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2) >
3일차
후지어 국유림(Hoosier National Forest) 3만 4000피트 상공
일리노이 주, 미국
밀러 국장은 전화를 끊었다.
엘 오로는 아이의 납치는 자신과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의 거주지 바리오는 더블 티의 영역이고, 바리오 주민들을 자신의 신민(臣民)으로 여기는 더블 티의 평소 행실을 감안한다면 그 아이를 납치한 것은 그일 가능성이 높고 혹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의 짓인지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냐는 밀러의 다음 질문엔, 찾아보겠지만 시간이 필요하고, 아마 내일쯤 어디선가 시체로 발견될 확률이 더 높다고도 답했다.
밀러 국장은 생각을 정리했다.
앤 챔버가 아이에게 이상 집착한다는 보고는 받았다. 빠른 시간 안에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것을 원한다는 것도 알았다.
왜 그 아이에 집착하는 것일까?
국장은 앤 챔버의 모든 성장과정을 지켜봤다.
착한 아이였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요구하지 않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요구한 것, 이렇게 강하게 무엇을 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엘 오로의 말대로라면 아이는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약에 취해 뇌에 구멍이 송송 나 있는 카르텔 조직원들이 어린 아이라고 해서 특별히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연민을 새삼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앤 챔버는 스피커폰 모드로 통화를 했다고 했다. 그, 한규호와 같이 있는 공간에서 ‘기프티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했을까? 했다면 어디까지 했을까?
사실 앤 챔버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미국, CIA는 그녀를 신중하게 배양했다. 미국의 중요한 자산으로 보호하면서, 그러면서도 이용당하는 도구라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가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물론 그 중 중요 정보도 있었다. 예를 들어 CIA 국장인 자신이 그녀와 직접적인 선을 대고 있다는 내용이라던가.
한규호가 아닌 자들에겐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겠지만 기프티드인 한규호에겐 그저 쓸 만한 정도일 것이다.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정보 대부분은 그녀 자신에 대한 것뿐이다. 그녀가 어릴 적에 CIA에 털어놓았던 유지조건과 제한조건 같은 것 말이다.
발현조건, 유지조건과 제한조건.
미국은 앤 챔버라는 기프티드의 모든 능력관련 조건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앤 챔버의 발현조건. 태중에서 모체를 통해 일정량의 트로파코캐인(tropacocaine)을 체내에 축적한 다음 출생 이후 1827일 동안 생존해 있으면 염동력(Telekinesis)이 발동한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미국에서는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케이스가 많을 것이다. 임신 중 마약투여를 경험한 임산부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니까.
결론적으로 둘째 딸의 탄생을 통해 능력이 발현되었던 케이스1처럼, 발현조건은 범용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 특정 개인에게만 적용된다는 사실만 알아내는데 그쳤다. CIA에서는 자체적으로 실험도 진행했다. 결과는 동일했다.
아직까지 발현조건과 능력개화와의 정확한 상관관계는 미지수로 남아있다.
유지조건. 발현된 능력인 염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속된 365일 이내에 21.9갤런의 액체를 섭취해야 한다. 액체의 종류는 상관없다.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달성하기 쉬운 조건이다.
연속된 365일, 즉 일 년 동안 21.9갤런, 정확히 21.9969갤런, 100리터의 액체를 종류에 상관없이 마시면 된다. 하루에 0.06갤런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그냥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만 해도 유지조건을 지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유지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케이스 1의 유지조건은 둘째 딸의 생존이었다. 그래서 당시 연구자들은 발현조건과 유지조건간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앤 챔버의 경우에는 달랐다. 두 조건 사이에 아무 상관관계가 없었다. 발현조건과 유지조건과의 상관관계도 정확히 규명하려면 사례가 더 필요하다.
제한조건.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조건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제한조건.
케이스 1의 경우는 죽을 때까지 제한조건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은 전쟁 중이었고, 전쟁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은 전부 전쟁에 투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당시 미국전략사무국(OSS)은 양팔에서 200마력 이상의 힘을 내는 케이스 1의 능력을 탐냈고, 그래서 무리수를 두었다.
구금, 압박, 고문.
케이스 1은 반발했고, 그 결과 당시 상당히 많은 OSS 요원들이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
OSS는 아직 5살 밖에 되지 않은 케이스 1의 둘째 딸을 사살해 유지조건을 상실시킨 후에야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케이스 1의 시체뿐이었고, 해부를 진행했지만 당시 의학기술로는 양팔에서 발생하는 200마력의 힘의 원천을 찾아낼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까? 밀러 국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의학기술이라도 확신할 수 없다. 베팅을 하라면 찾아내지 못한다에 걸 것이다.
아무튼 당시 OSS의 잘못된 생각으로 미국이 발견한 최초의 기프티드는 활용도 못해보고 폐기되어 버렸다. 수많은 요원들의 희생과 함께.
미국은 거기에서 교훈을 얻었고, 기프티드에 대한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했다.
케이스 5, 앤 챔버가 미국에서 가장 부촌 중 하나인 시애틀 머다이나에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것도 그 체계적인 정책의 연장선상이었다.
미국이 확보하고 있는 기프티드는 둘, 케이스 3과 케이스 5.
그 중 제한조건을 알고 있는 것은 케이스 5 뿐. 케이스 3은 당연히 현명하게도 자신의 제한조건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케이스 5가, 앤 챔버가 한규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의 제한 조건이다.
