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9) >
3일차
라과이라 항(港)(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베네수엘라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들려오던 총격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도밍게즈는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총격전이 끝났다. 더 이상 쏴야 할 상대방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스즈키가 살아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스즈키, 아직 건물 최상층에 매달려 있던 그 무언가가 스즈키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스즈키가 맞다는 가정 하에, 스즈키가 살아서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도밍게즈도 잠시 기대를 가졌다. 어쩌면 그가 살아서 돌아 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던 총소리가 사라지고, 그는 이성을 찾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차라리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아니 간격을 조금 두고 계속 들리기라도 했다면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즈키가 건물 안으로 사라진 직후에 연달아 들린 총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가 권총을 연발로 쏘면서 조직원들을 해치웠다? 아니면 조직원들에 의해 집중 사격을 당했다?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당연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후자다. 스즈키는 포위된 채로 집중 사격을 당했을 것이다. 아니. 당했다.
스즈키가 뛰어든 층에 적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건물 안에는? 오십 명? 백 명?
몇 명이 있든 스즈키가 그곳에서 살아나올 것을 기대하고 지금처럼 마냥 기다려선 안 된다.
도밍게즈의 이성은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아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복수를, 오늘 전사한 부대원들의 복수를,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의 복수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도밍게즈는 떠날 수 없었다.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밍게즈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브레이크를 꾹 밟고 있는 그의 오른발을 계속 지탱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밍게즈는 힐끗 룸미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처럼 창문에 붙어 한 곳만을 주시하고 있는 앤 챔버를 살펴보았다.
저 젊은 아가씨도 알고 있을까?
아까 전 그 총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을까?
그가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어서 빨리 여길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저 젊은 아가씨가 알고 있을까?
“저기!” 그때 룸미러 안의 앤 챔버가 다급하게 손을 들며 외쳤다. 도밍게즈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건물 정면에서 걸어 나오는 무언가를 보았다.
무언가.
그렇게 보였다.
언뜻 보아서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덩치 큰 무언가로 보았다.
그리고 초점을 맞추기 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무언가가 축 늘어진 거한을 어깨에 들쳐 맨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다음에야 그 남자가 스즈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밍게즈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어 액셀로 옮겨 밟았다.
계속 시동이 걸린 채로 1000rpm 이하로 공회전하며 준비하던 엔진이 빠르게 회전수를 올렸다.
급출발로 인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앤 챔버의 몸이 뒤로 쏠렸다.
용수철처럼 튀어나간 밴이 30여 미터를 전진한 후 급정거했다.
앤은 급정거하는 차 안에서 흔들리는 몸을 가누어, 차가 멈추기도 전에 오른쪽 뒷문을 열었다.
“안쪽으로.”
뒷문이 열리자 한규호가 말했다.
앤 챔버가 재빠르게 조수석 뒷자리에서 운전석 뒷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앤 챔버가 자리를 옮기자 한규호는 영차 소리도 없이 자신이 들쳐 매고 있던 사람을 앤 챔버가 앉아 있던 좌석에 사냥해온 멧돼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맞나?”
한규호는 내려놓은 사냥감의 머리를 들어 도밍게즈에게 보여 주었다.
“맞아!”
도밍게즈는 그렇게 외치면서, 자신의 눈으로 보고 맞다고 외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스즈키의 손에 머리카락을 잡혀 얼굴을 드러낸 남자가 라과이라 항과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을 지배하는 최대 범죄조직의 수장인 푸에르토라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도밍게즈는 스즈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환자에게 벨트를 채우듯 정신을 잃은 푸에트로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우고, 뒷문을 닫은 후,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안전벨트를 매는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한 단어를 되뇌었다.
비현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장면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엑셀로 옮긴 발에 힘을 주어 차량을 빠르게 출발시켰다.
안전벨트에 묶인 푸에르토의 몸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
밴은 카라카스-라과이라 고속도를 타고 카라카스 방향으로 향해 나아갔다.
팔짱을 낀 채로 조수석에 앉아서 한규호는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도밍게즈를 슬쩍 보았다.
그가 쓸데없는 것을 묻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잡았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대신, 묵묵히 차량을 몰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도밍게즈의 판단이 마음에 들었다.
도밍게즈를 보면 예전 상관이 떠올랐다. 말보다 행동이 빨랐고, 행동보다 판단이 빠르던 그의 상관 진도 0. 이규철 대위가 떠올랐다.
도밍게즈는 차량을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빠르게 몰았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차를 몰아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인터체인지를 지나치고 나서야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푸에르토의 구역이기는 했지만, 공항 인터체인지를 지나면 그래도 가장 위험한 지역은 일단 벗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해줌으로써 정신과 육체에 내렸던 경계경보를 한 단계 낮추라고 신호를 보냈다. 깊게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은 도밍게즈는 여전히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입을 열었다.
“깨진 않나?”
도밍게즈가 물었다.
만약 뒷좌석에 있는 푸에로토가 깨어난다면, 뒷좌석에 그와 같이 앉아 있는 앤 챔버가 위험해질 수 있다.
“안 깨어나.”
한규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살아 있나?”
“아마도.”
깨어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더니, 살아있냐는 질문에는 아마도라니.
“다친 곳은 없어요?”
뒷자리에 앉은 앤 챔버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그녀의 질문에 속으로 미소지었다.
