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99화 (100/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6) >

3일차

라과이라 항(港) (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베네수엘라

1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마자 CCTV 카메라부터 파괴한 한규호는 복도 끝에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로 나가자 넓게 펼처진 캐리비언의 바다와 라과이라 항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쪽 바다로 져가는 태양 때문에 바다는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규호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느꼈다. 잔잔한, 하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기의 흐름이 상쾌함을 가득 담아 한규호를 감쌌다.

한규호는 평화로운 오후의 바다를 잠시 살펴 본 후 피식 하고 웃었다.

카르텔 본거지에서 무장한 조직원들을 뚫고 보스를 납치하려고 하는 그도 한 순간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한규호는 숨을 깊게 들이 쉰 후 권총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건물 외벽을 살펴보았다.

만들어진지 20년은 된 것 같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건물 외벽에는 잡을만한 곳이 많아 보였다.

한규호는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 전신을 지탱할 수 있었고, 잡을 곳만 있으면 어디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벽을 타고 2개 층을 올라가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빠르고 간단한 일이었다.

두 번으로는 힘들겠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왼손을 뻗어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돌기를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자신의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단 세 번의 손짓으로 2개의 층을 단숨에 올라갔다.

12층 외벽까지 올라간 한규호는 테라스를 통해 복도로 들어가는 대신 벽을 타고 옆으로 이동해 건물 외벽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내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사각지대에 몸을 붙이고 한규호는 감각을 확대했다.

일단 12층에 푸에르토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냥 테라스를 통해 12층으로 들어가 대놓고 찾는 방법도 선택지 중에 하나였지만 푸에르토를 살려서 데려갈 확률을 높이려면 이렇게 스파이더맨 흉내를 내는 편이 더 나았다.

확대된 감각에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잡혔다. 이런 저런 소리가 공기를 통해, 유리를 타고, 건물 외벽을 타고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외침의 파동이 그에게 전해졌다.

한규호는 직감적으로 그 외침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리는 지시라는 것을 알았다.

귀찮은데 그냥 이대로 벽을 탈까? 외벽을 타고 그쪽 방향으로 이동할까?

한규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옥상으로 몸을 움직였다.

외벽을 타고 이동하다가 행여 창문을 바라보는 조직원에게 발각이라도 당하면 힘들여 10층에서 벽을 타고 올라온 보람이 없어진다. 그럴 바엔 조금 귀찮아도 옥상으로 올라가 이동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였다.

끌어올린 감각을 통해 이미 옥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기에 한규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옥상으로 몸을 날렸다.

공중에 뜬 몸이 옥상에 착지하기도 전에 한규호는 CCTV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자신이 올라간 위치가 CCTV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을 그는 다리가 닫기도 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규호는 총알을 낭비하는 대신 착지 후 빠르게 발을 움직여 날카로운

고음의 진동이 느껴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 위치에 도달한 한규호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특수 부대가 레펠을 하듯 다시 옥상 밖으로 몸을 날렸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규호에 몸에는 로프가 없다는 점이었다.

옥상에서 몸을 날린 한규호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벽에 나와 있는 작은 요철들을 잡아가며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다시 12층으로 내려왔고.

조금 전처럼 사각지대에 몸을 숨기지 않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바로 창문 쪽으로 붙었다.

창문 너머로 회의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운데 긴 타원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테이블 위에는 시체로 보이는 무언가 눕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주위에 4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중 3명은 동일한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청바지에 폴로셔츠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한규호는 그가 가장 지위가 높다고 판단했다.

한규호는 폴로셔츠를 입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사내가 창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가 푸에르토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확인하지 못해도 한규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한규호는 오른손으로 건물 외벽의 작은 요철을 잡고 두 다리로 몸을 고정하면서 왼손으로 허리춤에 넣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검은 양복들과의 거리는 대략 5~7m.

왼손에 들린 PT92로 감시 카메라를 쏴본 결과, 그 정도 거리에서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열 일곱, 열 셋.”