***
3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계속 말없이 듣고만 있던 한규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 출산?”
“네. 출산을 하게 되면 능력을 잃어버리게 돼요. 그게 저의 제한조건이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한규호는 앤 챔버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의 징후도 한규호의 감각에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규호에게는 그녀의 말이 이질적으로 와 닿았다. 한규호 자신도 능력을 가진, 저들이 말하는 기프티드이고, 그 역시 능력이 발현되던 순간 자연히 알게 된 발현조건, 유지조건, 제한조건이 있었다.
다만 각 조건의 성격은 달랐다. 앤 챔버가 말해준 그녀의 조건들과 한규호의 조건은 성격이 너무 상이했다.
그렇기에 한규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선뜻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규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앤 챔버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먼저 능력자, 기프티드들은 한규호, 그리고 앤 챔버와 마찬가지로 발현, 유지, 제한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무작위적인 것일 수 있다.
어떠한 이유로 능력이 생기는지, 능력과 조건과의 상관관계라든지, 어떻게 하면 그 능력을 일반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 등은 한규호에게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백금산의 그 개자식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 있는지,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지 뿐이었다.
앤 챔버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동안 생각해온, 자신과 같은 능력자가 더 있을수도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 사실임을 알았고, 마찬가지로 자신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던 그 개자식도 능력자, 기프티드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놈도 유지나 제한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괴물 같은 그놈에게도 약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먼저 그 조건들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그 조건들이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앤 챔버의 경우처럼 각 조건들이 마약성분의 체내 축적, 하루 210ml의 액체흡입이라는 유지조건, 출산이라는 제한 조건처럼 서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힘들게 세 조건 중 하나를 알아낸다 하더라도 다른 조건들을 유추할 수 없다.
한규호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결론이었다.
“....... 다른 기프티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지?”
“네.”
앤 챔버가 말했다.
“하나 더 묻지.”
한규호가 말했다.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당신의 조건들을 말해주는 거지?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한규호는 이제 그녀가 가진 카드를 전부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것보다 더 특별한, 중요한 정보는 없을 것이다. 제한조건을 방패로 지켜야 하는 정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다만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비밀들을 이야기하는지. 그 이야기를 통해서 그녀가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그저 순진하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넘겨버리기엔 그녀가 스스로 말한 정보는 그녀의 목숨을 한규호에게 맡기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앤이 말했다.
“베르나를.... 그 아이를 구해주는 조건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 아이가 이 능력보다 더 중요하니까.”
한규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알아요. 미국이... 미국이 날 보호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기프티드라서 그런 것임을. 이 능력을.......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저주받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만약 내게..... 이 능력이 없었다면.....”
앤 챔버가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녀가 동생과 마지막 놀이를 나갔던 그 언덕을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앤 챔버의 눈이 다시 한규호를 향했다.
“평생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살았어요. 내가 내 손으로 동생을 죽게 만든 그 사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살았어요. 그리고 이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동네에서 경제적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미국 정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제
가 행복했을까요? 동생을 죽게 만든 이 능력으로 지금 같은 삶을 살 수 있어서 행복했을까요? 기프티드? 아니. 커지드(cursed)에요.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이 능력은 저주에요.”
저주라는 그녀의 말에 한규호도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저주받은 이 능력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지워버리고 싶어요. 이 몸에서 뜯어내 버리고 싶어요. 출산?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애라도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한규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 둘? 스물 셋?
“알아요. 베르나는 힐베르타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이 능력과 바꿔서 그 아일 구할 수 있다면, 이런 능력 따윈 얼마든지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세계를 지키는 히어로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저...... 그저......”
그녀가 말을 멈췄다. 격앙된 자신을 진정시키려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먹을 꼭 쥔 채였다.
한규호는 도밍게즈의 부하가 가져다 준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앤 챔버는 그 생수병을 받아 들어 뚜껑을 열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한규호는 그녀가 무엇을 미안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니겠죠? 미안해요.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고작 이 정도... 뿐이어서....” 앤 챔버가 고작이라고 말했던 정보에 가격을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지금 들은 정보들을 CIA에 다른 곳에 알리지 않을 테니 얼마를 내겠냐고 물어보면 얼마를 줄까?
베르나라는 빈민촌 아이의 목숨보다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금전적 가치를 가진 기프티드의 정보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다수일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어른스러운 사고과정이라고. 소보다 대를 중히 여기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그리고 앤 챔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성적이라느니, 현실을 도외시한다느니,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한다느니 말할 것이다.
“고작 그 정도 뿐이군.”
한규호가 말했다.
생수병을 손에 들고 바닥을 보고 있던 앤 챔버가 고개를 들고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고작 이 정도의 정보로는 베르나를 구해주지 못하겠다고 하려는 것일까?
베르나를 구하려면 뭔가를 더 내놓으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똑똑.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소리가 들린 문을 바라보자 곧 문이 열리고 도밍게즈의 부하 한 사람이 들어와 말했다.
“소령님이 모시고 오랍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앤은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문 앞까지 걸어간 한규호가 뒤돌아서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앤 챔버에게 말했다.
“네?”
“베르나를 구하러 가야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잠시 후 앤 챔버는 의자에서 재빨리 일어나 달려가 막 닫히려는 문을 잡고 열었다.
그녀의 눈에 복도를 걸어가는 한규호의 넓은 등이 들어왔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