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1) >
3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베르나가 납치됐어요.”
(베르나? 베르나가 누구니?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지금 어디야? 괜찮니?)
“지금 카라카스에요. 어딘지 자세히 말 할 수는 없지만.”
(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행기를....)
“베르나는 제가 미국에 데려가겠다던 여자아이에요. 우리가 공항으로 떠난 사이 누군가가 아이를 납치하고..........”
앤 챔버는 사진을 떠올렸다. 두 눈을 꼭 감고 눈물로 범벅된 베르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깐만.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는 비행기를 탔어야지! 그 위험한 곳에서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기프티드가 아니라서?”
앤 챔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뭐.... 뭐라고?)
“왜? 그 아이는 기프티드가 아니라서 필요 없나요? 기프티드인 나는 미국의 중요한 자산이니까, 아이가 죽든 말든 상관없이 빨리 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나요?”
한규호는 앤 챔버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린 것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다시피 나는 죽지 않으니까. 죽을 수 없으니까.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앤. 지금 뭐라고 했.....)
“걱정하지 말라고요. 염동력에 의해 보호 받는 앤 챔버는,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보고하면 된다고요!”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앤 챔버도 허공을 노려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 한규호까지 세 사람의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앤 챔버.)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전화기 너머의 신시아 챔버였다.
(앤 챔버. 대답하렴.)
“말하세요.”
(무슨 일이 있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엄마는 지금 진짜 화났어. 나중에 돌아오면 이번 일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눠야 할 거야.)
“나는 할 말......”
(엄마가 말하고 있잖니. 우선 그 곳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니까 삼촌에게 말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되겠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니?)
“베르나를 구출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구출하려고? 구출했다고 해도 어떻게 데려 올 건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앤 챔버.)
한규호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을 혼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앤 챔버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
앤 챔버는 말이 없었다. (혹시 그도 같이 있니? 이 통화를 듣고 있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앤 챔버의 등이 움찔했다.
(여보세요. 혹시 거기 있나요? 미스터 한?)
그녀는 한규호를 스즈키가 아닌 미스터 한이라고 불렀다.
앤 챔버의 시선이 한규호를 향했다. 미스터 한이 스즈키를 말하는 것일까?
(미스터 한? 거기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한규호가 대답했다.
(그나마 당신이 같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우리 앤이 다치진 않았나요?)
“....... 따님은 무사합니다.”
(갑자기 실례했어요. 전화 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이 스피커폰 모드 같더군요. 우리 앤을 부탁해요. 다 컸다고 해도 아직 아이랍니다.)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앤 챔버를 보았다. 그녀의 눈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엄마 때문에 당혹스러워 하는 딸의 눈빛이 보였다.
(당신이 있는데도 기프티드라는 단어를 꺼낸 것을 보니 앤이 이미 이야기를 했나 보군요. 조만간 정중히 모실 테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아이를 구출할 생각인가요?)
분위기가 변했다.
앤과 통화할 때, 인솔 선생님을 바꿔 달라는 듯 한규호를 찾을 때는 엄마의 말투였는데, 기프티드라는 단어를 말한 이후부터는 요원의 어투로 변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뭘 도와 줄 수 있습니까?”
(2~3시간 거리에 우리 사람들이 있어요.)
“CIA?”
한규호가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맞아요.)
그녀는 인정했다.
“특작팀?”
(혹시나 해서 준비된 팀이에요. 여차하면 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구출 전문 팀이에요.)
“헬기도 있겠군요. 필요하면 그때 말하도록 하지요.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됩니까?”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요.)
“알겠습니다.”
(미스터 한. 우리 애(my kid)를...... 잘 부탁해요.)
한규호는 앤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앤. 듣고 있지? 우선 미스터 한의 지시를 따르고,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꾸나. 알겠지?) 한규호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신시아 챔버는 앤에게 말했다.
당황한 앤은 답을 하지 못했다.
