꺼내 소령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소는 여기 있네.”

도밍게즈는 쪽지를 들고 펼쳤다. 그 쪽지에는 ‘1880-75, Calle 5 de Julio, 1030 Barrio el Amparo’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

3일차

꼴레지오 엘 비베로(Colegio El Vivero)

엘 암파로(El Amparo),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전조등을 끈 차량이 천천히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깜깜한 차량 안에 불빛이라고는 붉은 색으로 23시 08분을 가리키고 있는 LED 시계뿐이었다.

골목길로 접어든 차량은 그렇지 않아도 짙은 어둠속을 헤치고 더 어두운 건물의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곧 시동이 꺼졌다.

“저 위쪽입니다.”

운전석의 대위가 조수석에 앉아있는 한규호에게 말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경사진 골목길 위쪽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집을 바라보았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성 지도로 집의 위치와 지붕의 모양 및 색은 미리 파악해 놓은 오늘의 목적지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스페인어로 한규호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대위가 통역했다.

한규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피 묻은 체크 셔츠 사나이, 오늘 비로소 아이의 탈상을 마친 남자가 결연한 눈으로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가겠소. 기다리라고 전해주시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한규호는 열린 차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주저함 없이 북서쪽, 언덕으로 몸을 날렸다.

전력사정이 나쁜 카라카스, 거기에 빈민촌인 서쪽 바리오에는 가로등은 커녕,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달도 구름에 가려 아직 자정이 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한규호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었다.

다른 이들은 한규호를 볼 수 없고, 한규호는 그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신속하지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한규호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아 400m 거리의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바랜 적갈색의 지붕을 가진 집을 찾아냈다.

아니, 굳이 지붕의 색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저 집이 이 지역을 지배하는, 오늘의 목표인 시리오의 거처임을 알 수 있었다.

동네 전체를 암흑이 감싼 가운데, 그 집에서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한규호는 빠르게 벽으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디젤을 사용하는 자가 발전기 소리가 티비 소리와 섞여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위성지도로 집의 외관은 이미 파악해 놓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주택의 모습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지금의 위치가 머릿속에 그려놓은 집의 지도의 어디쯤인지를 파악한 후, 한규호는 주저하지 않고 담을 넘었다.

담을 넘어 빠르게 사각지대로 이동하면서 한규호는 건물을 살폈다.

마당에 있는 작은 수영장은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더러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이 켜진 1층의 거실에 보이는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다 찢어진 티셔츠에 더러운 청바지를 입은 것으로 봐서 졸개인 듯 했다. 한규호는 사각지대에 붙어서 감각을 확대했다. 1층에 저 둘 말고도 세 사람이 더 있다. 그가 등을 붙이고 숨어 있는 벽 바로 뒤는 침실인지 한 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조금 더 떨어진 방에 있었다. 그들은 깨어 있었다. 정사를 나누는 소리가 한규호의 감각에 잡혔으니까.

한규호는 2층에도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감각을 조금 더 확대했다. 2층에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규호는 벽에 나 있는 작은 돌기를 잡고 두 팔만으로 가볍게 2층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 테라스로 몸을 옮겼다.

인기척 없는 테라스에 올라서 감각을 집중했다. 2층에는 3명이 있었다.

한규호는 창문에 붙어서 방 안을 살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잠들어 있었다. 빈민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침대에서 살찐 중년여자가 약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이 한규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른 공간에서 느껴지는 기척.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 중 시리오가 있는지, 있다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울고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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