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0) >
3일차
북부 창고(el deposito norte)
로스 메쎄도레스(Los Mecedore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는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딘가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온몸으로 불쾌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꽉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푸에르토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잠시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고, 삼촌에게 카르텔을 물려받고 나서 그는 육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낀 경험이 없었다.
그랬던 그는 지금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묶인 채, 불편한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이? 꿈인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항상 그의 곁을 지키는 그의 부하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이 목소리 또한 알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알지 못하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푸에르토의 바로 지척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에도 푸에르토는 두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바로 옆에서 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너무 이질적이고 낯설어 푸에트로는 지금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미친놈이 창 밖에서 총을 쏜 후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 아니,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총을 쐈던가?
아무튼 들어온 누군가를 돌아보는데 그놈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느껴질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래. 기억났다.
턱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밟혔다.
기억났다. 그 고통이.
그리고 손가락을 밟은 그자가 자신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자의 눈빛뿐이었다.
꿈인가?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건 꿈이다. 악몽이다.
난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푸에르토의 방어기제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디서부터 악몽이었을까? 괴한이 창문을 깨고 들어왔을 때? 살비아노의 시신이 회의실로 옮겨졌을 때? 살비아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서부터가 악몽의 시작이지?
그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갑자기 동공으로 들어온 빛에 푸에르토는 자신의 눈이 타는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눈 떠라. 푸에르토.”
알아들을 수 있는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앞서 들려왔던 두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푸에르토는 강렬한 빛의 자극을 줄이기 위해 가늘게 눈을 떴다.
의자에 묶여 있는 자신의 두 다리가 보였다.
천천히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시멘트의 우중충한 잿빛이 그대로 드러난 육면체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과 천장에 매달린 채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백열등이 있었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으로 걸어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때 푸에르토의 뺨을 무언가가 후려쳤다.
푸에르토의 머리가 한쪽으로 돌았다가 굵은 목근육에 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푸에르토는 자신의 뺨을 때린 것이 한 남자의 주먹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입안이 터진 것도 알 수 있었다. 붉은 체액이 마른 입안을 적셔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의자에 뒤로 묶인 두 손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푸에르토의 정면으로 다가와 천천히 몸을 굽혔다. 높이가 맞을 때까지 몸을 굽혀서 그는 푸에르토와 눈을 맞췄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반갑다. 바르가스 주의 위대한 지배자 엘 푸에르토.”
자신의 아구창을 돌린 남자가 말했다.
“푸에르토. 나는 말이지.”
남자가 푸에르토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16년 전, 내 첫딸이 태어났을 때 말이야. 내 인생에서 그날만큼 기쁜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짧은 머리 남자의 얼굴은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상체 근육은 아주 단단해 보였다. 그 단단한 상체 근육에서 나온 힘으로 푸에르토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어. 그보다 더 기쁜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거지.”
푸에르토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라파엘라(Rafaela)를 기억하나? 라파엘라 카레로 톨레도(Rafaela Carrero Toledo)라는 이름을 기억하나?”
“누......누구? 라파...엘라?”
푸에르토는 정신이 들고 처음 입을 열어 말했다. 바싹 마른 입술과 메마른 목 때문에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턱과 입에 고통이 찾아왔다.
아팠다. 이게 악몽이고, 꿈이라면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아팠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어. 이해해주길 바란다. 항상, 지난 8년 동안 줄곧 묻고 싶었거든.”
남자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푸에르토의 눈에, 바지 위로도 느껴지는 단단한 허벅지가 보였다.
남자는 몸을 돌려 반짝이는 것들이 놓여있는 탁자로 걸어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8년이 지났군. 벌써.” 그가 몸을 돌린 채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방 안의 벽에 반사되어 푸에르토의 귀에 정확하게 들려왔다.
“8년 전, 9월이었지. 네가 아직 레니 페레아라고 불리던 시절이다.”
남자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지만 푸에르토에겐 보이지 않았다.
“이건 알겠지. 호세 마리아 바르가스 종합병원(Hospital Jose Maria Vargas).”
푸에르토도 아는 곳이다. 바르가스 주에서, 라과이라 항만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고, 그의 거처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었으니까.
“가을의 어느 늦은 밤 호세 마리아 바르가스 종합병원에 사람들이 들이닥쳤지. 당직을 서던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어. 밤에 사람이 들이닥쳐서가 아니라, 들이닥친 사람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카르텔 조직원들이어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 앞에 섰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망치였다.
“그 놈들은 그날 하던 대로 파티를 벌였어. 싸구려 창녀 몇몇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약을 빨았지. 그러다 그중 한명이 멍청하게 평소보다 더 많이 약을 빨았는지 눈이 뒤집히고 거품을 물었다. 그래서 술과 약에 취한 너와 너의 졸개들은 그놈을 실은 차를 몰고 병원에 들
이 닥쳤고.”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을 굽혀 푸에르토와 다시 눈을 맞췄다.