한규호는 작게 중얼거린 후 건물 안,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검은 양복을 겨냥했다.

1층 로비에서처럼 한발 같은 세발을 쏴서 검은 양복 셋을 처리하기 위해서.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막 힘을 주려던 찰나, 가장 가까운 검은 양복의 시선이 한규호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한규호는 그의 고개가 전부 돌아올 때 까지 잠시 기다렸다.

감각이 극대화된 한규호에게는 검은 양복이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인지하고, 놀라움에 동공이 확대되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경악에 찬 눈으로 창 밖에 한규호를 바라보는 가장 가까운 검은 양복의 이마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

푸에르토를 밀착 경호하는 부하들은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사촌동생의 시신을 계속 노려보고 있는 그의 보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푸에르토를 지키기 위해 자라왔고, 평생 동안 그 일을 해왔다.

그렇기에, 푸에르토가 간혹 어이없는 일을 벌이더라도 거기에 의문을 품거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항운노조원이라고, 항구 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푸에르토는 보통은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실수는 그냥 넘어갔고, 돈과 술과 약과 여자를 조직원들과 공유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카르텔의 수장이라는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자리였고, 그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지면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계속 시신을, 얼굴의 3분의 1이 날아간 시신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푸에르토가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신들은 아직까지 무사했지만, 그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그의 보스가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황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중 한 명은 자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창 밖에 매달려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어진 총구가 보였다.

쾅쾅쾅

그의 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불꽃을 뿜는 총구였다.

***

총구가 화염과 총알을 뿜어냄과 동시에, 움직여 두 번째 가까운 검은 양복의 두개골 우측 후방을 겨냥했고, 어김없이 두 번째 총알이 발사됐다. 세 번째 총알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 총구를 떠났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한규호는 PT92를 연사하듯 세 발을 쏘았다.

꽝꽝꽝. 총구를 떠난 총알들은 찰나의 시간에 몇 미터를 날아가 정확하게 한규호가 노린 곳에 도달해 검은 양복들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한발 같은 세발을 발사한 한규호는 표적에 맞았는지 확인 하는 대신, 대신 벽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건물 바깥쪽으로 띄운 몸을 반동을 이용해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총알로 구멍이 난 유리에 그의 몸이 닿기 바로 직전 그의 몸에서 방출된 기가 6mm 두께의 열선흡수 판유리(Heat Absorbing Glass)를 강하게 진동시켰다.

진동으로 약화된 판유리의 분자결합은. 뒤이어 가속도를 더한 한규호의 몸무게가 유리에 실리면서, 완전히 끊어졌다.

“열 일곱. 열.”

한규호는 창문을 깨고 들어가며 작게 읊조렸다.

***

양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도밍게즈는 초조한 마음으로 항운노조 건물 1층 현관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 곳을 통해서 카르텔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것만 같았다.

스즈키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적어도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있는 카르텔 본부에 혼자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무기라고는 총알이 몇 발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 방탄복도, 방탄 헬멧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 비교하면, 몇 시간 전 있었던 추격전은 차라리 말이 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섯 발을 쐈다. 다섯 발을 선두차량에 쏘고, 운이 좋아 첫 번째 차량의 운전수가 제어를 상실하고,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과속하고 있던 두 번째, 세 번째 차량이 뒤엉킨다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카르텔 조직원들이 우글우글한 본부에 혼자 들어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말렸어야 했다. 그를 잡았어야 했다.

그를 억지로 잡고서, 차량을 출발시켜 카라카스로 갔었어야 했다.

카라카스로 간 다음 비밀 집결지에 모인 부대원들과 다시 작전을 수립했어야 했다.

그런데 바보 같이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로 그를 보냈고, 그리고 여기서 그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니.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도밍게즈는 룸 미러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앤 챔버도 창문에 붙어 스즈키가 걸어간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를 혼자서 보냈을까?