스즈키, 아니 미스터 한과 신시아 챔버 간의 선생님과 학부모의 대화 같은 통화 내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듣는 화난 신시아의 말투 때문이었는지 앤은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미스터 한. 다시 한 번 딸을 부탁드려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한규호는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
3일차
스프링필드 3만 4000피트 상공
일리노이 주, 미국
90년대 초반, 모토로라는 지구 어디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위성 전화망을 구축한다는 구상으로 전 세계를 커버할 수 있도록 77개의 위성을 쏘아 올리며 원소번호 77번 이리듐의 이름을 딴 이리듐 계획을 수립했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통화가 가능한 위성 전화 시스템을 만든다는 이 계획은 당시 상당한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리듐 계획은 곧 암초에 부딪혔다.
이용 비용은 너무 비쌌고, 이용 대상은 너무 적었다.
게다가 예상보다 훨씬 빠른 무선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당초 주목표고객이었던 기업들은 값비싼 이리듐 전화 대신 저렴한 현지 로밍을 선택했다.
이리듐 계획이 폐기되기 직전, 호흡기를 달아준 곳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활용하기 위한 통신 수단을 찾던 미 국방부였다.
위성을 기지국으로 사용하는 이리듐 통신의 높은 보안성을 높이 산 국방부가 계약을 맺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리듐 계획은 가장 실패한 무선 통신 사업으로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국방부와 미 정부의 지원 아래, 77개 위성이 66개로 줄어든 지금까지, 이리듐 위성전화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리듐 무선통신을 이용한 이리듐 익스트림 단말기 중 하나가 일리노이 주 3만 4000피트 상공을 날고 있는 CIA 네일 밀러 국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기프티드란 단어를 말했다고?”
밀러 국장이 다시 확인했다.
(그래요, 아마도 그 애가 이야길 한 것 같아요. 아니. 분명히 했어요.)
밀러 국장은 말없이 생각했다.
언젠가 한규호, 그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있었다. 그게 협상이든, 협박이든 그를 미국에 품으려면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과 시기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한규호가 이쪽의 패를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 챔버. 미국이 가진 기프티드를 너무 쉽게 노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안전하다고, 적어도 미국의 최고 전략 자산 중 하나인 그녀를 잃을 염려가 없다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둘을 얻으려다 모두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밀러 국장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말없이 그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뭐라도 해야죠!)
전화기 너머로 신시아 챔버가 소리쳤다.
밀러 국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신시아 챔버, CIA에서도 단 둘밖에 없는 기프티드 전담요원. 아주 중요한, 아끼는 부하였지만, 그녀는 상관이나 동료가 아닌 부하다.
“조치를 취하지.”
밀러 국장이 말했다. 언젠가 그녀를 처리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아니다. 앤 챔버 때문에라도 신시아 챔버는 아직 필요하다. (빨리요. 정말. 난.... 불안해서.....)
밀러 국장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가 앤 챔버를 맡은 지 얼마나 되었지? 7살? 8살? 그즈음부터니까 벌써 15년은 됐겠군.
15년.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다. 한 사람의 요원이 피감시자에게 정을 붙이고 엄마가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할리우드가 좋아할 이야기다. 필요에 의해 만나서 가족이 되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Based on a true story.)
많이 보던 카피문구를 밀러 국장은 떠올렸다.
밀러에게 필요한 사람은 냉철하고 유능한 부하인 신시아 챔버였지 정에 이끌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상관에게 기어오르는 양엄마 신시아 챔버가 아니었다.
방해가 된다면 나중에 처리하면 될 일이다. 우선은 상황을 좀 개선시킬 필요가 있었다.
밀러 국장은 손에 든 전화기를 바라보다 전화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시죠.)
“아이가 납치된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나?”
국장이 말했다.
전화기 너머의 남자.
미국이 오랜 기간 공들여 키운 작품 중 하나인 엘 오로는 밀러가 말하는 아이가 인터뷰를 했던 그 꼬마 여자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 차렸다.