“안타깝게도 그날 먼저 온 환자가 있었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30분을 걸어서 병원에 온 7살 먹은 여자 아이가.”
푸에르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먼저 온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너는 뚜벅뚜벅 걸어가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에게 총을 갈기고는 말했지. 기억나나?”
푸에르토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겠지. 너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런. 먼저 온 환자가 방금 사망해버렸네.”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자신이 했다는 말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측이 맞는 듯 했다. 남자가 왼손으로 푸에르토의 발목을 잡았다.
“이야기가 길어졌군. 빨리 말하지. 그로부터 3년 후, 지금으로부턴 5년 전이군. 폐인이 된 나에게 도밍게즈 소령님이, 아니 그 땐 대위였군. 하여튼 찾아와 말했지. 복수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나는 믿진 않았어. 그저 믿고 싶었을 뿐이었지. 그렇지 않으면, 복수할 수 있
을 것이라고 믿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
남자의 오른손이, 망치를 잡은 오른손이 힘을 얼마나 주었는지 손아귀가 하얗게 되며 핏줄이 드러났다.
“참 복잡한 심정이야. 레니 페레아. 최대한 죽음을 늦추면서 더 많은 고통을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널 보니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군. 다행이야. 만약 너에게서 정보를 빼내야 한다는 제약이 없었다면 정말 이성을 잃고 단번에 편한 죽음을 네 놈에게 선물할 뻔 했
어.”
망치를 잡은 오른손이 서서히 남자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푸에르토는 남자의 왼손에 잡힌 발목에 느껴지는 힘을 통해 올라간 망치가 어디로 내려올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을 드디어 맞이하게 됐는데, 막상 닥치게 되니 정말 복잡한 심경이야. 솔직한 심정으론 울고 싶군. 레니 페레아. 아직 정신이 남아 있을 때 잘 기억해 둬라. 8년 전 그날 네가 살해한 여자아이의 이름 라파엘라 카레로 톨레도를.”
망치를 쥔 그의 오른손이 내려갔다.
***
한규호와 앤 챔버는 창고 사무실 중 한 곳에 앉아 있었다. 매트리스와 소파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니 휴게실 겸 수면실로 사용하는 공간인 듯했다.
도밍게즈에 설명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군부 내에서 배척받는 비주류의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휘관인 도밍게즈 그부터 군부 내에서 미운털이 박혀 있어서, 가문의 후광 덕에 전역하지 않고 버티고는 있었지만 공적과 능력에 비해 승진이 늦은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다. 도밍게즈의 부하들도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강직하고, 뇌물도 받지 않는 청렴한 군인들, 그
래서 윗사람들에게 밉보인 그런 군인들을 모으다보니 지금의 부대가 되었다.
도밍게즈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 놓아야했다.
부패한 군부가 돈을 받고 자신들을 뒤에서 칠 수도 있다. 도밍게즈는 동료인 군에 배신당하는 비상 상황도 상정해 놓았고, 그 때 부대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임시 집결지도 여러 군데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여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이 창고도 그런 임시 집결지 중 하나
였다.
“사병(私兵)이군.” 그 이야길 들은 한규호가 말했다.
“사병이지.”
도밍게즈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도밍게즈의 웃음이 싫지 않았다. 충성은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만 의미가 있다. 도밍게즈는 군부가 아닌 베네수엘라에 충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잠시 쉬고 있으라고. 먹을 것도 좀 가져오라고 하겠네.”
도밍게즈는 문을 열고 나갔다. 사무실에는 한규호와 앤 챔버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한규호는 앤 챔버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물어야 할 것이 많았다.
“말해 봐.”
한규호가 말했다.
“네?”
앤 챔버가 물었다.
“아까 말한 기프티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봐.”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그 말에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기프티드는.....”
그 순간 휴대전화의 진동이 방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입을 열려던 앤 챔버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한 앤 챔버는 전화기를 들어 확인했다.
“...... 양 어머니......에요.”
“비켜 줄까?”
한규호가 말했다.
앤 챔버는 손에서 진동하고 있는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어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앤 챔버는 심호흡을 한 후 통화 버튼을 누르고 바로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앤?)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네.”
앤이 답했다.
한규호는 앤이 통화를 노출하는 것이 자신에게 해줄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비행기를 안탔더구나. 어떻게 된 거니? 지금 어디니?)
전화기 너머로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베르나가 납치됐어요.” 앤 챔버가 답했다. 그 말투에 냉기가 가득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