아니. 그녀도 제 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이 갈까요라고 했다. 가면 안 돼요가 아니라 같이 갈까요라고 했다.

이 밴 안에서 도밍게즈 자신만이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정상인이었다.

오직 나만이!

“어. 저... 저기, 저기 저건 뭐죠?”

뒷자석 창문에 붙어 건물을 바라보던 앤 챔버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도밍게즈는 다시 항운노조 건물 현관으로 시선을 돌리며 핸들을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 발에 힘을 풀었다.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그러나 그의 눈에는 조금 전과 다름없는 1층 현관 정문이 보였다. 조금 전과 변함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뭐지? 뭘 보고 놀란 거지?

“뭐죠? 뭘 보고.....”

도밍게즈는 앤 챔버에게 물으며 시선을 확대했다.

그런 그의 눈에 최상층 외벽에 매달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없었지만, 도밍게즈는 외벽에 매달린 무언가가, 권총 한 자루를 들고 그 건물로 걸어 들어간 스즈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도밍게즈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오늘만 몇 번 했는지 모를 외침이 다시 그의 입을 통해 튀어 나왔다.

“이런 미친!”

***

한규호는 유리를 깨고 건물로 들어오면서 단 한순간도 폴로셔츠를 입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고개를 한규호 쪽으로 돌리자 그 얼굴이 그가 차에서 본 푸에르토의 이목구비와 일치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았다.

푸에르토의 상체가 채 다 한규호 쪽으로 향하기도 전에 한규호는 착지한 발끝에 힘을 주어 그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 있는 권총 손잡이로 그의 턱을 후려 갈겼다.

턱 끝에서 발생한 충격은 푸에르토의 고개를 물리적으로 크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그 회전력은 푸에르토의 뇌와 두개골의 충돌을 발생시켰고, 그 충격에 뇌진탕에 빠진 푸에르토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한규호는 푸에르토의 머리가 생각보다 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조금 힘이 과했나.

최악의 경우 목의 경추 신경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을 정도의 속도로 그의 머리가 돌았다.

경추가 손상되면 최소 사지가 마비된다.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

한규호는 무의식적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린 자신의 미숙함을 탓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한규호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오른발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푸에르토의 손가락을 있는 힘껏 밟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푸에르토가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다행이었다.

푸에르토는 경추 손상을 입지 않았다.

사지 마비도 없다는 사실을 고통에 찬 비명이 증명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오른손으로 푸에르토의 머리카락을 잡고 머리를 들어올렸다.

비명을 지르는 얼굴이 들려지면서 시선이 한규호를 향했다.

한규호는 그가 사진에서 본 푸에르토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눈썹과 눈, 코와 입의 배치가 그의 기억에 새겨 놓은 그것과 일치했다. 무엇보다 운동능력을 잃었지만, 정신은 살아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분노에 찬 눈빛으로 한규호를 바라보는 미친놈이 그저 일개 조직원일 리가 없었다.

한규호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12층에 총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어쩌면 비명 소리도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가 끌고 나가야 할 푸에르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한규호는 위험하지 않다.

사단이 그를 가로막고 있더라도 그는 몸을 빼낼 수 있다.

하지만 푸에르토 이 자식은 한규호가 아니었으니까.

푸에르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한규호는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풀었다.

그의 손이 풀리자 푸에르토의 머리가 중력의 영향을 받았다.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자유낙하 하는 푸에르토의 머리에, 정확히 그의 관자놀이에 한규호의 오른손 손바닥이 닿았다.

끊어치기처럼 한규호의 오른손바닥이 푸에르토의 관자놀이 태양혈을 치고 빠졌다. 그리고 그 손바닥에서 전해진 한규호의 내기가 푸에르토의 정신줄을 끊어 버렸다.

태양혈을 맞은 푸에르토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할까?

한규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빠르고 편하게 뛰어내릴까?

그러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덩치가 12층에서 뛰어내린 충격을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쩔 수 없군.”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문으로 다가갔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6) > 끝

0