***
3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전화 통화가 끝난 직후 음식을 들고 들어왔던 도밍게즈의 부하를 제외하고는, 한규호가 앤 챔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규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
5살에 능력이 발현되었고, 발현된 능력으로 어떻게 여동생을 죽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남자들에게 복수를 했으며 그 후 정신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와 CIA의 통제 하에 양어머니를 배정받고, -앤 챔버는 그렇게 말했다. 양어머니를 배정받았다고- 머다이나, 시애틀 외
곽의 부촌(富村)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장 과정에서 미국이 그녀가 가진 능력, 염동력과 염동력에 기반을 둔 완전보호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트에서 C4까지 동원된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규호는 미국이 해부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전부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죽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해부도 했을 것이다.
“해부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한규호가 말했다.
“할 수 없었죠. 메스가 닿질 않으니.”
앤 챔버가 말했다.
“그렇겠군.”
미국 놈들이 시도는 해봤군.
“미국은 당신 말고 또 누구를 확보하고 있지?”
한규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규호에게도 앤 챔버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어떠한 대접을 받았고, 어떠한 위치에 있고, 미국이 그녀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은 분명히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한규호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저는 몰라요.”
앤 챔버가 답했다.
한규호는 앤 챔버의 눈을 바라보았다.
웬만한 거짓말로는 한규호를 속일 수 없다.
숨소리, 심박, 체온, 땀, 그리고 동공의 움직임 등이 한규호에게 거짓인지 참인지를 알려주었으니까.
한규호는 그녀의 성장과정을 들으면서 그녀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녀는 기프티드이지, 기프티드를 관리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당신이 기프티드라는 것은 누가 알고 있지?”
“양 엄마. 그리고 삼촌. 제가 아는 건 이 두 명뿐이에요.”
“삼촌?”
조금 전의 통화에서도 삼촌(Uncle)이라는 단어가 언급됐다. 한규호는 Uncle 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쓰였다고 느꼈다. 가족끼리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미국 문화를 감안한다면 뒤에 이름이 붙지 않는 채로 단지 삼촌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한국에서라면 삼촌이라는 단어를 지칭으로 사용하는데 어색함이 없겠지만,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엉클은 자격을 의미하는 명칭이지, 사람을 가리키는 지칭이나 호칭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네일 밀러. CIA 국장이요. 삼촌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당신 양 어머니는 국장 직속이라고 봐도 되겠군.”
앤 챔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첩보기관의 정점에 서 있다는 CIA 국장이 그녀를 직접 관리한다는 의미였다. 공항에서 앤 챔버가 국장에게 전화를 하면 믿어 주겠냐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국장의 직속 부하가 그녀의 양 엄마다.
미국은 기프티드를 국가 차원에서 특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기프티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나?”
한규호가 물었다.
“아니요. 제 양어머니는 저를 그저..... 그저.... 딸처럼 키웠어요. 물론 명령을 받았으니 그랬겠지만..... 저는 가끔 병원이나 연구소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반적인 아이처럼 자랐어요. 기프티드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앤 챔버는 공항에서 기프티드에 관한 정보를 패로 삼아 베팅했었다.
그건 블러핑이었다. 그녀는 사실 한규호를 만족시킬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 자체가 기프티드라는 존재의 살아있는 증명이었고, 미국이 기프티드를 중요하게 여기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한규호가 정말로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 개자식에 대한 정보였다.
만약 미국이 그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결국 한규호는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과 대화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건 정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한규호는 비싸더라도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었다.
그 개자식만 찾을 수 있다면.
앤 챔버는 한규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말한 것치고 스스로도 너무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거기에 갑자기 무서워지는 한규호의 표정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저의 제한....... 조건에 대해서 말씀..... 드릴까요?”
제한 조건.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조건.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결코 다른 이에게 알려줘서는 안 되는 조건.
“미국은 알고 있나?”
“......네.”
앤 챔버는 어릴 때 미국으로 갔고, 그래서 제한조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정보를 노출했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를 인질로 잡으면? 제한조건을 확보하고 앤 챔버의 능력을 지워버리겠다고 협박한다면?
그렇다면 미국의 요구에 대항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앤 챔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