도밍게즈처럼 그녀도 궁금한 것이 있었고, 도밍게즈처럼 그녀도 질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현명한 여자다.
“괜찮아.”
한규호가 답했다.
도밍게즈는 안도하는 앤 챔버의 모습을 룸미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또 다시 입을 닫았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우선은 스즈키를 쉬게 해야 한다는 침묵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침묵에 잠긴 밴은 카라카스 방향으로 처음 나오는 터널, 트럭 운전사들이 소위 ‘성모마리아 포인트’라고 부르는 첫 번째 터널 입구를 지나쳤다.
“어디로 가지?”
차량이 터널로 들어가자 한규호가 물었다. 다시 JW 매리어트 호텔로 갈 수는 없으니까.
“안전한 곳이 있어. 은밀하고.”
도밍게즈가 말했다.
한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눈을 감았다.
터널을 빠져 나온 밴이 좌측으로 크게 꺾인 길로 들어섰다. 몇 시간 전 그들이 지나왔던 ‘죽음의 검은 길’이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도밍게즈의 눈에, 도로가에 불탄 흔적이 있는 도요타 시에나의 모습이 보였다. 반대편 차선에서 전복되어 있는 두 대의 밴도 볼 수 있었다.
도밍게즈는 차량의 잔해들을 스쳐 지나면서 두 번째 터널로 진입하면서 곁눈질로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힐끗 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
차량이 카라카스 시내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해도 완전히 다 져물어서 어둠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
도밍게즈가 운전하는 밴은 교통량이 많아지면서 속도를 늦춰서 차량들의 흐름에 섞여 자연스럽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계속 움직였다.
차량 속도가 느려지자 도밍게즈는 차량 내부를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는 룸미러로 조수석 뒤에 앉아 있는, 앉아 있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신을 잃고 앉아 있는 푸에르토를 다시 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도밍게즈는 몇 번이나 뒤의 푸에르토를 살폈다. 한규호의 확답에도 불구하고 그가 깨어나 앤 챔버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그녀를 인질로 잡거나, 아니면 운전하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칠까봐 내심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에르토는 스즈키의 말처럼 이동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어둠이 짙어져 실내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밍게즈는 시선을 돌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도밍게즈는 운전을 하면서 계속 옆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 남자와 적이 되었을 때, 과연 그를 상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오는 내내 생각해보았다.
그럴 수 있을까?
도밍게즈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를 생포하거나, 사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까. 비현실적인 지금 상황을 이끌어낸 이 사람은.
한 남자가 떠올랐다. 같은 동양인. 군인 출신. 인간 같지 않은 전투력을 가진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도 과연 스즈키처럼 카르텔 본부에 들어가 조직원들을 뚫고 보스를 체포해 올 수 있을까?
도밍게즈는 운전 중임에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도밍게즈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
한참을 더 달려 밴은 카라카스 북부 외곽에 위치한 한 창고 앞에서 멈추었다.
차량이 멈추자 창고를 가로막고 있는 육중한 철문에 붙어있는 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무장한 두 사람이 운전석을 향해 총을 겨누면서 다가왔다.
“soy yo.(나다)”
도밍게즈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면서 말했다. 도밍게즈의 얼굴을 확인한 두 명이 총을 내리고 다시 쪽문으로 들어갔다. 곧 철문이 열렸다.
열린 철문으로 들어가는 차안에서 한규호는 창고를 살펴보았다. 10 FEU(40피트 컨테이너 10대)는 동시에 작업이 가능할 정도의 규모였다.
“어디지? 여기는?”
한규호가 물었다.
“가문에서 예전에 운영하던 창고였는데, 지금은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가문?”
“이래 보여도 도밍게즈 가문은 독립전쟁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
도밍게즈는 씩 웃어 보이며 차를 창고 한 쪽에 주차했다.
도밍게즈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비공식적으로 휴가에서 복귀한 도밍게즈의 부대원들이었다.
“심문은 우리가 해도 괜찮을까?”
차량을 창고 건물 가까이 주차한 도밍게즈는 시동을 끄기도 전에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푸에르토를 생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르나를 그가 납치했는지, 납치했다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게 푸에르토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였다.
도밍게즈가 한규호에게 양해를 구했다.
“부탁하지.”
한규호가 답했다.
“베르나를 최우선으로 하겠네.”
한규호는 부하를 잃은 도밍게즈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직 군인이었던 한규호는 그 분노가 얼마나 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직접 경험해 봤으니까.
도밍게즈의 부대원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과격한 심문을 할 것이다. 누가 어떻게 자신들의 전우를 해쳤는지 알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밍게즈는 정보수집에 베르나를 우선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소령님.”
옆에 있던 앤 챔버도 도밍게즈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개를 끄덕인 도밍게즈는 시동을 끈 다음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한규호가 조수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자, 운전석 뒤에 앉아 있던 앤 챔버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푸에르토를 최대한 건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문에서 내렸다.
도밍게즈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부하들을 둘러보다 그 중 근육질의 남자에게 말을 건냈다.
“돌레도 상사. 자네가 원하던 귀한 손님을 모셔왔으니, 대접해 드릴 준비를 하도록.”
도밍게즈에게 지시를 받은 근육질 남자의 시선은 이미 정신을 잃고 있는 푸에르토에게 박혀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